월간참여사회 2023년 09월 2023-08-29   441

[여는글]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이겨내고 모입시다

세상사에 눈 감고 귀 닫고 입 다물고 싶은 날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듣고 나니 마음이 더욱 복잡합니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레나타 살레츨Renata Salecl은 “알고 싶지 않은 마음 앞에서 무지를 향한 새로운 문이 열린다”고 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이든 혹은 분노나 두려움 때문이든, 위기 앞에서 무시와 무지의 전략을 취할 때 발생할 그 문 너머의 파국적 결과에 대해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역시 이미 60년 전에 경고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집단학살이 가능했던 조건 중의 하나가 “유대인을 태운 기차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려 하지 않았거나 알고도 눈감았던 다수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무사유가 가져온 대파멸을 교훈 삼아 시민으로서 눈을 뜨고 귀를 열어 말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또한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이겨낼 때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나치 독일 세력 하에 있던 덴마크의 예를 들어 보여줍니다.

덴마크는 반유대인 정책에 반대를 표명하며 국적 여부와 관계없이 유대인을 보호했습니다. ‘무국적 유대인에게 노란색 표식을 달게 하라’는 독일의 요구를 받자 관리들은 즉각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표했습니다. 조선업 노동자들은 독일 배의 수리를 거부하고 파업에 돌입하였습니다. 독일 경찰부대의 유대인 색출을 위한 가택수색은 ‘자발적으로 문을 열어주는 아파트에만 들어간다’는 조건으로 허용되었고, 왕에서부터 평범한 시민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피신하는 유대인을 맞아들였습니다. 숨어 있던 유대인들이 배를 타고 스웨덴으로 피신하도록 어부들이 도왔습니다. 재산이 없는 유대인의 운송비는 부유한 시민이 대신 지불했습니다. 이 사례는 비폭력적인 저항만으로 다수의 시민이 압도적인 폭력 수단을 가진 적에게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정치학 필독서와 같다고 아렌트는 말합니다.

먼 곳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덴마크 역사를 길게 불러들인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각자의 입장을 떠나 보편적 정의에 당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입니다. 불의에 눈감지 않는 시민, 이웃의 고통과 고난에 공감하고 공명하는 시민들이 함께 모여 희망 없어 보이는 역사를 바꿔낼 수 있다는 점, 우리 역사에서도 그런 시민들의 존재가 민주주의를 살려내고 확장해 온 힘이었다는 점에는 누구도 반론을 들기 어려울 것입니다.

대통령은 이번 8.15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다”면서 “결코 이러한 공산전체주의 세력, 그 맹종 세력, 추종 세력들에게 속거나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철학자 해리 G. 프랭크퍼트Harry Gordon Frankfurt는 거짓말과 개소리bullshit를 구분합니다. 거짓말은 듣는 사람을 사실이나 진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따라서 거짓말쟁이는 불가피하게 무엇이 진실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반면 개소리쟁이는 현실을 올바르게 묘사하든 그렇지 않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 목적에 맞게 소재를 선택하거나 가공하면서 자신의 속셈을 부정확하게 진술할 뿐입니다. 8.15 경축사의 언설을 구성하는 구체적 의미와 맥락이 무엇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시민들이 자신을 나라의 구성원으로 자각하고 사회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기 위해서는 국민통합을 위해 애쓰는 정치지도자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특정 정치집단의 이익을 위해 국민을 분열시키고 다른 의견을 가진 국민의 입을 막는 정치야말로 반 정치이고 전체주의적 행태입니다. 이번 연설에서 대통령은 국민통합에 관심이 없으며 일방적 배제의 전략에 의존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습니다. 또한 시민들에게 정부가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의 시간 감각이 이미 미래에 있다는 것을 대통령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공동체의 관점에서 판단하면서 행동하는 시민이 많을수록 건강한 사회입니다. 공익의 관점에서 정부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고 정책을 견인하는 것이 시민단체가 본래 해야 할 일입니다. 대통령이 강조하는 ‘자유’와 ‘자유주의’ 역시 그러한 시민의 힘으로 이뤄낸 역사적 결과물입니다. 정부가 시민사회와 시민단체를 색깔론으로 매도하거나 제거할 적으로 여기기보다 오히려 논의의 파트너로 존중하고 시민사회의 건강한 생태계 조성을 위해 노력해야 할 이유입니다.

9월 6일, 참여연대의 생일을 기념합니다.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이겨내고 함께 모여 시민사회의 힘 있는 행동, 뜨거운 연대를 경험하기를 기대합니다.


글 백미순 참여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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