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4년 06월 2024-05-28   911

[이슈] 우리가 서로의 해방감에 기대어

2023.6.20. 성공회대학교 학생회관 앞, 제1회 성공회대학교 미니퀴어퍼레이드 ⓒ회대알리

윤영우 성공회대학교 미니퀴어퍼레이드 추진위원단

6월은 성소수자 자긍심의 달Pride Month이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이 시기를 맞이해 퀴어 퍼레이드를 비롯한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왜 이 시기일까? 1969년 6월, 미국에서 있었던 스톤월 항쟁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이 시기 미국에서 동성애는 불법이었다. 경찰은 성소수자들의 모임 공간이었던 스톤월 주점을 단속했고 이에 대한 저항이 시작됐다. 작은 주점에서 시작된 항쟁이 점차 거리로, 도시로 확산됐다. 이듬해 세계 최초의 퀴어퍼레이드가 열렸다.

역사적 기원과 ‘자긍심’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퀴어퍼레이드는 혐오와 낙인으로 행해지는 비非가시화에 저항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서울시는 서울광장 사용을 불허했고, 토론회나 강연회를 위한 각종 장소 대여도 거부했다. 작년 서울광장 사용을 불허했던 회의에서 서울시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의 한 위원은 “보고 싶지 않아 하는 권리”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서울시는 ‘노퀴어존’을 선언하는 듯하다. 사실 퀴어퍼레이드는 서울시가 핵심 비전으로 내건 ‘약자와의 동행’의 가치를 너무나 잘 실현할 수 있는 행사다. 하지만 서울시는 정확히 ‘역행’하고 있다.

‘미니’퀴어퍼레이드의 탄생

지난해 6월 20일, 성공회대학교 교정에서 제1회 미니퀴어퍼레이드(이하 회대 퀴퍼)가 열렸다. “우리의 광장은 열려 있다”는 구호를 내건 회대 퀴퍼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연대 성명이 축적되는 속도와 함께 왜곡과 오해도 무럭무럭 자랐다. 특히, 서울퀴어퍼레이드(이하 서울 퀴퍼)를 성공회대학교에서 개최하려고 한다는 오해는 치명적이었다. 연명을 요청하는 성명서에 서울시가 내린 서울광장 사용 불허 결정에 대한 강한 규탄을 담았기 때문일 것이다.

회대 퀴퍼 기획은 “어떻게 오해와 낙인으로부터, 위협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과정이었다. 축제 주최와 대상은 오로지 성공회대학교 학생으로 제한하고 기자회견도 최대한 소란스럽지 않게, 시험 기간에 공부하는 학생들을 방해하지 않는 일정으로 조정하겠다고 약속하고 이행했다. 완곡한 단어들을 선택했고, 당사자의 직접 발화보다는 교수 인터뷰 등을 통한 간접 발화로 우회했다. 모든 선택의 목적은 낙인 회피였다. 두려움은 두려움을 부른다. 우리는 분명 구석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학교에서 살고 공부하며 일하는 기획단은 퀴어와 앨라이Ally 1 가 대체 어디에서 살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공간에서 지워지는 일은 생존의 질문을 부르는 일이다. 사랑하거나 놀거나 요구할 거라면 “①당신들끼리 ②조용히 ③안 보이는 어느 구석에 가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사실상 공공장소에서 사라지라는 명령이다. 눈에 보이지 않게 피해서 존재하라는 오만한 혐오이다. 당신이 명령하든, 청유하든, 간청하든 “내가 보기 싫으니까 공공장소에서 사라지라”는 요청이 혐오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길에 나오지 못하는 퀴어, 지하철을 탈 수 없는 장애인, 카페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어린이, 인권 조례를 빼앗긴 청소년. ‘꼴 보기 싫게 거슬리는’ 존재는 광장에서 탈락한다. 서울시가 나서서 약자의 존재를 삭제하며 길거리의 성역화에 앞장설 때, 서울시가 말하는 약자와의 ‘동행’이 무엇인지 다시금 고민한다. 나도 모르는 새 단어의 의미가 바뀌었나 싶어 국어사전에 ‘동행’을 검색해 본다.

모순의 숲, 퀴어퍼레이드

사실 퀴어퍼레이드는 일 년에 한 번 도심에 찾아오는 모순의 숲이다. 드러내는 동시에 숨기 위해, 나무가 드러나는 동시에 숨겨지는 숲이 된다. 평범을 간절히 원하는 자들은 전혀 ‘평범’하지 않은 모습으로 모이고, 비로소 평범해진다. 퀴어퍼레이드에서 스스로 평범하다고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의 정상성 중독을 방증한다. 퀴어가 비정상이라는 낙인은 이성애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 평범함의 테두리 밖으로 격리당하는 게 일상이던 퀴어는 퀴어퍼레이드라는 비일상 이벤트에 입장함으로써 테두리가 지워졌음을 실감한다.

숲에 어떤 이들이 있는지 모두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뙤약볕 아래에서 서로의 해방감과 안정감에 본인의 감각을 위탁한다. 그저 그 숲에 입장했다는 이유만으로, 숲속의 나무가 된다는 이유 하나로 그렇다. 당신이 누구든 간에 당신의 벅참이 나의 해방감이 되고, 나의 기쁨에 기대어 당신은 운다. 축제의 힘은 설명할 수 없이 격앙되는 감정을 판단하지 않고 온전히 포용한다는 데에서 또 한 번 작동한다. 춤과 노래를 즐기든 그렇지 않든, 나의 존재에 자긍심을 느끼든 그렇지 못하든, 당신이 지금 무엇을 느끼든지 우리는 지금 함께 축제를 즐기는 것이다.

때로 숲의 풍경은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중년 여성 커플로 보이는 둘이 공연 트럭을 따라서 손을 잡고 행진하는 뒷모습을 떠올린다. 꼭 잡은 손, 서로를 마주 보며 짓던 미소, 듬성듬성 센 흰머리를. 세발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누비며 요청하는 행인의 몸에 십자가를 그려주던 어린이, 커다란 북을 치며 “엄마, 사실 나 퀴퍼 열었어!” 소리 지르던 때의 몸속 울림, 내 하얀 셔츠에 마구마구 낙서를 해주던 애정 어린 손가락들,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하고 노래하던 여름 같은 발언자의 목소리. 내가 그들을 속속들이 기억하기를 바란다. 그 풍경을 빠짐없이 묘사할 수 있게, 기억이 흐려질 가능성조차 없을 때까지. 눈을 감기만 해도 그 풍경을 영사하도록. 나는 그 풍경을 꼭꼭 씹어 미래를 조금 더 기쁘게 맞이할 수도 있겠다.

2023.6.20. 성공회대학교 학생회관 앞, 제1회 성공회대학교 미니퀴어퍼레이드 ⓒ회대알리

모두의 해방구가 될 퀴어퍼레이드를 향해

서울 퀴퍼와 회대 퀴퍼가 세상 모든 소수자와 연대하는 완전무결한 축제라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분명 효과적이다. 퀴어와 앨라이가 뒤섞여 길 한복판에서 존재를 인정하고 외치는 것은 그 자체로 해방이다. 해방적 경험은 속박을 인식하게 하고, 삶을 재구성한다. 축제가 주는 비일상적 안전함은 일상의 불안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폭발적이고 투쟁적이다. 그저 노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두렵게 하는 것이다.

오세훈 시장에게 묻고 싶다. 대체 무엇이 그리 두려운가? 당신들이 지우려는 약한 존재들이 보이는 것이 두려운가? 따돌림받았던 자들이 절박함으로 서로의 손을 잡는 것이 두려운가? 간절한 즐거움과 즐거운 간절함으로 열리는 이 축제가 진짜 모두의 축제가 되는 것이 두려운가? 이 축제가 당신들에겐 대체 어떤 의미이길래 이토록 외면하고 지우려는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서울시는 서울퀴어퍼레이드의 서울광장 사용을 불허했다. 서울광장에서는 ‘책읽는광장’ 행사가 열린다. 공공 도서 관련 예산으로 고무줄 놀이를 하던 서울시가, 시민이 책을 읽어야 한다며 퀴어를 광장에서 쫓아낸다. 올해 회대 퀴퍼 추진단 또한 개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시는 광장에서, 캠퍼스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그럼에도 우리가 다시 모이려는 이유는 축제가 곧 해방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서로의 해방감에 기대보면 어떨까?

  1. 앨라이는 동맹, 협력자 등을 뜻하는 단어로 동맹을 맺다, 연대를 맺다라는 뜻이 있다.
    성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는 모두를 의미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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