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09월 1999-09-01   464

왜 나는 시민운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는가

시민단체에 던지는 시민들의 쓴소리
“너무 엄숙해서 부담스럽다”
김명기 회사원

아는 후배가 들고 온 몇 장의 회원가입원서를 받아들고 난처한 기분에 처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거절하자니 뭔가 불성실하거나 무책임한 사람처럼 느껴지고, 선뜻 받아들이자니 내키지 않는 기분 말이다. 여직원이 들고온 불우이웃돕기 일일찻집 티켓이나 생활이 어려워진 친척의 보험가입 권유 때의 기분과 비슷하다면 과장일까. ‘나와는 무슨 관계인데?’ 하면서도 ‘에이, 큰돈도 아니지’ 하면서 억지 웃음으로 서명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을 것이다.

회원의 회비에 의한 재정자립 비율이 높다고 알려진 참여연대라 해도, 자발성이 결여된 허수의 비율은 안심할 정도는 아닐 거라고 짐작해본다. 젊은 날의 부채감을 경감하는 방법으로 ‘회원 되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비록 단체의 ‘묵시적 우군’은 될지언정 ‘자발적 참여 회원’은 아니다.

돈 문제에 관한 한 솔직해야 한다. 그러나 지고한 목적을 갖고 활동하는 사람일수록 놀랍게도 사농공상의 의식이 지배하고 있다. 소위 선비의식이고 투사의식이다. 인간은 도덕적으로 별로 믿을 만한 존재가 못되어서 성인이 아닌 바에야 그 반대급부를 찾게 된다. ‘내가 이렇게 희생하고 있으니 난 대접받아야 돼, 단 돈은 아니야’ 하는 의식이 뜻밖의 권위의식으로 이전된다. 권력의 또 다른 얼굴을 띠게 되는 것이다.

더 나은 사회를 향해 실질적인 활동을 하기 위한 단체라면 공인된, 혹은 만들어가는 도덕적 권위가 있다. 이슬만 먹고 살 수도 없으면서 돈 문제에 알레르기를 보이면 그 단체는 물론, 사회 전체의 큰 손실이 될 수도 있다.

일례로, 불매운동 하기로 한 기업이라서 광고를 게재할 수 없다는 식의 태도는 이해는 되지만 수긍하기 어렵다. 광고가 게재되는 다른 기업들은 떳떳하다는 것을 검증했단 말인가? 자기위안일 뿐이다. 돈을 받아도 할 말은 다 하는 선구적 관행을 만들어야 한다. 뒷거래도 아니고 광고인데. 받으면 그럴 수 없는 게 인지상정이니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잘못된 관행에 이미 굴복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게 불만인 기업이 다음에 광고 게재 않는다면? 그러면 받지 않으면 되는 거다. 내부 의사결정과정에서 능히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실리를 취할 수 있다고 본다.

단체가 목적한 활동을 일관성 있게 확산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적립된 기금이 불가피하다. 낭비되는 혈세도 많은데 정부 지원 좀 받으면 어떤가? 기업이 성숙한 사회를 위해서라는 대외 명분으로 내겠다고 하면 거부할 이유도 없다. 냄새나는 거래만 안 하면 된다. 그게 두렵기 때문에 아예 안 받겠다고? 그런 생각이라면 거창한 목적일랑은 접어두고 그냥 몇 명이 모여서 소박하게 활동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합법적, 합리적 범위 내에서 열심히 돈을 모으는 일을 시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수익사업이건, ARS건, 목적을 갖고 정기적으로 자발적인 가입의 기회를 만들건, 텔레뱅킹을 하건, 방법은 연구하면 나오지 않겠는가? 단, 회원들이 내는 크지 않은 회비의 혜택은 대부분 회원 자신들에게 되돌아가야 한다. 생활에서 밀접한, 개개인들의 소망에 근접하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통해 되돌려주고 참여시키는 것이 궁국적으로는 ‘기부자의 숫자=참여자’의 숫자가 되는 수준 높은 시민사회를 만드는 길일 것이다.

마음은 있어도 회비내기 쉽지 않아
정병일 서강대학교 대학원 북한 통일정책학 석사과정

내가 참여연대를 알게 된 것은 불과 2년 전이다. 그곳 일을 돕는 후배에게서 참여연대가 하는 일을 설명 듣고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데 놀랐다. 참여연대를 위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런 물음에 후배는 가입원서와 홍보지를 건네주었다. 그러나 그 뒤로는 적극적인 가입권유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얼마전 우연히 참여연대의 기사가 실린 잡지를 보고 그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기억을 되살렸다고는 해도 여전히 선뜻 내가 참여해서 할 수 있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나처럼 지켜보는 시민들에게 참여연대는 엘리트주의를 표방하는 멀기만 한 단체로 비쳐지기도 한다. 물론 마음은 있어도 회비를 내거나 기부를 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내가 유별나게 소심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주변사람들과 시민단체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 자주 이야기한다. 그러나 대부분 자신들이 직접 회비를 내거나 행사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현실감 없게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자신이 내는 회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일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다. 돈을 내는 만큼 우리 사회의 어느 어두운 구석이 어떻게 밝아질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또한 회비를 낼 만큼 시민단체에 대한 신뢰도 별로 없어 보인다. 그리고 회비를 내야 할 시민들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은 높지만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시민단체에 자신들이 직접 참여하려는 시민의식은 별로 없다. 명예와 명분은 중요시하면서 정작 이름을 내걸지 않고 묵묵히 사회를 위해 기여하고자 하는 성숙한 자세는 찾아보기 힘들다.

시민단체는 시민들에게 마을회관이나 놀이터 같은 친근한 벗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동네 아이들이 온종일 뛰놀며 배우는 살아있는 교육현장 같은 곳 말이다. 이렇게 문턱이 낮아진 시민단체라면 많은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회비를 내며 참여할 수 있을 것 같다. 수재의연금이나 이웃들의 딱한 사정이 방송되면 도움의 손길이 줄을 잇는 우리 사회가 아닌가. 그런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는데 일차적인 책임은 시민단체에게 있다. 친근하고 가까이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들이 의지함으로써 위안을 받고, 참여하고 베풀면서 사회의 어느 한 모퉁이가 조금씩 밝아지는 그런 시민단체, 시민들의 건강한 상식을 대변해주는 시민단체, 존재의 고립감을 벗어나게 해주는 시민단체를 대망한다.

“게으른 나를 끌어 달라”
송진혁 은행원

나는 87년도에 ‘민중봉기를 통해 제헌의회 쟁취’를 주장하는 총학생회가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독재타도와 직선개헌의 함성이 물결치던 거리에서 우리 학교는 유독 찬바람 부는 ‘제헌의회’를 소리 높여 외쳤다. 아무튼 그해 6월, 교문을 나서며 제헌의회를 외치다가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린 끝에 엉뚱한 대열에서 ‘직선개헌’을 외치게 되었던 기억이 난다.

그 젊은 날의 투쟁이 나에게 조금이나마 자유를 그리고 시민으로서의 자존심을 유지시켜 준 계기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아무튼 졸업한 뒤로 학생운동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물론 21세기를 바라보는 지금, 개혁의 책임을 과도하게 학생운동이 짊어진 상황은 더 이상 아닌 것 같다. 노동운동, 시민운동 그리고 그 정치적 성취를 위한 개혁정당운동 등이 그 개혁의 주체로 서야 할 시기라고 짐작한다. 그런데 이런 갸륵한 생각에도 불구하고 지금 개혁의 주체가 누구인지, 어쩌고 있는지도 솔직히 잘 모른다. 참 미안하다. 먹고 살려다 보니 그렇게 됐다. 7년여의 직장생활로 학생시절의 이상과 비범하고픈 욕구들은 갈수록 지리멸렬해지고, 범상한 봉급생활자로 굳어져가고 있다.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가 초저녁부터 피곤해 하셨듯 9시 뉴스도 못보고 초저녁 잠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학생시절의 이상적 잣대로 나의 세속적 삶을 꾸짖어보기도 하지만 이상이라는 허상에 기대느니 그냥 더 솔직하게 나의 욕구에 충실함이 더 나를 편하게 해주지 않을까. 몸 담은 직장에 기본적으로 월급 받는 만큼 충실하다 보니 나의 정치적 사회적 욕구는 세운상가 앞에서 돌을 던지다 최루탄에 흩어져 남대문 어느 골목에 외따로 숨어 있는 모양이다.

일상의 생활과 생계에 쫓겨서 이제는 단지 약간의 정치적 선별력을 갖고 세상을 지켜본다. 인생의 때를 최소화하자는 정도로. 난데없이 독재타도를 외치는 전직 대통령과 3김 청산이란 알량한 비전을 제시하는 정당이 내가 기댈 곳은 아니란 생각으로….

이런 얕은 그래서 너무 뻔하고 상식적인 정치적 선별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우리 시민운동의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글쎄 너무 진보적이고 난해한 정치 사회 경제 이념에 나 같은 시민은 어리둥절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어리둥절한 시민은 물론이고, 이념주창자간의 반목과 질시는 우리를 좌절시키고 무력화시키지 않을까. 적전내분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참여연대가 지향하는 취지를 너무 몰라서 미안한데, 참여연대란 이름은 정말 좋은 이름이다. 이름이 좋아서 그런지 참여연대가 요즈음 언론도 많이 탄다. 아마 비슷한 길을 가고 있는 다른 단체들이 부러워할 만하다. 이런 주변의 부러워하는 단체들이 참여해야만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연대함으로써 참여되는 역할을 진정 시작해 주시기 바란다.

그 힘찬 연대의 물결이 게으른 나를 끌어당겼으면 좋겠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