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2월 2002-02-01   885

노동자 밑에 노동자 있다

노동자 밑에 노동자 있다


“뭐… 캐리어에 다닌다고 합니다.”

“저는 그냥 공장에 다닌다고 말해요.”

광주 하남공단 (주)캐리어에서 하청업체 소속으로 근무하는 노동자들한테 “주변 사람들에게 다니는 직장을 어떻게 소개하느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다. ‘캐리어 하청직원이다’, ‘캐리어 하청회사인 OOOO에 다닌다’고 정확히 밝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왜 이들은 직장을 밝히기를 주저하는 것일까?

“쪽팔리잖아요. 광주에서 캐리어 다닌다고 하면 그래도 대접받는데, 캐리어든 기아차든 하청들 임금이나 대우는 형편없거든요. 하청이라고 하면 왠지 모자란 사람 같고….”

하청 노동자 임금, 정규직의 1/3 수준

‘사내하청’은 말 그대로 하청업체가 원청회사로부터 수주한 물량을, 원청회사 안에서 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이나 자동차 같은 대규모 제조업 공장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형식상으로는 원청과 하청업체가 업무위탁 또는 도급계약을 맺지만, 대부분은 정규직과 같은 라인에서 일을 하는 불법적인 파견근로다. 하청 노동자들이 원청 노동자와 함께 근무하면서 원청 관리자의 지휘감독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6일 민주노총 금속산업연맹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조사대상 52개 사업장에 근무하는 비정규노동자는 모두 5만4466명으로, 52개 사업장 전체 사원(19만9334명)의 27%였고, 조합원(13만4877명)의 40%나 차지했다. 특히 비정규직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사내하청 노동자였는데, 조사대상 비정규직의 71%(3만8613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같은 공장에서 원청 소속 정규직들과 함께 일하는 이들 사내하청 노동자의 신분은 정규직과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대부분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은 최저임금(월 47만4000원, 시간급 2100원)을 겨우 넘는다. 회사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월 52∼57만 원이고 상여금이나 연장근로수당, 특근비 등을 보태 한 달에 100만 원에 조금 못 미치는 돈을 쥘 수 있다.

한 하청노동자는 “월급날 가장 기분 나쁘다. 내 옆에서 일하는 정규직형은 나보다 일을 더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닌데 300만 원 가까이 받았다. 그것도 적다고 투덜거린다”고 말한다. 같은 생산라인에서 일하면서 그 중 힘들고 기름때가 묻는 일은 대부분 하청노동자들이 도맡아 하는데도 임금은 3배 가량 차이가 난다.

임금뿐 아니다. 지난해 사상최대의 흑자를 올려 이에 따른 성과급 배분 문제로 노사갈등을 빚었던 현대자동차에서 하청노동자들은 아예 성과급 지급 대상에 끼지도 못했다. 잠정합의안이 한 차례 부결된 뒤에야 겨우 하청노동자들에게도 근속년수에 따라 120%까지 성과급을 주기로 했지만, 성과급 300%에 일시금 160만 원을 받은 정규직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작업복과 작업화도 다르다. 하청노동자들은 원청회사의 이름이 찍힌 작업복을 입을 수 없고, 입사할 때도 누가 입거나 신었던 헌 옷과 신발을 받는 게 관례다.

캐리어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한번은 정규직이 신다 버린 안전화를 주워 신었는데(그나마 하청회사에서 받은 안전화보다 깨끗하고 좋아서) 회사 관리자가 규정상 하청 노동자는 회사 안전화를 신지 못하게 돼 있다면서 빼앗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하던 하청 노동자는 “관리자들은 대놓고 ‘하청은 인간이 아니다’고 말하기도 한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정규직 ‘우선’

“지난 11월 23일, 야간 근무가 시작되자마자 갑자기 비상대피방송이 들려왔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생산라인이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일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방송이 나온 지 20분 정도 지나자 라인이 섰고 가스가 누출되었다며 대형사고의 위험이 있으니 모두 대피하라고 했다. 그 후 직영(정규직)들은 퇴근하고 하청인 우리는 비상대기하라고 해서 현장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 목숨은 직영이나 하청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결국 새벽 4시 20분경, 직영 아저씨들은 반장 조장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고 하청인 우리들만 라인을 돌렸다…. 우리가 먹고살려고 들어왔지, 개죽음당하려고 온 게 아닌데 말이다”

민주노총 홈페이지(www.nodong.org)에 올려진 현대자동차 3공장 하청노동자의 사연이다. 가스누출로 인한 대형사고의 위험 앞에서도 하청 노동자들은 달리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비단 산재위험만이 아니다. 하루 작업이 끝난 뒤에는 하청들만 남아서 마무리 청소를 해야 하고, 관리직이나 조·반장들로부터 ‘남의 공장에 왔으면 고분고분 일만 하라’는 등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인격적 모멸감까지 견뎌야 한다.

고용 불안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캐리어사내하청노조 이경석 위원장은 “소화기 계통이 좋지 않아 철야와 특근을 자주 못했는데 캐리어는 한마디 경고도 없이 바로 나를 해고했다”며 당시 ‘파리목숨’이라는 비정규직의 설움을 톡톡히 경험했다고 한다.

일시적인 물량감소나 경영난 등으로 인력조정을 할 때 하청노동자들은 ‘해고 0순위’다. 가장 손쉽게 떨어내 버릴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정규직 노조조차 하청 노동자들을 자신들의 고용안전판으로 여기고 “구조조정시 하청을 우선 정리한다”는 등의 문구를 단체협약에 명시하기도 한다.

정규직 되려고 2000만 원 상납?

지난해 12월 31일자로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은 물량감소 등을 이유로 하청업체 18개 가운데 7개 업체와 재계약을 하지 않는 방법으로 하청노동자 930여 명 가운데 401명을 해고했다. 하청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항의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회사 쪽은 정규직들에게 “하청을 해고하지 않으면 너희가 해고될 것”이라며 노-노 갈등을 노골적으로 부추겼다.

하지만 이로부터 사흘 뒤인 1월 3일 이 공장은 “라인의 정상 가동이 힘들어 급한 대로 83명을 충원하겠다”면서 이미 해고한 401명 가운데 30여 명을 다시 채용했다. 기존의 근속년수나 호봉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채 말이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불과 사흘 사이에 인력수급계획이 바뀌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일이다. 마음대로 해고했다가 언제든지 마음에 드는 사람만 골라 채용하는 노동시장 ‘유연화’의 극치를 보여준 셈이다. 광주지역 한 노조 간부는 “지금 기아자동차에는 비정규직이 정규직 되려고 2000만 원 썼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며 “헛소문이길 기대해 보지만 지금까지 기아자동차가 해온 행태를 볼 때 소문으로만 넘기기 어렵다”고 말했다.

“출근하는 모습을 보면 누가 정규직이고 누가 하청인지 그대로 표시가 난다.” 기아차사내하청노조 간부는 이렇게 말한다. 기아자동차 마크가 찍힌 점퍼를 입고 당당히 걸어가는 사람은 정규직이고, 주머니에 손 넣은 채 고개 숙이고 들어가는 사람들은 하청 노동자라고 한다.

언제쯤이면 하청 노동자들도 정규직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즐겁게 일할 수 있을까? 하청 노동자들의 정당한 노동권 요구에 대해 “남의 공장에 와서 설치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이다.

이정희 워킹보이스 취재편집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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