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2월 2002-02-01   366

왜 제대로 바뀌는 게 없나

왜 제대로 바뀌는 게 없나


신년 벽두에 유엔 주재 네팔 대사를 지낸 비노드 비스타를 만났다. 그는 2002년을 맞아 경험한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을 내게 얘기해주었다. 비스타의 친구 중 태국에 거주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친구는 아버지와 사이가 아주 좋지 않았다. 자신의 결혼과 아버지의 재혼 등을 둘러싸고 의견의 차이가 커져 큰 불화를 빚고 말았다. 부자 사이에 벌어진 갈등의 골은 메울 길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새해를 맞아 전화로 인사를 나누던 중에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친구가 아버지와 화해하고 함께 지낸다는 것이다. 정작 놀란 것은 화해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 원인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진지한 의사소통 끝에 어느 한쪽의 마음이 바뀌어 사태를 극복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늙어 기억상실증에 걸리면서 과거의 중요한 일들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비스타는 그 이야기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고 고백했다. 왜 바뀌지 못하고, 망각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가.

비스타와 헤어져 안국동으로 돌아왔다. 언제나 먼저 보이는 것은 약간의 세련됨을 추구하다 더 많은 가시성을 상실한 듯한 간판보다 낡아가는 빌딩을 무모하게도 통째로 덮어버린 포토사인이다. 헝겊으로 만들어진 대형 현수막에는 이영애처럼 반반한 모델이 웃고 있지 않다. 웃고 있긴 하나, 알 만한 사람들만 익히 아는 그만그만한 인물들이 서 있다. 참여연대 간사와 회원들이다. 그 10인의 초상은 종로 뒤편에서 참여연대를 쉽게 찾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하는 이정표가 된 지 오래다. 그 얼굴들보다는, 곁에 쓰여진 구호로 인하여.

“내가 참여한 만큼 바뀌는 세상”

물론 그것은 참여연대 시민운동의 기본구호로 통용되는 “시민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의 변주곡에 불과하다. 그러나 네팔에서 돌아온 내게는 사뭇 의미심장하다. 변함없는 그 얼굴들은 변화를 추구한다. 그러나 사회는, 세상은, 좀처럼 바뀌려 하지 않는다. 어차피 가만 두어도 만물은 변하고 있다는 식의 물리학적 한담은 곤란하다. 바꾸자며 웃고 있는 얼굴들을 외면한 채 변화를 거부하는 태도는 계속 완강하다. 그나마 한 정권의 마지막 해를 맞아 더 견고하다. 바꾸자는 요구는 개혁이요, 소수다. 거부하는 몸짓은 보수주의요, 다수다. 그래서 진정한 변화는 어렵다. 우리가 경험으로 확인하고 있는 정치물리학적 공리다.

그렇다면 물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요구하는 변화를 온갖 비이성적 논리로 붙잡아 두고, 이미 가진 것에 함부로 손대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요, 자유경쟁이라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개혁이란 걸 시도하다 중단한 여당이나, 사사건건 반대만 하는 식으로 개혁을 막은 야당에게도 마찬가지다. 변화를 원하지 않는 당신들은 현실의 이 모든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하자는 것인가.

그들이 입을 열기 전에 짚이는 것이 있긴 하다. 놀랍게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도 자기들이 잊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더러 잊어버리라고 한다. 국가를 위하여,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사회의 질서를 위하여, 그리고 숭고한 사유재산제를 위하여, 따지지 말고 잊어버리라고 한다.

그토록 변화를 외쳐왔건만 지금 어떠한가. 따지고 보면 변한 게 없다. 놀라울 정도로 바뀐 게 없다. 오히려 슬그머니 딴전을 피워 잊게 만들려는 의도를 도처에서 발견한다. 육교가 사라져 시원해진 안국동 거리에서 다시 현수막을 바라본다. 지금이라도 빨리 바꾸는 것이 우리에 대한 우리의 의무라고 한다.

차병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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