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01월 2001-01-01   1120

세종로, 이 감시의 거리에서

서울. 시티투어버스까지 생긴 서울의 거리. 종로엔 하디스, 압구정동엔 맥도널드 …잘 안다고 착각하지 말라. 솔직히 우린 서울을 잘 모른다. 지금 딛고 걸어가는 이 아스팔트가 600년 전엔 어떤 길이었는지. 『참여사회』는 2001년 한해동안 골목골목 숨어 있는 서울의 거리를 역사의 숨결과 함께 전한다. 자. 지금부터 우리의 서울을 차근차근 둘러보자. 편집자 주

큰길들에 선조의 이름을 붙인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바야흐로 ‘미국화의 세상’이다. 아기가 미국 시민권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미국에 가서 출산하기도 하고, 아기가 영어를 잘 할 수 있도록 영어사전을 통째로 외우는 태교를 하기도 한다. 길 이름으로라도 늘 사용하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선조의 이름을 외우고 살까?

그러나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자면, 어떤 길 이름이 특정한 길을 가리키는 데서 나아가 그 이름의 원래 주인을 떠올리게 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예컨대 퇴계로는 을지로보다 남산에 가까운 길이고, 율곡로는 종로보다 창경궁에 가까운 길이라는 식이다. 퇴계나 을지나 율곡은 그저 기호일 뿐이다. 그렇다면 선조의 이름을 길 이름으로 쓸 때에는 적어도 그 분이 와서 보고 섭섭해하시지 않을 정도의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세종대왕은 어디에

세종로에서는 특히 이런 생각을 더하게 된다. 나는 사람들이 세종로를 ‘세종문화회관 앞에 있는 길’이라서 세종로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속으로 걱정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길과 마찬가지로 세종로에도 세종이 과연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한 상징이 되어버린 길에 세종의 이름을 붙인 까닭은 물론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일 터이다. 그러나 이 길에 애석하게도 세종대왕은 없다.

세종로의 상징적 주인은 이순신 장군이다. 내가 이순신 장군이라면 이보다 더 불경스러운 일은 없을 것 같다. 길 이름은 주군인 세종 대왕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로되, 정작 길의 주인은 신하인 이순신 장군이기 때문이다. 이런 반인륜적 일은 물론 자신을 이순신 장군과 같은 우국충정의 인물로 형상화하고자 했던 박정희(다카키 마사오)의 자기정당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결과 무도한 파쇼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감시의 거리

무슨 이유로 세종로를 찾게 되건 간에, 이 거리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특히 교보쪽 세종로에서 이런 느낌은 더욱 심해진다. 그 까닭은 다름 아니라 거리에 널려 있는 경찰들 때문이다. 이들로 말미암아 이 거리를 드나드는 것 자체가 국가 권력으로부터 국민으로 공인되는 명백한 하나의 통과행위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만일 불심검문을 당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국가 권력으로부터 국민 속의 비국민으로 의심받고 있는 사람이므로 ‘자수’하거나 ‘반성’해야 한다. 진짜 ‘비국민’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자수’해야 마땅하고, 진짜 국민이라면 자기가 ‘비국민’으로 보인다는 사실에 대해 깊이 반성해야 한다. 국가 권력은 감시할 권리가 있고, 국민은 감시당할 의무가 있으므로… 세종로는 언제나 ‘1984년’이다.

세종로 주위의 모든 지하도 입구에는 전투경찰들이 1년 365일 지키고 서 있다. 거리 곳곳에도 역시 전투경찰들이 1년 365일 지키고 서 있다. 이왕 그렇게 서 있을 바에야 입성이라도 고우면 좋겠거늘, 잘 알다시피 우리의 전투경찰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대체로 멀리 피해가고 싶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들도 마뜩찮은 일을 하기는 마찬가지라, 그저 신념 하나로 버티고 있을 뿐이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는 그 신념. 세종로는 이렇게 삭막하다.

세종로가 ‘감시의 거리’가 된 가장 큰 까닭은 아메리카합중국(이것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본명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름은 함부로 고치는 게 아니다. 그러니 가능하면 본명으로 불러주도록 하자.) 대사관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1987년 가을, 몇 명의 청년들이 그 담을 넘었다. 이 사건 이후 미 대사관 측은 높은 담장 위에 바깥쪽으로 뻗는 쇠창살을 덧붙였다. 그리고 2000년 지금, ‘쇠날 개목걸이’들이 대사관 주위의 나무들에 설치되었고, 가로등을 가장한 감시카메라들이 담장 밖으로 뻗어 있고, 전투경찰들이 대사관 전체를 이중으로 둘러싸서 지키고 있다.

교보생명과 한국통신 건물 앞은 보도가 아주 넓다. 차도뿐만 아니라 보도가 이렇게 넓다는 데서 우리는 세종로의 특수함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 넓은 길은 아메리카합중국 대사관 앞에서 갑자기 좁아진다. 이 좁은 길에 전투경찰들이 이중으로 늘어서 있다. 고개를 들어 대사관 담장 쪽을 보면, 담장 앞 나무들에는 새까만 쇠날 개목걸이들이 채워져 있고, 담장 밖으로 삐죽 뻗어나온 감시카메라가 나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 세종로는 서울에서 가장 기분 나쁜 거리이다.

끝나지 않은 식민과 독재

세종로는 아직도 식민과 독재의 시대에 머물러 있다. 식민과 독재의 공통점은 정치를 통치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식민과 독재는 철저히 ‘반근대’적이다. 근대는 시민 주권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세종로는, 그 근대적 외양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반근대적’인 길일 수밖에 없다. 이 거리에서 우리는 일방적인 감시의 대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바람이 불더라도 이 거리에서는 옷깃을 여미기 전에 마음부터 다잡아 여며야 한다.

식민의 상징은 단연 총독부 청사였다. 이 건물이 경복궁을 파괴하고 들어서면서 6조 거리가 오늘날과 같이 넓디넓은 신작로로 개조되었다. 그러므로 총독부 청사를 폭파시켜 없앴다고 해서 식민의 역사마저 이 공간에서 지워졌다고 할 수는 없다. 총독부 청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세종로 자체가 식민의 역사를 보여주는 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길은 건물보다 더 질기게 남아 식민의 역사를 증거하고 영향을 미친다.

더욱이 이 거리에는 아메리카합중국 대사관이 있다. 이 흉측스런 건물은 세종로의 경관을 크게 해치는 주범일 뿐만 아니라, 거리 전체를 ‘닫힌 공간’으로 만드는 주범이기도 하다. 오래 전에 다른 곳으로 옮겨졌어야 할 이 건물이 그 자리에 계속 있는 것 자체가 한미관계의 불균등성을 상징한다. 잘 알다시피 이 불균등성은 식민지의 그것과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그러니 이 못생긴 건물을 볼 때마다 ‘식민의 역사’를 되새김질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일제는 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광화문 자리에 커다란 철문을 세웠다. 그리고 그 앞을 총독부 광장으로 꾸몄다. 과대망상증의 늙은 독재자 이승만이 첫 연설을 했던 곳도,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이 열렸던 곳도 바로 이 광장이다. 광화문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일제도 없앨 수 없었던 이 문은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없어지고 말았다. 원래 광화문은 목조건물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시멘트로 급조해 놓은 광화문을 보고 있다. 서울의 600년 역사를 상징하는 문이 시멘트 모조품인 것이다.

광화문 현판은 한글로 쓰여져 있다. 누가 썼을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디선가 본 듯하다. 그렇다, 그것은 박정희(다카키 마사오)의 글씨다. 이 자는 여기저기에 이런 류의 자취를 많이도 남겨 놓았다. 절대 권력자로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짓이었을 것이다. 마치 짐승이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오줌을 싸갈기듯이. 광화문은 원래의 그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그렇게 못한다면, 최소한 현판만이라도 바뀌어야 한다.

식민의 시대가 지나고 사람들은 해방의 시대가 오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찾아온 것은 다른 형태의 전제정치, 곧 군사독재였다. 그 받침돌은 처참한 전쟁의 체험이었다. 한국전쟁은 수많은 전쟁난민을 낳았다. 그리고 군사독재는 다시 엄청난 산업난민을 낳았다. 그 결과 1950~70년대를 지나며 서울은 난민들의 도시가 되었다. 유목민 어쩌고 하는 소리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큰 착각이다. 서울의 지배적 특성은 식민과 독재가 배태한 ‘난민성’이다.

난민들의 삶은 전쟁의 연속이다.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노점이나 건물을 어지럽게 뒤덮고 있는 간판들은 이 전쟁을 시각적으로 증명한다. 난민들에게 여유와 멋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치이다. 이럴 무렵에 ‘아름다운 서울에서 살렵니다’는 패티 김의 노래가 나온 것은 이상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당연한 일로 생각할 수 있다. 서울이 ‘더럽고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도시’로 빠르게 변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보다는 아름다운 곳이 많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전쟁과 평화

난민들의 도시로서 서울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하지만, 이런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서울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광화문의 오른쪽 어깨 너머로 보이는 북악산 팔각정에 오르면 이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팔각정에는 승용차를 이용하거나 교보생명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오를 수 있다.

차가 자하문 고개를 올라 ‘북악 스카이웨이’로 접어들면 기분이 그럴 듯해진다. 이 길은 정말 훌륭한 드라이브 코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길은 그냥 산길이 아니라, 철조망 사이로 난 산길이다. 곳곳에 ‘사진촬영 금지’나 ‘주정차 금지’를 알리는 푯말이 붙어 있다. 마치 전방의 군사구역에 들어선 것 같다. 팔각정에 올라서도 도심 쪽을 향해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 도심이 훤히 보이는 기막힌 장소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건만 도심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것이다.

경복궁 뒤의 백악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세종로에서 본 백악과 경복궁과 광화문이 어우러진 모습은 서울의 상징이 될 만하다. 그러나 그 백악은 ‘금단의 땅’이다. 멀리서 보면 평화롭기 그지없는 모습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백악은 온통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안에서는 무장한 병사들이 24시간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그곳은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기호와 장치들로 충만해 있다.

지도는 장소를 소거하는 방식으로 전쟁의 영향을 반영한다. 1979년에 발행된 사회과부도를 보니 중앙청과 경복궁은 표시되어 있지만 청와대는 없다. 1995년에 발간된 종로구 관광지도에도 역시 청와대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일급비밀 사항이라 일반지도에는 표시하지 않은 모양이다. 청와대 앞을 개방한지도 오래되었건만 지도는 여전히 그 모양이다.

종로구청 앞에는 손으로 그린 커다란 지도판이 서 있다. 여기에는 청와대는 물론이거니와 바로 옆에 있는 미 대사관마저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눈 가리고 아웅’도 이 정도면 개그콘테스트 대상감이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간판장이의 실수였을까, 구청 측의 배려였을까, 정부기관의 요청이었을까? 어느 경우나 한마디로 ‘웃기는 짬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경복궁 ‘복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을 폭파시켜 없애 버린 것은 정말 김영삼 씨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하지 못했을 일이다. 그는 이 한가지만으로도 이 나라의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문화와 역사를 송두리째 위협했던 무지막지한 정치인으로 말이다.

그 과정에 적지 않은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총독부 청사를 없앤 뒤의 경관은 참으로 일품이다. 이 점에서 경복궁 복원사업에 큰 기대를 걸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역사 바로 세우기’의 상징이 되기 위해서는, 경복궁의 ‘박제적 복원’을 넘어서 이 지역 전체의 ‘유기적 복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박제적 복원’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현재의 복원사업은 여러모로 불충분하다. 광화문을 그냥 두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청와대와 국립민속박물관이다. 총독부 청사를 없애니 청와대가 저 뒤에서 경복궁을 굽어보듯이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었다. 이 경망스런 푸른빛 기와집은 시민들 속으로 더욱 가깝게 옮겨가야 하지 않을까? 국립민속박물관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법주사 팔상전을 본따 지었다는 이 건물을 그냥 두고 경복궁의 복원을 말할 수 있을까?

‘유기적 복원’은 경복궁 복원을 계기로 그 일대를 서울의 600년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세종로를 대대적으로 바꿔야 한다. 광화문에서 세종로를 보면 참혹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것은 단지 선글라스를 쓴 박정희(다카키 마사오)와 눈에 핏발이 선 전두환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양쪽에 시립해 있는 듯이 들어서 있는 사각형 건물들의 경관에서는 어떤 멋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저 앞으로 보이는 조선일보사의 시티비전은 이 보잘 것 없는 경관을 더욱 기괴하게 만든다.

독재자의 강압에 의해 전통과 현대가 강제결혼한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세종문화회관이지만, 이마저 없었더라면 이 거리가 도대체 얼마나 황량하고 삭막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이다. 앞으로 미 대사관이 이전하면, 그 부지로 국립 현대미술관을 옮겨오자. 국립 현대미술관을 멀리 산 속에, 놀이동산과 동물원 사이에 자리잡게 한 나라가 또 어디에 있을까? 국립 현대미술관과 세종문화회관이 마주보게 되면 세종로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감시의 거리에서 문화의 거리로. 이 거리는 삼청동으로 인사동으로 이어지면서, 이 일대를 거대한 시각문화의 중심지로 바꿀 것이다.

더욱 더 큰 꿈을 꾸는 사람들도 있다. 광화문 앞을 시민광장으로 조성하자는 것이다. 이곳이 광장이었을 때, 이 땅에는 불행히도 근대적 의미의 시민들이 없었다. 이제 시민들은 있으나, 역시 불행히도 이곳은 자동차들의 독차지가 되었다. 이곳에 시민광장이 조성된다면, 세종로는 통치의 거리에서 시민의 거리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수도의 중심에 시민광장이 조성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근대화의 공간적 완성을 향한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꿈을 꾸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실현될 가능성도 커진다. 그러나 꿈만 꾸는 것으로는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 세종로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실천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빠르게 늘어나는 것을 꿈꾼다. 그리하여 ‘지구의 날’처럼 늘 사람들이 자유롭게 다니는 길이 되기를.

홍성태 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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