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09월 1999-09-01   1464

생물학적 운명을 넘어

『남성의 과학을 넘어서』 오조영란 홍성욱 엮음/창작과비평사

만물의영장인 양 오만을 떨어온 인간에게 마치 자연이 내리는 형벌이자 계시인 듯 가뭄과 폭우와 태풍이 한바탕 휩쓸더니 이제는 무더위와 열대야가 한창이다.

이 와중에 『남성의 과학을 넘어서』를 띄엄띄엄 겨우 읽었다.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본 과학 기술 의료’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오랫동안 독점적으로 지속되어 온 남성과 과학의 동거체제, 그에 대한 의문과 해명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을 펼쳐 든 것은 어설픈 페미니스트 흉내를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안의 어떤 억압들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30줄에 들어서면서 나는 어줍잖은 진보주의자나 페미니스트 행세를 하나씩 버리기 시작했는데 성장기에 나를 세뇌하고 형성한 가치관을 제대로 반성하지 않고 교정하지 않는 한 그 어떤 슬로건도 공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7,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그리고 운동에 투신했던 선후배, 친구들(나까지 포함해서)의 언행에서 어떤 선민의식, 영웅주의, 모험주의, 주관주의, 경직성, 추상성 등을 얼핏얼핏 엿볼 때마다 나는 자연인으로서,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에 대해 회의하곤 했다.

이미 우리 의식 속에 충분히 잉태되어 있던 것들, 가령 그것은 내 안에 있기도 했다. 무지와 비겁함을 그럴 듯한 변명으로 위장하거나 항상 앞서 나가야 한다는 전위의식의 강박에 시달리던 내 젊은 날의 초상이 그렇다. 그 중에 어줍잖은 페미니스트 행세도 그랬다. 내 안의 저 깊은 바닥에서 메아리치는 모순된 가치관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내가 허위로 포장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회의보다는 긍정을, 비판보다는 대안을, 주장보다는 책임에 기울어 있는 나이라는 자각이 들면서 나는 내 안에 축적된 전통과 보수주의를 조금씩 수락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오랫동안 나를 억압해 온 것들을 응시할 여유를 갖게 되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젠더(Gender)로서의 남성이 시달려야 하는 강박들, 예를 들어 강해야 한다는 신념들, 혹은 함부로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는 전통적인 계명들,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그런 것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런 편견과 강박이 빚어내는 허세와 위선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가를 깨닫고 교정하는 일은 그러나 우스꽝스럽기는 커녕 진지한 대면으로도 좀처럼 허물어지지 않는 거대한 벽이다. 그래서 섣불리 여성해방에 동조하고 페미니스트 행세를 하기에 앞서 그런 억압들에서 먼저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성의 과학을 넘어서』는 이런 면에서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신의 질서와 복음이 지배하던 중세를 넘어 계몽주의 시대 이래 과학은 꾸준히 신의 지위를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하기사 모계사회 이후의 신마저도 점차 남성으로 고정되어온 것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과학은 확고한 진리의 법칙을 발견하며 보편성으로 나아가려 한다. 그리고 이 과학의 세계에서 남성들은 그들의 강령과 복음서를 하나씩 만들어낸다. 그래서 모성 혹은 여성성으로 회자되는 자연에 반해 과학과 산업화는 점차 남성들의 전유물로 굳어진다. 남성이 여성들보다 우월하다는 담론이 이제 과학이라는 이름의 권위를 빌어 유포된다. 그것이 실은 과학 혹은 과학사의 서술을 독점해온 남성들의 편견이자 오류라는 것을 이 책은 따끔하게 지적한다. 반증을 위해 필자들은 두개골학, 사회생물학, 성호르몬까지 반추한다.

필자들은 정자와 난자의 관계에서 난자의 적극적 운동과 역할을 강조한다. 게다가 ‘정자와 난자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자체가 성은 아니다. 성은 배수체(diploid, 2n)인 개체에 부여되는 것이고 정자와 난자는 성이 결정되기 이전 상태인 단수체(haploid, n)일 뿐’이라는 꼼꼼한 환기. 기실 성(sex)이 결정되는 것은 정자와 난자가 수정을 통해 염색체가 배열되면서부터다.

이런 뒤집기는 얼마든지 있다. 두개골의 크기나 뇌의 질량이 지능에 비례한다는 가설이 무너진 사례가 그렇고 남성호르몬, 여성호르몬이 구별되어 성차를 확정하는 게 아니라 남녀의 몸에 여러 가지 성호르몬이 혼재하며 작용한다는 발견이 그렇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런 주장들이 폐기되면서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위장되어온 과학의 이면에 도사린 정치성이 폭로된다.

전 시대의 그런 주장들이 남성, 혹은 수컷이라는 메타포에 적극적, 능동적, 공격적, 긍정적이라는 함의를 정당화한 것처럼 그 반대 편에 여성을 몰아넣음으로써 여성의 생물학적 운명을 세뇌해온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여성이 의료, 기술, 산업화에서 소외되어온 사정들도 하나하나 드러난다.

이런 논의를 통해 이 책의 필자들은 이제까지의 페미니즘 논의를 여성의 사회적 영토확장(혹은 수복)에서 보다 근본적인 곳으로 돌려 놓는다. 그것은 생명체의 본질에 대한 탐구와 재정의가 없는 한 여성의 사회운동이 근원적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탓에도 있다.

또한 이 책의 뒤에 실린, 과학사에서 잊혀지거나 누락되어 과소평가된 여성 과학자들의 짧은 평전은 이 논의의 지리함을 어느 정도 덜어주면서 필자들의 문제의식을 보완한다.

여성운동의 관점에 국한하면 가부장적 질서와 권위는 억압의 기제고 타기의 대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 비해 많은 기득권을 축적하고 누려온 것이 남성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억압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여성해방운동 역시 여성의 관점만이 아닌 남녀 양성, 인류 보편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수컷의 신화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마저 억압한다. 우리는 우리 속의 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함으로써 이제까지 우리를 남성으로, 여성으로 길들이고 억압해온 생물학적 운명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도 그런 호기심과 관점으로 읽었다. 거칠게 포장하자면 남성해방론적 입장이랄까. 굳이 여성이나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이 지리한 책을 읽는 것은 그런 면에서 작은 보람이 될 것이다.

페미니즘이 양성의 관점을 아우르며 보다 객관적이고 균형잡힌 논의로 활성화되기를 고대한다.

정종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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