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01월 2001-01-01   910

촘촘한 그물코에 걸린 한 말단기자의 아우성 노르웨이 숲

혼돈의 시대에서 우리는 조용히 2001년을 맞이한다. 실업, 구조조정, 퇴출, 농민과 노동자의 자살 그리고 정치 허무주의. 그래도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고 허장성세를 부려보지만 어쩐지 뒤가 허전하다. 『참여사회』는 새천년을 맞이하는 길목에서 우리 시대의 평범한 얼굴을 ‘소설형식’을 빌어 만나본다. 우리 서로가 특별한 기호 없이 공감할 수 있는 ‘저림’을 느끼기 발면서 말이다. 편집자 주

저녁 6시-처녀들의 저녁식사

어둠은 빨리 찾아왔다.

마감을 전쟁처럼 치르고 나서도 담배 한 대 피우면 끝이다. 곧장 회사로 달려가야 할 시간이다. 한 10분 어디에 처박혀 잠을 자볼까 궁리해 본다. 언젠가 인간의 적정 수면시간이 10시간이라는 글을 읽었다. 밤을 밝힐 불이 마땅치 않던 선사의 시절, 인간의 생리가 그렇게 굳어졌다는 것이다. 만성적 수면부족. 나는 지금 사냥을 마친 전사처럼 의기양양하게 모닥불 옆을 차지해 잠들고 싶다.

그때가 원시 공산주의사회였다지, 아마. 궁시렁거리며 달려간 회사 입구에는 벌써 내일자 신문이 깔려 있었다. 사회면부터 펼쳐본다. 역시 없다, 외국인 노동자의 겨울나기. 예감대로 오늘도 기사가 밀렸다. “생생한 케이스를 보충해. 왜 지금 이 기사를 쓰는지 알 수가 없잖아. 늘어났다고 말만 하지 말고 통계를 써, 통계.” 팀장은 생동감과 시의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라며 사냥을 진두지휘했다. 나는 마감에 쫓기며 토끼인지 생쥐인지도 모르고 기사를 쐈다. 민완 기자 출신의 팀장은 머리를 쥐어뜯었을 것이다. “이 선수 이거 견적 많이 나오게 썼구만. 어디부터 고쳐야 되는 거야” 행간을 읽는다함은 이런 경우다. 나는 사회면에서 팀장의 심중을 읽는다.

이념의 과잉-약자 혹은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그걸 아는데, 그 관심만으로 왜 언제나 부족한 것인지 다시 묻고 싶어진다. 그 결핍을 메우는 사냥에 내가 과연 적절한 인물인지도 궁금해진다. 입사 후 3년 동안 매일처럼 반복되는 일이다. 편집국에 들어서기 전 뒤돌아본다. 사냥터에 남기고 온 사람들. “이게 기사가 되잖아. 이런 걸 너희들이 안 쓰면 누가 쓰냐. 아무리 맛이 갔다지만 요즘은 좀 심하잖아.” 짖어대는 소리 들린다. 기사 좀 제대로 써.써.써.

수선스런 편집국 분위기를 살핀다. 몸을 누일 모닥불은 없지만, 동굴 밖으로 내몰 찬바람도 없었다. 오늘 밤은 결말이 뻔한 파업협상도 대규모 군중집회도 없다. 물론 누군가 자살하거나 식칼을 들고 구멍가게를 털겠지만, 생사를 걸고 오늘 밤을 넘기겠지만, ‘기사 안 되는’ 사건들일 터이다. 덕분에 팀이 모여 모처럼 함께 밥을 먹는다. 그리고 수다.

“…완전히 짜식이 흥분했더라고. 눈 앞에서 불은 활활 타지. 취재는 안 되지. 보고하는데 소리소리 지르더라고. 전쟁 난 것 같다나? 그래서 상황을 정확히 말해보라고 그랬더니 이 자식이 뭐라는지 알아? 음, 음, 어, 엄청나게 큰 불입니다. 우하하.”

그날의 화재사건은 실업자 남편이 부부싸움 끝에 이불에 석유를 들이부어 발생했었다. 안주로 씹히고 있는 녀석은 지금쯤 찬바람 맞으며 경찰서 뺑뺑이를 돌고 있을 게다. 놈은 수습기자다. 사냥터에 내몰리기 전 혹독한 수련을 받고 있는 중이다.

신문사에 들어와 경찰서 취재를 시작했을 때가 생각났다. 거기 형사와 깡패와 기자가 뒤섞여 똑같이 소리지르고 난동을 부리며 비실비실 웃는 악다구니 속에서 나는 ‘죽음’을 배웠다. 하루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지 그때 처음 알았다. 죽기 위해 반드시 대들보나 야산의 소나무에 목을 맬 필요가 없다는 것, 죽는 사람 모두가 유서를 남기는 것이 아님도 그때 알았다. 사람들은 방문고리에 수건을 달아매 앉은 채로 죽어갔다. 유서가 없어도 왜 죽었는지를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구제금융이 몰아쳤던 3년 전 겨울, 남편은 실직하고, 마누라는 도망가고, 자식과 며느리가 떠난 뒤 늙은 몸을 혼자 건사할 용기가 없어 사람들은 죽어갔다. 사건조서에 첨부된 사체사진들은 하나같이 참혹했다. 이건 ‘집단학살이야’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흥분상태에서 선배들에게 보고했다. 그 죽음들은 일일이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다. 지면은 부족했고 죽어나가는 사람들은 너무 많았다.

겨울은 3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변함 없는 풍경을 토해내고 있다. 깡패와, 깡패를 닮은 경찰과, 그 경찰을 따르는 기자들 사이를 숨죽인 채 누비고 다니는 수습들도 이 겨울 그런 죽음을 목도할 것이다. 이름 없는 죽음에서 세상을 배우게 될 것이다. 혀 빼 물고 죽은 푸르딩딩한 사망자와 그걸 무감하게 조사하는 베테랑 형사 사이의 어디쯤, 진실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16평 지하방을 활활 태운 불길 뒤에 30년을 기다려온 거대한 음모가 있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처녀의 티를 아프게 벗어던질 것이다. 한때 처녀였던 ‘우리들’은 꾸역꾸역 그렇게 늦은 저녁을 먹었다.

밤 10시-뱀파이어와의 인터뷰

밤이 깊었는데도 녀석은 그제서야 밥을 먹고 있었다.놈은 일찌감치 졸업해 신문사를 다니고 있다. 결혼해서 지난해에는 딸까지 낳았다. 다들 능력 좋은 놈이라고 부러워했지만, 산다는 건 어차피 다 한가지임을 나는 알고 있다. 바쁘다고 허세 부리던 녀석은 신문사 앞이라는 이야기에 곧장 튀어나왔다. 약속한 대로 맥주 한잔 시켰다.

“왜 불렀냐. 형님한테 인사부터 해야지, 무슨 말버릇이 그래!”

“아쭈구리, 너 늦장가 가더니 좀 늘었구만.”

농담 몇마디 주고받았다. 녀석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당연했다. 연락 없다가 갑자기 불러냈으니. 품고 있기 귀찮아 불쑥 던져버렸다.

“나 회사 그만뒀어.”

아주 잠깐 녀석의 눈이 커졌다. 아주 잠깐이었다.

“잘했다. 까짓 원래 하고 싶었던 일도 아닌데 오히려 축하할 일이네, 뭐.”

놈이 신문사에 합격했을 때, 나도 그 비슷한 말을 했다. 축하한다고. 좋은 기사 많이 쓰라고. 공부하고 싶었는데… 녀석은 말끝을 흐렸다. 그를 신호탄 삼아 하나둘씩 학교를 떠나가던 끝무렵에 나도 건설회사에 어렵게 취직했었다. 현장생활 1년 만에 본사로 들어앉았지만 재미는 없었다. 사람 사귀는 게 유일한 낙이었고, 월급쟁이 신분을 앞세워 결혼까지 한 게 성과라면 성과였다. 그게 다였다. 한두달 월급이 밀리더니 부도가 나고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몇달을 보냈다. 더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회사를 살려야 한다고 선배들은 난리였지만, 나에게는 집착해야 할 내 회사가 없었다.

“좋아, 다 좋은데. 자네 억울하지도 않나.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당신 학교 다닐 때 데모 좀 했다며. 알 거 아냐. 나라 말아 먹은 놈은 따로 있고, 잘 해보라고 뽑아준 놈은 발등에 도끼 찍고. 나, 자네만할 때 중동에서 모래바람 마셨어. 그때 우리더러 뭐라 그랬는지 아나. 산업역군, 수출역군이라 그랬어. 그때 우리가 번 돈으로 이 나라를 만들었다고. 따지고 보면 지금 대통령이 노벨상 받는 것도 다 우리가 이만큼 나라를 세웠으니 가능한 일 아니야? 여기서 다들 그만두면 결국 우리가 잘못해서 회사 망한 게 된다고. 안 돼. 이럴 때일수록 당신같이 젊은 사람이 자리를 지켜야지.”

부장은 쉽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 개발독재에 멋모르고 끌려 다니며 만세 불렀던 업보를 이제 받고 있는 거야. 발등을 찍는 건 무지몽매하게 독재자를 떠받들었던 바로 너야.’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었다. 그에게는 고3 딸과 고1 아들이 있었다. 회사가 망하면 그도, 그의 가족도 끝이었다. 부장은 회사를 살리려고 동분서주하는 사이 선동가를 넘어 반정부활동가로 변신해 있었다. 나에게는 그 모든 게 희극이었다.

휘청거리던 회사 지분을 주택공사가 싼 값으로 사들였을 때, 부장은 희희낙낙했었다. “이제 우리도 공기업이라고, 공기업. 안심해도 돼.”

퇴출기업 명단에 회사이름이 들어갔을 때, 부장은 음모라고 말했다. 공기업 구조조정 한다니까 지네들 살아 남으려고 우리를 넘긴 거야. 도마뱀 꼬리 자르듯이.

뭐가 됐건 나는 이미 관심 없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남아야 할만큼 회사가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구제금융 때 회사는 현장에서 일하던 중장비 기사들을 대량 해고했었다. 그들은 일주일쯤 현장에 남아 농성했었지만, 우리는 애써 외면했다. 그들이 나가고 나면 좀 나아지리라 기대했던 것 같다. 그 다음에는 책상물림 가운데 절반을 다시 쫓아냈다. 그래도 어깨 맞대고 있던 사이라 술 마시며 함께 눈물 흘렸지만, 남은 자들은 쉽게 지난 일을 잊어버렸다. 그 모두를 내친 우리가 끝내 거리로 내몰린다해서 억울할 건 없었다. 업보였다.

“어디 여행갈 계획부터 세워야겠네.”

한잔 술의 약속이 열잔의 취기를 넘어갈 때쯤 녀석이 말했다. 미친 놈. 난 피식 웃었다. 그와 나는 서로 달랐지만 그래서 친했다. 그는 활달했고 예민했다. 나는 언제나 느린 편이었다. 녀석은 말했다.

‘난 덤벙대는 거고 넌 언제나 제대로 해내는 거야. 먼저 권력을 잡은 케렌스키를 너 같은 레닌이 뒤엎어버리는 거지.”

허장성세였지만 우리는 잘 어울려 다녔다. 그리고 이제, 그 모든 게 꿈만 같다. 산다는 게 어차피 다 한가지임을 나는 안다. 그게 중장비 기사이건 넥타이 부대건 머리 굴리는 혁명이론가이건 간에, 내일을 설계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못하는 세상에서 삶은 모두 닮은 꼴이다. 녀석도 그 진실을 알고 있을까. 그걸 아프게 배우는 데 온통 젊음을 바쳤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도 알고 있을까.

새벽 2시-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남편은 오늘도 늦었다. 술냄새가 몹시 풍겼다. 어느새 이불을 걷어 차버린 아이를 다시 챙기는 동안 그는 그냥 말없이 자리에 누웠다. 금새 잠든 눈치였다.

대안가족을 만들어보자. 그러니까 그게 일종의 프로포즈였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었던 나는 공공연히 말했었다. “정치적 동성애자가 되고 싶어.” 그는 기겁하는 눈치였다. 정치적 동성애를 포기하고 대안가족을 만들어 가부장제를 전복시키자. 며칠을 고민하던 눈치더니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 말 때문에 그는 남편이 됐다.

그러나 2년이 지나도록 전복은커녕 일탈조차 가물가물해졌다. 덜컥 아이까지 낳아, 다니던 대학원마저 쉬고 있는 나는 그저 한심하다. 남편은 집을 하숙집으로 알고 지내고, 아이는 아직 내 손이 한없이 필요한 핏덩이다. 지금이 인생의 전환점임을 나는 안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도 나도 그걸 돌이켜 어찌해볼 능력이 없다는 거다.

“우리 노르웨이 갈까” 며칠 전 남편이 말했다. 텔레비전에서는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시상식이 중계되고 있었다. “나는 사회민주주의 공부하고, 넌 페미니즘 공부하고, 효진이도 거기서 자라면 좋을테지. 여자가 자기 능력 맘껏 발휘하기엔 북유럽이 가장 좋다잖아.”

기저귀를 갈던 나는 ‘노르웨이의 숲’을 제목으로 삼은 비틀즈 노래와 하루키 소설을 생각했다. 어떤 멜로디의 노래였는지, 무슨 내용의 소설이었는지 영 기억나지 않았다.

“결국 사회민주주의란 거야. 존재하는 체제 가운데 그나마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게 뭐 있냐고. 소비에트 망했지, 자본주의는 갈수록 천박해지지. 다음 세상에서 또 다른 대안이 도출되기 전까지 일단 한국은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이 유일한 길인 거야. 그럼 그걸 알아야 될 거 아냐. 우리 노르웨이로 가자. 거긴 여자가 총리하고 열세 살부터 콘돔 나눠주는 나라니까 네가 좋아하는 정치적 동성애자들도 많을 거 아냐.”

“노르웨이 가면 나 바람피워도 된다는 이야기야, 지금?”

혼자 흥분한 남편에게 그렇게 쏘아붙였지만, 내심 들떴던 것도 사실이다. 피요르드, 빙하, 백야, 바이킹. 떠오르는 모든 생경한 단어들이 노르웨이의 해안에 설레임으로 가 닿았다.

“오빠, 지금도 노르웨이 가고 싶어?”

그를 흔들어 깨운다. 인사도 없이 그냥 잠들게 할 수는 없다.

“아니, 지긋지긋해. 상주면 다야. 여기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나 알아보고 줘야 할 것 아냐. 그치들, 결국 유럽의 한 부족국가일 뿐이야. 지네들 고귀한 기준에 맞춰 적당히 구색 맞춘 사람에게 명예만 안겨주고. 만델라는 국가위원회 만들어서 역사규명하고 과거청산이라도 했지, 우리 대통령은 뭐했냐고. 결국 온갖 탄압 뚫고 대통령됐다, 그것밖에 더 있냐고. 차라리 줄 거면 감옥에 있을 때 주던지. 아님 지금 감옥에 있는 사람들한테 주던지.”

“어, 술 취한 줄 알았는데 청산유수네.”

그러나 그 말에는 대답이 없다. 내가 소설같은 이야기 하나 해줄까? 남편은 눈을 감은 채 웅얼대기 시작했다.

“어제 말이야. 경기도 안산 시화공단에서 파업중인 아주머니를 만났어. 원래 무슨 식품 하청업체에서 일했는데, 88년인가 노동조합의 창립멤버였다가 직장이 폐쇄되는 바람에 잘렸대. 쫓겨난 아줌마가 ‘의식화대상’으로 지금의 남편을 골랐고, 아주머니의 손에 끌려 마지막까지 싸웠던 아저씨까지 일자리를 잃었다는 거야. 나중에 아저씨만 어렵게 기아자동차 공장에 취직하고 둘이 결혼했지. 파업이니 뭐니 꿈도 꾸지 말고 살자는 게 결혼할 때 약속이었대. 학출 위장취업자들이야 제 갈 길 가도 이 사람들은 공장에서 쫓겨나면 갈 데가 없잖아. 그런데 기아차가 망한 거야. 이번엔 아주머니가 의류업체에 비정규직으로 취직했는데, 이 놈의 사장이 한달에 50만 원씩 주면서 짐승처럼 부려먹었다는 거야. 수백억씩 수익을 올려도 월급 올려줄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래서 파업에 들어갔는데 말이야, 그 아줌마가 뭐라 그랬는지 알아? 제 꿈은 요, 두 아이들을 품에 안고 함께 자는 거예요, 그렇잖아. 음. 그 아줌마가 170여 일 동안 파업을 지켜온 거야. 진짜 노동자였어. 지금은 대통령 쳐다보지 말고 그 아줌마를 들여다볼 때야.”

그 이야기를 무슨 기획 기사 들머리에 소개하겠다는 게 남편의 결론이었다.

그 아줌마도 노르웨이에 대해 꿈꿔 봤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자신을 선동했던 인텔리 운동가들이 의원 배지를 달아, ‘개과천선’해 열심히 일하겠다는 평범한 노동자를 거리로 내모는 세상에서 그는 정말 소박한 꿈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걸까.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나보다 훨씬 강건한 그들이 10년 이상을 싸워도 바뀌지 않는 세상에 대해 나는 자신이 없어.

그러나 알고 있다. 떠나는 일은 이 졸렬한 나라에서 뿌리를 내리는 것보다 결코 수월하지 않을 것이다. 꿈이다. 남편과 나의 몽상이 노르웨이라는, 알지도 못하는 지구 반대편의 땅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을 뿐이다. 남편은 아내와 딸의 미래를 염려하며 오늘의 고단함을 견디고, 나는 그와 딸을 위해 꿈을 접고 가족의 울타리에 은거 중이다. 서로를 사랑했던 우리는 서로의 꿈을 갉아먹고 심신을 빨아먹으며 서른을 넘기고 있다. 처음 맹세처럼 함께 헤쳐나가기에 세상의 벽은 너무 높고 밤의 어둠은 너무 깊다.

그리고 아침6시-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잠에서 깬 건 목이 말라서였다. 녀석은 잘 돌아갔을까. 폭음했던 탓인지 여전히 속이 메슥거렸다. 아이는 벌써 몇 차례 이리저리 굴렀는지 방 구석에 활개를 펴고 잠들었고, 아내는 한 손에 우윳병을 들고 역시 곤하게 누웠다. 내년에는 그나마 보너스도 안 나온다는 말을 아직 하지 못한 게 생각났다. 돈 벌려고 이 짓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인생을 볼모 삼아 가정을 꾸린 나로선 월급이라도 제대로 갖다줄 의무가 있었다.

직업인으로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나로부터 희망을 빼앗아 벼랑에 내모는 것은 무엇일까. 담배를 물고 베란다에 나섰다. 생각해 보면 별 일 아니었다. 세상을 뒤엎지도, 한 사람을 감동시키지도 못하는 가난한 삶에서 지나간 모든 몸부림은 별 일 아니었다.

그러나 취재원과 친구와 가족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없는 나는 쓸쓸하다. 모두가 대답을 갈구하는 세상에서 대답을 찾는 일을 맡았으니 그 또한 버겁다. 나는 내 한 몸 건사하기가 벅찬데, 맺은 관계들의 그물코는 한없이 촘촘하다.

창 밖으로 어스름 새벽이 밀려오고 있었다. 지난 밤조차 폭풍 같다. 어김없이 새벽이 오는데 나는 이 아침을 맞을 준비가 덜 됐다. 폭풍 같은 이 겨울이 다 갈 때쯤에도 나는 그럴 것이다.

‘희망을 쉽게 말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다. 쉬운 대답은 쉽게 무너질 것이다. 어려운 문제는 어렵게 풀어야 된다. 모든 의문과 슬픔에 대한 대답은 여기, 부족한 나 자신에게 있을 것이다. 아프게 미혹의 각질을 떼어내며 시리게 깨쳐갔던 세상 속에 그 실마리가 있을 것이다. 거리로 내몰린 친구의 젊음과 거기에 먼저 가 자리잡고 있었던 중년부부의 설움이 자라는 곳에서 다시 출발해야 하는 거다. 아스팔트만 하얗게 자라난 이 도시에도 언젠가 거짓말처럼 무성한 숲들이 우거질 날이 그제서야 오는 거다. 그 숲을 꿈꾸며 나는 아우성치는 들판으로 다시 사냥을 떠나야 하는 거다.

안수찬 『한겨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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