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01월 2001-01-01   1068

오리무중 된 이건희 회장의 사재출연 약속

‘생보사’ 상장연기 그 후

정부는 삼성생명과 교보생명 상장방안을 무기한 연기했다. 그동안 생명보험회사의 상장문제는 상장이익 중 계약자의 몫을 얼마로 할 것인지를 놓고 기존 주주와 계약자간 이해가 달라 논란을 빚어왔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와 금융연구원은 계약자에게 공헌한 만큼 주식으로 배분해야 한다는 원칙을 주장해왔다. 정부는 이런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해 작년 8월말까지 최종안을 확정짓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2000년 8월초에 취임한 이근영 금감위원장의 재검토 지시 후 다시 미궁으로 빠졌다가 결국은 무기한 연기된 것이다.

삼성차 부채처리 논란

삼성생명 상장 연기는 단순히 생명보험회사의 ‘기존 주주와 계약자간의 이해’ 문제로만 국한할 수 없다. 이유는 삼성생명의 상장 연기로 삼성차 부채처리 문제가 또 다시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측은 99년 6월 30일 “이건희 회장의 2조8,000억 원 상당의 개인재산을 출연해 삼성자동차로 피해를 입게 된 채권단과 협력업체 등의 손실을 최소화하겠다”고 삼성차 부채처리 방안을 내놓았다. 이때 ‘이건희 회장의 2조8,000억 원 상당의 개인재산’은 이 회장이 가지고 있던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를 의미했다. 특히 2조8,000억 원을 내놓겠다고 한 배경에는 “삼성생명 주식이 상장되면 주당 70만 원 할 것”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 이런 발표가 있은 후 삼성은 실제로 당시 삼성생명 주식가치를 주당 70만 원 가량으로 계산해 350만 주를 채권단에 맡겨두었다. 또한 삼성쪽과 채권단은 “이미 맡긴 주식으로 모자라면 이 회장이 50만 주를 추가로 내놓고, 부족하면 계열사들이 채권은행에 자본출자 하거나 후순위채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책임지기로 하겠다”고 합의했다.

그러나 이것이 생보사 상장 연기로 주식의 현금화는 물론 가치평가 자체가 어렵게 되어 삼성차 부채처리는 해를 넘기게 된 것이다. 증권업계에서는 상장 여부와 상관없이 삼성생명 주식 가치가 주당 70만 원에 이르기 어려울 거라 전망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삼성은 “부족분 처리는 50만 주 한도 안에서 추가출연을 하도록 하겠다”고 하나 상장연기로 현금화가 안 돼 상환시한인 2000년 12월 말까지 빚을 못 갚을 경우 연리 19%의 연체이자까지 붙어 부채부담이 늘어나게 된다. 즉, 현재로선 삼성생명 주식 400만 주로는 부채처리가 불가능한 수준이다. 따라서 400만 주를 제외한 나머지 부채와 연체이자는 사실상 삼성계열사에게로 그 책임이 돌아간다.

참여연대는 이런 상황에 대해 “삼성자동차 부채 처리는 이건희 회장 개인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며, 삼성자동차 부실과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삼성계열사들과 그 주주들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천명했다. 또한 삼성계열사들이 손실 분담하는 것은 이건희 회장의 개인 손실을 보전해주는 것이므로 부당내부거래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참여연대는 지난 11월 23일 삼성계열사인 삼성전자가 삼성차 부채에 대해 연체이자 등 손실분담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가처분소송을 냈다. 이미 참여연대는 1999년 채권단과 삼성계열사 간의 합의서 체결을 이사회를 통해 결의하려고 했을 때도 이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김은영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 부장에 따르면 “이 합의는 삼성그룹의 구조조정본부와 채권단이 맺은 것이므로, 삼성계열사들에게 책임을 지울 법적 구속력이 없다”고 한다. 시민단체로부터 이런 비판이 제기됐음에도 삼성계열사는 채권단과 구조조정본부의 압력에 못 이겨 이사회를 열어 합의서 체결에 대해 결의했으며, 생보사 상장이 연기되어 주식처분이 어려워지자 손실 부담을 져야할 상황이 된 것이다.

이익은 총수에게, 부채는 국민에게

그러나 현재 삼성은 돌연 태도를 바꿔, 부채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입장을 내비쳤다. 다시 말해, 채권단에 담보로 제공한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가 2조4,500억 원에 이르는 부채액수에 모자란다 하더라도 약속한 50만 주 외에는 추가로 부담하지 않겠다는 내부 방침이 정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삼성계열사와 채권단이 맺은 합의서를 뒤집는 것인데, 이에 대해 삼성측은 “삼성계열사가 채무에 대해 연대보증한 것은 채권회수 위협에 못 이겨 회사를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계약”이었다며 “채권단이 추가 부담을 계속 요구한다면 법적인 대응을 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생보사 상장이 연기되자 한빛은행을 중심으로 한 삼성차 채권단은 대책수립을 위한 운영위원회를 열었다. 운영위원회 논의 결과에 대해 한빛은행 대기업금융팀의 한 관계자는 “삼성계열사들이 법률적으로 무효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법원이 판단할 일”이라며 “삼성계열사들이 책임지겠다고 예전에 다 합의된 일이며, 채권단은 계열사들이 책임지도록 강력히 요구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계열사들이 참여연대 소송 때문에 약정이행을 거부하고 있다며, “참여연대가 법원에 제기한 신청이 어떻게 될 지 모르지만 약정이행이 안 되는 경우에는 참여연대를 상대로 법률적인 대응을 하겠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 박근용 간사는 “채권단과 삼성계열사간에 합의가 체결될 때 문제를 충분히 검토하지 못하고 계약을 한 채권단에게도 문제가 있다”며 “채권단은 당시 삼성의 이건희 회장에게 명확히 책임을 묻도록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삼성의 계열사들은 국내외 소액주주들이 다수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우량 상장사이다. 이는 재벌 총수나 대주주 1인의 회사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삼성계열사가 삼성자동차 빚을 갚는다는 것은 달리 말해 삼성전자 소액주주들에게 그 손해를 입힌다는 것으로 풀이해볼 수 있다.

“대우는 공적자금 투입, 왜 삼성은…”

삼성자동차는 이건희 회장의 숙원사업이었다고 한다. 93년 삼성이 승용차사업 진출 시도를 공언하자 자동차 업계와 경제 전문가들은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삼성은 무리수를 둬 승용차사업에 진출했지만 끝내 실패했고, 결국 지난 9월 프랑스 자동차회사인 르노로 넘어갔다. 지난 98년 2월 노사정위원회는 삼성차 등의 부실기업 부채는 재벌 총수의 사재로 해결해야 한다는 합의를 이끌었다. 그러나 삼성은 여전히 계열사들의 부당지원 행위로 부채를 해결하려 한다. 최근 삼성구조조정본부의 한 임원은 한 일간지를 통해 “정부는 대우 등 부실기업 처리를 위해 수조원대의 공적자금을 투입하면서 삼성차 부채 문제는 이 회장과 삼성계열사가 해결해야 한다는 식으로 나오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 재무팀으로 확인해본 결과 “실제로 삼성 내부에서 그런 얘기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유독 삼성에게만 심한 것 아니냐는 말이 있지만 그룹 차원의 방침은 아닌 걸로 안다”고 전했다. 삼성그룹 홍보팀 노승만 차장은 “그룹차원에서는 공신력 있는 기관을 선정해 삼성생명 주식을 상장해 부채를 처리하는 쪽으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며 “주식가치가 정해질 때까지 연체이자에 대해서는 채권단과 원만한 합의를 하는 것이 그룹 내의 기본적인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장하성 교수(고려대 경제학과)는 “삼성은 이 회장의 사재를 털어 부채를 갚는 것이 아니라, 삼성생명 고객의 돈으로 빚을 갚는 것”이라고 강도높은 비판을 했다. 또, “이 회장이 진정으로 사재를 털어 삼성자동차의 부채를 상환하려 했다면, 개인재산인 삼성에버랜드 또는 삼성SDS 등 비상장 계열사, 삼성전자나 삼성전관 등의 상장계열사의 소유지분을 동원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윤정은(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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