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1월 2001-11-29   3686

전쟁은 여성에게 더 잔혹하다

지난 9월 22일 필자는 경북 경산과 청도 지역의 피학살자 유족모임에 다녀왔다. 경산에서 모임을 마치고 청도로 가려는데 경산 모임에 참석했던 어떤 허리 구부러진 할머니가 자신도 청도 사람이니 청도 유족모임에 같이 가겠다고 나섰다. 차를 타고 가면서 할머니에게 유족이냐고 물어보았다. 해묵은 상처를 건드릴까봐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는데 할머니는 “전쟁 직후 보도연맹 사건으로 남편을 잃었다”고 대답했다. 청도로 가는 길, 그리고 식당에서 할머니가 전해준 사연은 나를 비감에 젖게 만들었다.

보도연맹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한 할머니

할머니는 전쟁이 나기 한해 전인 1949년 경남 밀양에서 인근 경북 청도로 시집을 왔는데, 남편은 자신보다 네 살 위였다고 했다. 1950년 7월에 남편이 잡혀갔으니 남편과는 채 1년도 살지 못했으므로, 슬하에 자식도 없었다. 남편은 그저 농사일이나 노동하는 사람에 불과했으며, 전쟁 나기 전 어떤 조직이나 모임에 나갔는지, 무슨 이념에 공명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고 대화도 별로 나누어 보지 않았다고 했다.

남편은 전쟁 발발 직후 파출소에 잡혀갔다가 일단 풀려나 집에 왔는데, 또다시 호출이 와서 자진 출두했다고 한다. 그 때 도주했으면 살았을 터인데, 잘못한 게 없으니 아무 일 없을 거라 믿고 다시 파출소로 갔다는 것이다. 이후 청도 경찰서로 도시락을 싸서 찾아가 몇 번 면회한 것이 전부였으며, 그후 영원히 이별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후 할머니는 남편이 경산의 코발트 광산에서 총살당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것만 믿고 작년부터 경산 유족회 모임에 참석한 것이다.

할머니는 “그놈의 양반이라는 체신이 무서워” 한번 시집가면 영원히 그 집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개가(改嫁)도 하지 않은 채 한 많은 세월을 남편도, 자식도 없는 시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13년 전 사망한 시어머니와 평생 농사일 하면서 살았는데, 다행히 양자를 하나 두어 그가 사는 경기 안산에서 살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청도역 앞 추어탕 집에서 누구를 원망하거나 분노할 힘조차 잃어버린 듯 보이는 할머니의 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이 할머니를 보면서 엄청난 역사의 격랑에 파묻혀 눈길조차 받아보지 못한 ‘전쟁과 여성의 수난’이라는 문제를 새삼 머리에 떠올렸다.

날벼락처럼 남편을 잃고 빨갱이 가족으로 남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입 한번 벙긋 못하고 비참한 삶을 꾸려온 과부들의 이야기는 전국 어디에나 있다. 군인으로 참전한 아들과 남편을 잃은 여인들의 고통도 이에 못지 않지만, 그래도 그들은 정신적 물질적 보상이라도 받았으니 이러한 여인들과는 처지가 다르다.

여성들의 수난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어쩌면 더 심각한 것은 전시에서는 바로 국가가 폭력적으로, 전쟁이 여성들을 잠재적인 성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에 있다. 전쟁은 총 칼, 군인과 경찰의 말이 곧 법이 되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러한 물리력에 가장 약한 존재인 여성들이 최대의 피해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학살에는 언제나 재산의 약탈과 여성의 약탈, 즉 성 유린이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여성들이 당한 고통이야말로- 당사자는 물론 누구도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꺼리고, 뚜렷한 자료도 없지만, 경험자들은 모두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며- 전쟁의 잔인성과 비극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종군위안부 문제와 더불어 한국전쟁 당시 여성들이 겪은 고통은 20세기 한반도 비극의 정점에 있다.

학살과 잔인한 성 유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미군에 의한 유린이었다. 자신들이 왜 이 전쟁에 투입되었는지도 모르고 교육수준도 형편없이 낮았던 스무 살 안팎의 혈기왕성한 미군들은 동네를 돌아다니며 ‘여인 사냥’을 벌였다. 미군들은 젊건, 늙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덤벼들었으며, 그것은 19세기 미국 서부 개척 당시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인디언 여인들을 닥치는 대로 강간하였던 조상들의 행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주민들은 미군이 들이닥치면 자기 집의 여자들을 숨기기에 바빴고, 과부나 연고가 없는 여인들을 희생양으로 바치기도 했다.

토벌작전에 참가한 국군들도 미군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이들도 동네에 들어가 성 상납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도 동네 사람들은 과부나 연고가 없는 여인네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성을 잃은 일부 군인들이 젊은 여인을 요구하기도 해서 주민들은 사랑하는 자신의 아내와 딸이 성 노리개로 변하는 것을 가슴 찢어지는 심정으로 지켜보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 상납이 목숨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군인들은 마음껏 즐기고 나서 이들 모두를 피의 제물로 삼기도 했다.

남편이 보도연맹원으로 끌려갔거나, 좌익활동 경력자로 도망간 경우, 홀로 남은 여인네들도 성 유린의 주요 표적이었다. 1948년 제주 4·3사건 당시에도 이러한 일이 많았는데, 남편을 찾아내라고 윽박지르면서 잡아온 여인네를 발가벗겨 노리개로 삼거나 성폭행하기도 했다. 이련 짓들을 그들은 ‘산부인과 고문’이라고 했다니 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어찌 옛일이라고 잊고 넘어갈 수 있겠는가? 더러는 얼굴 반반한 여인들을 차지하기 위해 그의 남편이나 아버지들의 약점을 잡아 좌익으로 몰아 죽인 다음, 여인들을 강탈한 사례도 있었다. 빨갱이가 되는 것이 천형(天刑)과 같고 빨갱이 가족을 벌레같이 보던 시절이니, 그의 여인네들을 전리품 취급한 것은 야만적인 정치상황의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전쟁 당시 알려지지 않은 여인들의 비극

정신대 할머니들의 비극적인 삶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지만, 전쟁 당시 한국 여인네들이 겪은 비극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규모나 잔인성, 비극성에 있어서 20세기 어떤 사건과도 견줄 수 없는 이 문제에 대해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의 의식 있는 여성들도 너무나 무관심하다. 이제 평화의 시대가 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문제가 자신들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이들을 데리고 봇짐을 들고 피난 가고 있는 오늘의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50년 전 우리 여성들의 모습이며, 그 봇짐 뒤에 감추어진 여인들의 수난은 오늘의 우리 모두, 특히 오늘의 여성들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전쟁의 중요한 한 진실이다. 무엇보다도 “모든 전쟁에서 이러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라는 편리한 정당화 논리들과 적극 맞서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김동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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