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08월 1999-08-01   1049

새천년기념사업, 졸속아이디어로 모래성 쌓기

새천년 준비위원회에 날리는 직격탄

새천년준비위원회(위원장 이어령. 이하 ‘새준위’)는 지난 6월 15일 기자회견을 갖고 2000년에 시행할 새천년사업의 윤곽과 일정 등을 발표했다. 근세사로 보면 임진왜란 이후 최대의 민족적 시련을 겪은 20세기를 떠나보내면서 새로운 천년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맞이하자는 것은 인지상정의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세계 각국에서도 새 천년 준비를 위해 크고 작은 문화행사를 준비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세계 각국의 문화적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문화올림픽’과도 같은 효과가 예상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국가이미지가 크게 실추할 수도 있고, 그런 점을 염두에 두어서인지 일부 선진국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자국의 문화적 경쟁력을 ‘과시’하려는 대규모 프로젝트들을 추진해왔다. 이런 분위기 탓에 우리도 뭔가 특별한 행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뭔가 ‘특별한’ 일을 하려면 그만큼 사전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들이 최소한 3~4년 이상에 걸쳐 계획을 다듬고 준비해온 것과는 대조적으로 새준위는 지난 4월 15일에 발족한 지 2개월만에 ‘잽싸게’ 마스터플랜을 내놓았다. 하기야 선진국들도 20~30년이 걸려야 건설하는 신도시를 2~3년만에 뚝딱하고 만들어내는 순발력을 지닌 우리이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리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70~80년대의 순발력에 의존한 고도성장의 결과가 90년대에 들어 ‘사고공화국’으로 귀결된 교훈을 망각한 채 새준위는 새천년사업의 준비 역시 순발력에 의존함으로써 20세기의 악몽을 21세기로까지 연장하려는 모양이다.

둘째,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다보면 가랑이가 찢어지기 마련이다. 선진국들이 대대적인 문화행사를 준비하는 것은 그들이 지속적으로 축적해온 문화적 역량을 바탕으로 해서이며, ‘과시’할 만한 경제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IMF의 악몽이 채 가시지도 않았고, 자랑할 만한 문화적 역량이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지를 철저히 반성해야 할 형편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남들이 하니까 우리도 하자는 식이 되면, 가만히 있느니만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짧은 기간에 뭔가 특별한 일을 꾸미려고 구체적인 실행가능성이나 타당성은 따져보지도 않고 ‘반짝’ 아이디어로 ‘땜질’하여 내놓은 사업계획을 들여다보면 그런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새천년 맞기 전에 국민들은 반성하라?

대표적인 사업으로 발표된 <평화의 열두 대문>은 상암동 평화의 공원에 십 년에 하나씩 대문을 세워 120년 동안 열두 대문을 세우는 프로젝트다. 120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친 사업이라는 점에서 발상의 순발력을 만회할 수 있다는 장점이 돋보인다. 하지만 이 사업이 국민의 헌금에 의존하는 사업이라 헌금이 안걷히거나 모자라면 어느 때고 중단될지 모른다는 게 문제다. 더구나 내부에 사이버박물관을 설치하고 문 하나마다 10년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게 한다는데 그야말로 사이버박물관의 특성을 무시한 도식적 발상이다. 세계의 평화지수와 행복지수를 공표한다는 <평화기상대>도 이름은 좋다. 그러나 ‘평화’를 운운하자면 무엇보다 먼저 서슬퍼런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일이 급선무가 아닐까? DMZ 안에서 씻김굿을 하며 전시회를 연다는 도 그렇다. 판문점에서 남북한미술전시를 열자면, 북한측의 참여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북한측의 참여를 위한 배려가 엿보이지 않는다.

93년 동경에서 처음으로 열렸던 <코리아통일전>(남·북·조총련 미술가들이 공동참여) 이후 남북문화예술교류를 위해 북한측과의 협의를 주도해온 민족예술인총연합을 배제하고 한국미술협회와 통일부가 주관이 되어 북한미술가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공원면적이 절대 부족한 서울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상암동 부지에 15만평의 <평화의 공원>을 세운다는 것은 좋다. 그러나 왜 여기에 문화예술인과 지식창조인, 사회공헌자의 묘지, 기념관이 들어서야 하는가? 철저하게 엘리트주의적 발상이다. 게다가 하필 묘지를 만들어 시민들의 휴식처를 망치자는 것인가? <사회환경>, <도시환경>의 행사내용은 주로 디자인 대회나 거리 디자인 정비사업으로 채워져 있다. ‘환경’ 문제가 디자인 문제로 해결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60~70년대 산불이 많던 시기에 초등학생들에게 ‘산불 조심 포스터’를 열심히 그리게 하던 것과 비슷한 발상이다. 거리를 깨끗이 하자는 게 문제될 것은 없지만 근본적으로 ‘새마을운동’ 하자는 발상과 다를 게 없다.

이름에 비해 내용이 부실하거나 타당성이 적은 이런 행사들이 주로 하드웨어적인 측면에 관련된 것이라면 <새인간의 천년화> 사업은 국민의식 전환을 요구하는 사업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우리 사회에서 정작 의식 전환이 요구되는 대상은 국민이 아니라 권력층이다. 부정부패방지법 하나 제정하지 못하는 주제에 국민들에게 의식전환을 호소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반성할 자가 도대체 누구인데 비영리단체와 민간단체가 주관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지난 세기에 대한 반성’을 결의토록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걸까? 게다가 2,000명의 젊은이를 선발하여 ‘미래 젊은이의 모델’을 제시하자고 하는 데, 악몽 같은 ‘새마을 지도자’ 게임을 반복하자는 것인가? 거기다 이들을 데리고 박정희나 전두환이 그렇게도 좋아하던 ‘카드(이번에는 LCD)섹션’ 놀이를 또 하자고 한다. 더구나 20세기를 끌어온 ‘국가원로’들이 뭘 잘했다고 ‘20세기 유언’을 남기게 하자는 것인가? 그야말로 적반하장이다.

낡은 사고청산이 우선돼야

<지식창조 천년화> 사업을 보면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한글의 세계화’가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이 땅에서 먼저 ‘한글’을 제대로 보존하는 일이 더 시급한 일이 아닐까? ‘코너 킥’을 ‘모퉁이 차기’라고 하면 웃으면서 어떻게 에스키모에게 한글을 가르치자는 것인지? 국내에서는 영어가 판치기 때문에 이제는 무문자 민족에게나 한글을 보급하여 명맥이라도 이어가자는 것인지? <지식창조 인프라 육성>안을 보면 지식창조를 신기술, 신상품개발과 동의어로 생각하는 발상들이 줄을 서 있다. 20세기의 한계와 병폐가 바로 문화와 예술, 지식을 이런 식으로 상품개발과 동일시하는 데서 왔다는 점을 정말 모르고 하는 얘기인지? 매 사업이 이런 식이므로 일일이 문제점을 거론하기에도 손이 아플 지경이며, 그 발상의 천박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이런 사업을 내년에 시행한다면 세계적인 망신이 아닐 수 없다.

새천년준비사업이 왜 이렇게 현실성도 없고, 권위주의적이며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가득차 있을까? 새준위의 구성원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20명의 위원 중에서 40대는 2명뿐이며, 50대가 7명, 60대가 9명, 70대가 2명으로 되어 있다. 이러니 새롭고 창의적인 발상이 나올 리가 없다. 물론 나이가 많다고 무조건 구태의연하다는 것도, 새롭다고 무조건 좋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젊은 세대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구조를 전혀 갖추지 않은 채 미래를 준비한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라는 얘기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래 우리 사회는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을 하느라 진통을 겪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문화개혁’의 필요성은 거론한 적이 없다. 만일 정부가 새천년의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어떤 역사적 선언을 할 필요를 느낀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쓰레기처럼 쌓여 있는 일제와 냉전시대의 잔재들, 공공의식의 붕괴와 천민자본주의의 병폐들을 적극적으로 청산함으로써 새천년을 새롭게 시작하자는 결의부터 밝히는 선언이어야 할 것이다. 새천년의 시작을 또다시 ‘반짝 아이디어’로 치장하려는 천박한 계획을 취소하고, 2000년 첫 날에 ‘문화개혁’의 방향과 일정을 선포하는 것으로 기념사업을 대신하려는 새로운 자세를 취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국민에게 신뢰를 주고 ‘문화의 세기’에 대한 ‘희망의 설계’에 온국민이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하는 길이 아닐까?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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