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01월 2001-01-01   575

무너지는 재벌신화 … 한국경제는? 위장개혁으로는 공멸

지난해 중반이래 계속된 대우사태, 현대사태로 사실상 ‘5대 재벌’이란 용어가 사라졌다.

IMF사태 발발에 따른 중견재벌 연쇄도산으로 ‘30대 재벌’이란 용어가 사라진 이래 불과 3년만의 일이다. 이 같은 작금의 상황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재벌신화의 붕괴’이다.

과거 5대 재벌이나 30대 재벌은 모든 경제정책의 타깃이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상호출자 금지나 지급보증 금지 등의 규제정책을 펼 때에도, 재정경제부가 보험 등 신규산업 진입 금지정책을 펼 때에도, 그 대상은 5대 재벌이나 30대 재벌이었다. 그만큼 이들이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IMF사태로 지난 20여 년간 한국경제를 쥐락펴락 하던 30대 재벌 중 20여 개 재벌이 붕괴하거나 부도직전의 극한위기에 몰렸다. 어렵게 살아남은 재벌들 중에서도 유동성이 풍부해 안전지대에 위치한 재벌은 두세 곳에 불과하다. 최근 명동 사채시장이나 채권시장에서 정상 거래되고 있는 한줌도 안 되는 회사채나 기업어음의 숫자가 이를 말해준다.

정부의 숱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세간에서 ‘제2의 경제위기설’이 좀체 수그러들지 않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금융시장만큼 정확한 곳도 따로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당면한 위기의 진앙은 다름 아닌 재벌기업군인 것이다.

전문경영인시대는 요원한가?

재벌신화의 붕괴 원인은 새삼스레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평균 3%의 지분을 통한 독단적 황제경영, 경쟁법칙을 무시한 내부자 거래에 따른 집단부실화, 주먹구구식 계산에 따른 과도한 차입경영과 과잉중복투자, 투자가를 무시한 오너 위주의 안개경영 등등 너무도 잘 알려진 탓이다.

한 예로 지난해 중반 인류사상 개별기업 규모로는 최대의 부도액을 기록하면서 쓰러진 대우그룹의 경우 부도가 난지 1년 반이 지난 아직까지도 전체 부실규모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공적자금이 투입돼야 회생 가능할지가 확실치 않을 정도로 애당초 투명경영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우그룹의 한 전직 고위관계자는 “대우의 잠재부실이 얼마나 되는지는 일선 전문경영진은 물론, 김우중 회장 본인 자체도 정확히 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3개 계열사의 경영을 맡았던 그의 증언에 따르면, 연말 결산회의 때 각 계열사는 적자를 흑자로 바꾸는 식으로 실적을 부풀려 보고했다. 그러면 김 회장은 “수고 많았다”고 격려한 뒤, 무늬만 흑자기업인 회사에게 어려운 계열사에 대한 자금지원이나 신규사업 추진 또는 부실기업 인수를 지시했다 한다. 대우사태 발발 시 수십 개 계열사 가운데 멀쩡한 계열사가 하나도 없다시피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한 은행 임원은 대우사태와 관련, “대우그룹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배드뱅크(Bad Bank)였다”고 지적한다. 대우그룹은 부도위기에 직면한 기업들을 인수, 팽창을 거듭해온 재벌이었다. 대우는 IMF위기 발발의 와중에도 부실덩어리인 쌍용자동차를 인수할 정도였다. 이 과정에 정부와 채권단은 대우그룹에 정책금융을 지원하는 방식을 빌려 그때그때 처리했어야 할 기업·금융구조조정을 20여 년간 미뤄오다가 마침내 지난해 중반 대우사태를 맞게 된 것이다. 20여 년간 묵혀온 부실이 한꺼번에 곪아터진 양상이다.

2000년 경제불안의 진앙 역할을 한 현대그룹 사태 역시 외양은 다르나 본질적으로는 대우사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현대그룹은 대우그룹과는 달리 ‘돈을 버는 황소(Cash Cow)’를 몇마리 갖고 있어 상대적으로 사정이 좋았다. 과거 건설 호황기에는 현대건설이 번 돈을 현대자동차나 현대중공업이 갖다 쓰고, 건설불황기에는 반대로 현대건설이 자동차나 중공업에서 갖다 쓰는 식으로 확장경영을 계속할 수 있었다. 1999년에는 현대투신이 ‘바이 코리아’ 붐을 일으켜 현대그룹의 14조 원 증자를 성공시키는 캐시 카우 역할을 한 몫 단단히 했다. 현대는 이같이 풍성한 캐시 플로우(현금흐름)를 앞세워 지난해 기아자동차와 LG반도체를 인수할 수 있었다.

황제경영을 중단해야

그러나 IMF위기 후 세상이 바뀌었음을 현대그룹 오너나 경영진은 알지 못했다. 오른쪽 주머니에서 빼내 왼쪽 주머니로 옮기는 방식의 그룹경영은 시장경제논리와 상극이었다. 특히 외국인투자가들의 국내 금융시장 영향력이 절대화하면서 이런 안개경영은 독약으로 작용했다. “현대그룹 주식은 현대직원과 울산시민들만 사고판다”는 비아냥거림이 나올 정도로 현대주식은 시장에서 철저히 외면당했고, 그 결과 현대그룹의 유동성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와중에 터져나온 형제간의 재산분쟁, 일명 ‘왕자의 난’은 현대그룹의 이미지에 씻기 힘든 치명타를 가했다. 21세기에 19세기 경영도 아닌 ‘조선왕조식 경영’을 해온 현대그룹의 속내가 온 천하에 그대로 까발려진 것이다. 그 결과는 한달 걸러 계속된 현대건설 및 현대그룹의 유동성 위기였고, 국내 금융시장 전체의 경색이었다.

특히 현대사태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가신그룹’으로 대표되는 위장 전문경영인의 문제였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지난 5월, 3부자 퇴진을 선언하며 “시대가 바뀌었다. 이제 전문경영인이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거목다운 정확한 시대진단이었다.

그러나 그 뒤가 문제였다. 전문경영인으로 내세운 인물들은 가신들이었다. 가신들은 독립성이 결여됐다. 또한 사고방식도 오너 중심적이고, 전근대적이었다. 일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이들은 시장의 기대와는 반대로 도리어 현대그룹의 후계상속 전쟁을 증폭시키고 장기화하는 부정적 역할을 했다.

현재 시장의 최대 관심사이자 불안요인은 재벌붕괴가 대우, 현대에서 그칠 것인가 이다. 시장은 지금 살아남은 재벌들에 대해서도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불안한 시선을 던지기란 마찬가지이다.

LG그룹의 경우 최근의 데이콤 사태나 과거의 LG증권-LG종금 합병과정에서 볼 수 있었듯, 계열사간 합병 과정에 부실자산 물타기를 단행해 시장의 강한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 삼성그룹의 경우는 캐시 플로우 문제는 양호하나 이재용 씨 후계상속 과정의 탈법성을 비롯해 최근 e-삼성의 공격적인 벤처계 장악 움직임 등에서 볼 수 있듯 기업의 모럴 문제가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여기에 최근 삼성생명 상장이 무기한 연기되면서 이건희 회장이 약속했던 삼성자동차 부실처리 문제가 또 다시 뜨거운 감자로 부상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과거 개발연대에 한국경제를 견인해온 재벌은 이제 만신창이가 됐다.

남은 문제는 과연 어떻게 돌파구를 찾을 것인가 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재벌신화의 붕괴에 따른 한국경제의 동반몰락이 불가피해 보이기 때문이다.

시장이 요구하는 해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평균 3%밖에 지분을 안 갖고 있는 재벌 오너들을 위한 황제경영을 중단하라는 것이다. 위장 전문경영인이 아닌, 주주권익을 최우선시 하는 진정한 전문경영인이 중심축에 서는 인사개혁을 단행하라는 얘기다. 시장과 소액주주의 감시와 경영참여를 당연시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검은 연기에 찌든 호롱을 헝겊으로 박박 닦아 밝은 빛이 나오게 하듯 한국재벌을 투명하게 만드는 날, 비로소 뿌연 스모그에 덮인 듯한 한국경제의 앞날도 환히 밝아질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낙관이자 기대일까.

박태견 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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