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05월 1999-05-01   494

박상천 장관, 인권법 이대로는 안됩니다

박상천 장관, 인권법 이대로는 안됩니다

"아니 왜 민간단체 말만 듣습니까? 앰네스티가 4월 9일, 인권법과 관련해 대통령께 공개서한을 보낸 것은 참으로 유감입니다. 법무부는 그 동안 공청회 등을 통해 충분한 의견수렴과정을 거쳐 인권법을 통과시켰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앰네스티가 민간단체들의 편만 드는 것 같아요. 우리쪽 이야기도 들어야 합니다.” 지난 4월 13일 국제사면위원회 사무실을 방문한 곽무근 법무부 인권과장은 앰네스티 동아시아 담당자 클래어와 만난 자리에서 이와 같은 말을 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난 3월 30일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인권법을 밀실정치의 작품, 날치기 인권법이라고 비난한 인권단체들이 오히려 국제적으로 거짓말을 한 셈이다.

인권단체들은 지난 3월 30일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인권법안’을 거부하며 34인이 인권운동가 명동성당에서 7일간 단식농성을 벌였고, 지난 4월 13일 해단식에서 ‘날치기 인권법 철회와 법무부장관 퇴진운동’을 전국민적으로 전개할 것이라고 표명했다. 인권단체들은 이대로 인권법이 국회에서 통과된다면 김대중정부에 대한 강도높은 투쟁을 벌여나가겠다는 선포를 한 것이다.

1년 전,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인권법 제정 및 국민인권위원회 설립을 발표했다. 98년 3월 새정부 100대 개혁과제 발표에서 이를 다시 공표하기도 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설치를 공표하자 인권단체들은 이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특히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인권운동가들의 가족들과 그 피해자들은 김대중정부의 인권정책에 의해 지금까지 가슴에 묻고 살아야만 했던 한이 비로소 풀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1998년 5월 국제앰네스티는 「한국의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에 관한 권고안」 채택에 대해 줄곧 독립적이며 실효성 있는 국가인권기구를 설치하라고 촉구했다. 동시에 지난 9월, 30여 개 민간단체가 참여한 ‘인권법 제정 및 국가인권기구 설치 민간단체 공동추진위원회(공추위)’가 결성됐다. 공추위 대표자들은 박상천 법무부장관 면담을 통해 국가인권기구 설립을 위해 투명하고 민주적인 입법 과정을 거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법무부가 9월 25일 발표한 인권법 시안을 보며 인권단체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법무부가 마련한 법안에는 법무부가 모든 것을 주도할 수 있게끔 한 독소조항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공추위와 대한변협 등은 비판 성명서를 통해 국가기구로 인권위원회를 설립하고 민주적 입법과정을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법무부가 국가인권기구를 주도하려는 저의에 대해 국제기구와 국가인권기구 전문가들 또한 그 우려와 문제점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유엔 인권고등판무관 특별자문관인 브라이언 버드킨(Brian Budkein)은 지난 10월 19일 한국을 방문, 공식적으로 “법무부 시안은 인권위원회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힘들 것”이라는 요지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앰네스티도 김대중 대통령과 법무부장관에게 제1차 공개서한을 보내 “법무부안이 독립성과 실효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국내외에서 법무부안에 대한 비판이 일자 김대중 대통령은 시민사회단체 대표자 초청 간담회를 개최하여 “인권법다운 인권법을 만들 것”이라고 약속했고 일주일 후인 11월 5일 “유엔 권고안에 따라 인권법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인권단체 대표자들과 사회원로들이 이렇게 법무부의 영향력을 배제한 독립적 국가인권기구를 요구한 것은 지난 민주화시절부터 인권탄압의 선봉에 법무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국가인권기구라해도 오히려 정부기구가 개입한다면 유명무실한 인권기구가 될 것은 자명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도네시아에 있다. 무늬만 인권기구라면 법인이든 국가인권기구든 다를 것이 별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있는 독립적인 기구여야 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유엔 전문가들이 한국의 국가인권기구 설치와 관련하여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조사해 올 것을 박주선 청와대 법무비서관에게 지시했다. 1999년 1월 26일 미국 방문길에 오른 박주선 비서관은 뉴욕에서 유엔 전문가들을 만나 법무부 인권법안을 설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대통령에게 유엔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법무부의 ‘인권법안’을 지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에 의구심을 갖게 된 공추위는 유엔 인권전문가들에게 사실 확인 편지를 보냈고 박주선의 보고가 사실이 아님을 파악하게 되었다. 오히려 유엔 인권전문가들은 박주선 법무비서관이 자신들의 의견을 왜곡한 사실을 뒤늦게 알고 불쾌한 심경을 공추위에 보내왔다. 국민과 대통령, 국제전문가들까지 속인 박주선 청와대 법무비서관의 보고서 파동은 한 편의 사기극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는 법무부의 부도덕성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공추위가 박주선의 해임을 촉구한 것은 단순히 한 개인에 대한 책임 추궁 차원이 아니라 과거 인권 탄압에 앞장서온 법무부가 국민정부 들어서도 달라진 게 없다는 사실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다. 법무부의 이러한 비열한 태도는 보고서 왜곡 파문으로 끝나지 않았다. 정부법안에 대해 시민·사회단체들의 비판이 멈추지 않자 지난 3월 5일 김대중 대통령은 박상천 법무부장관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당정협의안에 대해 “법무부 장관이 개입하도록 되어 있는 조항을 재검토하고 민간단체 대표들과 장관이 직접 만나 논의하라”고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그러나 박상천 법무부 장관은 대통령의 지시를 묵살한 채 민간단체들에게 어떠한 연락도 취하지 않고 법안을 그대로 차관회의와 3월 30일 국무회의에 상정했다. 결국 민주적 절차를 강조한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마저도 보수검찰관료의 입장을 대변하는 법무부장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인권법 최종안이 3월 22일 밤 인권정책 관련 국민회의측 전문가였던 김원길 정책위의장과 이기문 인권위원장이 낙마한 틈을 타 결정되고, 5공 때의 인물들이 정책위의장으로 재등용된 수 3월 30일 대통령이 주재 국무회의에서 결국 인권법안을 통과시켰다.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TV공청회 한 번 열지 않고 통과된 날치기 인권법은 97년 YS정권의 노동법 개악 시도를 방불케 한다.

국가인권기구 설립에 가장 큰 기대를 걸었던 인권 피해 가족들은 기대가 분노로 바뀐 실망감에 허탈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권단체 운동가 34인이 일주일 단식농성을 전개한 것이다. 단식농성을 통해 연합단식단이 주장한 내용의 요지는 무엇일까? 첫째, 법무부의 보조기구에 불과한 인권위원회는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는 것이다. 법무부가 인권위원회의 상부기관으로서 인권위원회의 활동을 감사하겠다는 법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

둘째, 인권위원회의 권한에 대한 문제이다. 통과된 인권법에 의하면 설립될 인권위원회는 사실상 실효성을 갖지 못하는 약체기구이다. 공정거래위원회, 노동위원회, 여성특위 산하의 남녀차별개선위원회도 시정명령권을 갖고 있는데 인권위원회는 시정권고밖에 권한이 없다. 따르지 않아도 그만인 시정권고를 내린다고 무슨 구속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

셋째, 관할범위를 한정함으로써 기본적인 인권침해행위에 대한 조사를 원천봉쇄하고 있다.

최종안에는 기존 법률로도 이미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규정되어 있는 8가지 인권침해행위와 차별행위만을 조사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결국 사회권적 기본권에 대한 인권침해행위나 재소자의 진료청구가 이유 없이 거부되고 재소자에게 신문이나 서적의 특정 기사를 삭제해 배포하는 등 구금시설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인권침해행위, 금서목록이나 취재권의 침해 등 자유에 대한 침해행위, 집회·시위의 자유에 대한 침해행위 등 기본적 침해행위들은 조사대상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현재 상태로 인권위원회가 설립된다면 인권위원회는 기본권 침해행위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묵인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강조해야 할 점은 절차상의 비민주성이다. 밀실정치에 의한 합의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절차상의 민주주의가 그 나라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평가하는 데 가장 큰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민간단체들과 충분한 논의를 거쳐 설립되어야 함을 누차 강조한 대통령의 지시도 결국 보수세력에 의해 무기력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김대중정부가 표방하는 개혁이 수구보수세력에 의해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는 반증이 되고 있다.

민주주의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후퇴하는 민주주의 벼랑에서 좌초한 개혁의 대통령으로 남을 것인가? 인권단체들은 인권정책에 장애가 되고 있는 법무부장관의 퇴진을 위한 범국민운동을 이미 선포하였다. 이 모든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다면 인권단체들은 김대중 대통령의 개혁정책을 가장 강도높게 비판하는 투쟁을 선언할 것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스스로 강조해왔듯이 인권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으려면 김대중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한 때다.

차미경 참여연대 국제인권센터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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