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미분류 2024-02-26   392

[이슈] 물건 고쳐 쓰면 보너스 드립니다

글 권승문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

장도리, 전동 드라이버, 롤러, 헬멧, 톱, 드라이버 등 다양한 공구를 들고 있는 사람들의 손

유럽연합(EU)은 2019년 12월 경제·사회·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 패키지로 ‘EU 그린딜’을 제시했는데, 이 중 산업 부문에서는 ‘순환경제circular economy로의 전환’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어 2020년 3월 발표한 EU 신순환경제계획New Circular Action Plan에는 ‘소비자 참여’와 ‘지속가능한 소비 권리의 보장’을 새롭게 포함했다. ‘수리할 권리’(이하 수리권)를 핵심 과제로 강조한 것이다.

EU의회 의원인 안나 카바치니는 수리권을 통해 우리가 ‘채굴하고 생산하고 부수고 버리는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순환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소비자가 더 능동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기조는 이전의 EU 순환경제실행계획New Circular Package이 주로 폐기 후 관리에 초점을 맞춘 것과는 달라진 흐름이다.

바뀐 EU 정책에 따른 순환경제는 제품 생산 단계부터 시작된다. 내구성을 강화해 제품을 오래 사용하도록 하고 수리도 용이하게 설계하는 것이다. 또한 핵심 부품 확보를 의무화해 사용 단계에서 고장이 나더라도 소비자가 쉽게 수리해 제품을 재사용하도록 한다. 수리가 불가능한 폐기 단계에서는 제품을 쉽게 분해해서 부품 등을 다른 용도로 재활용하도록 하는데, 이를 위해 재활용 시장을 만들고 어디서나 재활용 제품을 사용하도록 기준을 통일한다. 이처럼 제품의 수리와 재사용은 순환경제의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다.

수리권의 개념1

수리권은 제품 설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순환경제에서 수리권은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제 수리권은 단순히 법적 보증기간 내에 ‘수리받을’ 권리를 넘어서, 제품을 더 오래 사용하도록 ‘수리할’ 권리로 확대되고 있다. ‘제조사를 통해 제품을 고칠 수 있는 권리’에서 나아가 ‘소비자가 스스로 제품을 고칠 권리’, ‘제조사가 아닌 사설 수리업체에서 수리할 권리’, ‘수리가 용이하고 내구성 높은 제품을 구입·사용할 권리’ 등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소비자에게 수리할 권리가 주어지더라도 애초에 수리가 어렵게 제품이 제작된다면 실제로는 수리권을 행사하기가 매우 어렵다. 제품 설계 단계에서부터 수리 및 재사용 가능성을 고려한 디자인을 함께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2009년 채택된 EU의 ‘에코디자인 지침’은 순환경제 정책을 대표하는 법령이라 할 수 있는데, 제품 사용과 폐기까지 전 과정에 걸친 친환경성을 최우선 원칙으로 고려해 제품을 설계하도록 하고 있다.

2022년 3월 EU집행위원회는 에코디자인 지침을 수정해 ‘지속가능한 제품 이니셔티브’ 제안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앞으로 EU 시장에 출시되는 제품들은 에너지 효율성뿐만 아니라 수리 가능성, 업그레이드 가능성, 내구성, 재활용성 등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적용 대상에는 가정용 냉장고·세탁기·식기세척기·전자디스플레이·텔레비전뿐만 아니라 휴대폰·태블릿·노트북과 같이 폐기물을 빠르게 만들어내 문제가 되는 전자제품도 들어있다. 또한 섬유·가구·철강·시멘트·화학물질까지도 포함됐다.

이어 2023년 11월 EU의회는 수리권 보장 법안에 합의했다. 법안에 따르면 기업은 소비자에게 제품을 수리할 권리를 보장하고 제품 수리에 대한 접근성도 강화해야 한다. 휴대폰·세탁기·냉장고 등 주요 제품 8종에 대해서는 법적 의무 무상 수리 기간을 2년으로 설정했다. 이 기간에 제품에 결함이 발생했는데 수리 비용이 교체 비용보다 저렴하다면 소비자는 기업에 무상 수리를 청구할 수 있다. 유상 보증기간은 제품에 따라 최소 5년에서 최대 10년까지 보장된다. 기업은 소비자에게 수리할 권리에 대해서도 고지해야 한다.

또한 소비자의 수리 접근성을 보장하고 가격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제조사의 수리 독점을 금지한다. 무상 수리에 대한 책임은 원 제조사에 있지만, 유상 수리의 경우 소비자가 원하는 수리업체를 선택할 수 있다. 수리 서비스 활성화를 위해 제조사는 예비 부품 및 수리 관련 정보도 투명하게 제공해야 한다.

EU 회원국 중 수리권 강화를 위한 입법을 가장 앞서 추진한 나라는 프랑스다. 2020년 2월 ‘순환 경제를 위한 낭비방지법’을 제정했으며, 2021년 1월 1월부터 유럽 최초로 수리가능성지수repairability index 표시를 의무화했다. 수리가능성지수는 정보 제공, 분해 용이성 등 수리 난이도, 부품공급의 원활, 부품 가격 등에 따라 제품에 1점부터 10점까지 점수를 매겨 표시하는 방식이다. 소비자가 많이 사용하는 5개 제품(휴대폰·노트북·텔레비전·세탁기·잔디 깎는 기계)을 대상으로 적용된다. 이를 통해 2020년에 40%였던 전자제품 수리 비중을 5년 내 60%까지 높이는 것이 목표다.

이뿐 아니다. 2022년 12월부터 전자제품 수리 보너스를 도입해 소비자의 제품 수선비를 지원하는데, 2023년 10월부터는 대상을 넓혀서 의류 수선비도 지원하기 시작했다. 또한 2024년에는 수리가능성지수를 확대해 제품의 지속가능성 정보까지 반영하는 지속가능성지수로 개선할 계획이다.

우리 집 냉장고의 수리가능성지수는 몇 점일까

미국에서는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하는 빅테크2 Big Tech 규제의 일환으로 수리권이 논의되고 있다. 2021년 7월 바이든 대통령은 소비자 수리권 보장과 관련한 일련의 조치를 단행하도록 연방거래위원회(FTC)에 지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으며, 이에 따라 FTC가 정책성명서를 채택했다.

정책성명서는 제조업자가 소비자와 사설 수리업자의 제품 수리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또한 제조업자가 미국 독점금지법 및 소비자보호법을 위반하면서 수리권을 제한하는 경우 이러한 행위에 대해 어떻게 조치할 것인지도 내용에 담았다. FTC의 정책성명서 채택은 미국의 수리권 운동의 성과로 평가된다. 이 운동에는 공익단체들뿐만 아니라 글로벌 수리 전문 사이트 아이픽스잇 등 다양한 민간 주체가 참여했다.

미국에서 수리권에 관한 사회적 논의는 최근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2012년에 매사추세츠주의 ‘자동차 수리 권리법Motor Vehicle Owners’ Right to Repair Act’이 통과되면서 수리권이 본격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소비자가 돈을 지불하고 구매한 제품을 손쉽게 수리하지 못하는 것은 소유권 제한”이라는 비판이 계속되면서 2014년 사우스다코타주에서 제품 전반에 걸친 수리권을 보장하는 법안이 미국 최초로 발의됐다.

이후 지속적으로 민간 차원3 뿐만 아니라 주 차원에서 입법 노력이 이뤄지면서 2024년 현재 미국 50개 주 가운데 3개 주를 제외한 47개 주에서 수리권 관련 입법안이 발의된 상황이다. 이 중 4개 주(뉴욕·콜로라도·미네소타·캘리포니아)에서는 법안이 이미 통과됐다. 뉴욕·미네소타·캘리포니아주에서는 전자제품에 대한 ‘디지털 공정 수리법’이, 콜로라도주에서는 ‘농업 장비 수리에 대한 소비자 권리법’이 통과됐다. 자동차에 한정되었던 수리권이 전자제품과 농기계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처럼 EU와 미국 등 전 세계 주요국들이 수리권 보장을 위한 법 제도를 시행하면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도 이에 대응하고 있다. 각국 정부가 법안으로 강제하다 보니 수리권 보장에 부정적이었던 제조사들도 수리권 프로그램들을 시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애플이 2021년 말에 미국에서 자가수리 프로그램을 처음 발표한 이후 삼성전자·구글 등도 뒤따르고 있다. 삼성전자는 2022년 8월 미국을 시작으로 자가수리 프로그램을 도입했고 2023년 5월에 한국에도 이를 확대 출시했다. 애플은 지난해 12월 네덜란드·스위스·포르투갈 등 24개국으로 자가수리 프로그램을 확대했다. 현재 애플의 자가수리 서비스는 33개 국가에서 지원된다. 하지만 한국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한국 소비자들은 정부가 수리권을 보장하고 있지 않아 제조사의 선의에 기대야 하는 상황이다.

수리권 법안 논의조차 못 하는 한국

이렇게 세계적으로 수리권이 확대되는 추세지만, 한국은 민법·자동차관리법·소비자분쟁해결기준 등을 통해 수리권 중에서도 ‘수리받을’ 권리만을 일부 보장해왔다.

2025년 1월 1일부터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이 시행되지만, 이 법도 ‘수리할’ 권리에 관한 구체적 내용을 규정하지 않는다. 국회에 발의된 수리권 관련 법안들 역시 수리권에 대한 개념 정의 규정을 두지 않거나 특정 제품에만 수리권이 국한되거나 혹은 순환경제와 수리권의 연관성을 고려하지 않는 등 한계를 지니고 있다. 심지어 이마저도 국회에서 제대로 논의 한 번 이뤄지지 못한 채 폐기될 운명에 처했다.

이제라도 수리권 보장을 위해 EU와 미국 등 주요국의 입법 및 정책 내용을 구체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소비자에게 수리 정보에 대해 알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소비자기본법을 개정하고, 수리권 보장을 위한 구체적인 입법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수리권은 단순히 소비자 권리 보장을 넘어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순환경제의 핵심 과제다. 기후위기가 날로 심각해지는 지금 당장, 우리 사회에는 수리권을 요구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1 이승진·송혜진·김재영·임종천, 2022, 〈소비자의 수리할 권리에 관한 연구〉, 한국소비자원, p.35.
2 일반적으로 대형 정보기술 기업을 뜻하는 말이다. 애플·마이크로소프트·구글 등이 대표적이다.
3 미국에서 소비자의 수리할 권리 보장을 위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단체는 2013년에 설립된 수리협회The Repair Association다. 소비자권리 단체, 사설 수리업체, 환경단체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돼 있으며 미국의 거의 모든 주에서 수리할 권리와 관련한 입법 활동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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