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09월 1999-09-01   1279

‘해피 투게더’로부터의 사색

시민운동가가 추천하는 한편의 영화<타락천사>, <동사서독> 등으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왕가위 감독은 뛰어난 영상감각과 심리묘사로 인정받고 있다. 영화 마니아들이 왕가위 감독의 작품을 선호하는 이유도 사실은 그의 세련된 감각에 있다. 우선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각 장면은 CF의 짤막한 장면 장면을 엮어놓은 것처럼 세련미가 있다. 실제로 그의 영화 중 몇 장면은 국내 CF 장면에 가끔 패러디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주인공의 심리묘사에 초점을 둔 주관적인 시간의 배열과 영상기법이 관객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그가 표현하는 몽환적 분위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영화 속에서 현실보다는 의식의 흐름이 더 부각되고 현실은 의식을 확장시키는 매개물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영화 속 주인공은 현실로부터 끝없이 유리될 수밖에 없다.

내가 소개하고픈 영화 <해피투게더>의 주인공 아휘와 보영은 동성연인 사이다. 영화의 시작은 두 연인의 무모한 도피로부터 시작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라는 장소는 그들의 삶의 터전을 훌쩍 떠난 낯선 곳이다. 그러니 꼭 그곳이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홍콩이 아닌 곳, 둘의 사랑이 거부당하지 않을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 그러나 둘은 그곳에서도 불안정한 관계를 유지하다 결국 헤어지고만다. 어떤 식으로든, 어느 장소이든 둘의 사랑은 안정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두 사람은 점점 더 깊은 불안과 상처를 안고 산다. 이런 관계 속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만족시켜줄 수도 없다. 때문에 아휘와 보영은 세상으로부터도 어떤 만족을 얻지 못한다. 현실상 왜곡된 그들의 사랑처럼 그들이 맺는 모든 관계도 난마처럼 얽힌다. 이 연속되는 괴리와 왜곡이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지, 현란한 영상과 감미로운 음악에 묻혀 그들의 관계는 영화 속에서 차차 잊혀진다.

<해피투게더>는 왕가위식 허무에 대한 극찬이다. 어수선한 홍콩의 국내 사정과 맞물려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충분히 어필될 만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홍콩 젊은이들이 혼란한 국내사정 때문만으로 <해피투게더>를 선택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아마도 왕가위의 탁월한 영상언어 기법이 무수한 영화 속에서 <해피투게더>를 골라내게 하는 데 한몫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해피투게더>도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상실감과 허무, 그리고 모든 관계로부터의 단절을 감미롭게 그리고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일상의 괴리감을 극대화시킨 인물과 배경, 그 위에 설정된 현실적으로 왜곡된 사랑. 그리고 아무런 가능성도 엿볼 수 없는 반복되는 갈등과 좌절. 얼마나 더 절망하고 상실해야 하는지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함.

그러나 차라리 복잡하게 풀어헤쳐진 스토리와 이미지 전개는 마지막에 매우 단순하게 정리되는 느낌이다. 아휘가 막연히 동경하던 이과수폭포를 찾아 떠나고 다시 홍콩으로 돌아오는 중 우연히 식당주인인 진의 부모님을 만나게 되고 사진을 가지고 나오면서 “만나야할 사람은 만난다”라는 대사를 남기는 부분에서 멀어지는 아휘의 뒷모습은 그의 방황을 다시 현실에 대한 모호한 부정으로 매듭짓는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90년대를 마감하고 있는 지금 ‘비틀거리는’ 젊은이들에게 감미롭게 속삭이는 왕가위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더불어 증보판으로 출간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는다. 한 평이 채 안 되는 감옥에서 펼쳐진 깊이 있는 사색과, 지구의 끝과 끝을 오가면서도 자유롭지 못한 젊은이들의 방황을 보면서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다시 생각해본다.

송주영 지구촌나눔운동본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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