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4월 2002-04-10   823

시장에서 광장으로

시장에서 광장으로


학위 논문을 끝내고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산에서 학술 세미나가 열린 적이 있었다. 세미나를 서둘러 끝내고서 나는 부리나케 자갈치 시장부터 찾았다.

‘토종 국밥집’은 아직도 정겹게 서 있었다.

“아이고-, 우리 호성이 아이가. 니가 여어는 우짠 일이고?”

국밥집 아줌마는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대뜸 알아보고는, 반가움에 떨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아주머니, 절 알아보시겠어요?”

“하모, 니 할무이한테서도 말 많이 들었대이. 박사 따러 외국 나갔다문서, 인자 박사 됐나?”

국밥이 속달우편처럼 날아왔다.

시장은 내 어린 시절 무지개 뜨는 고향이었다. 나에게도 참으로 배고파 죽을 것만 같았던 시절이 있었다. 아아! 나는 전쟁의 탯줄을 끊고 바로 이 자갈치 시장 건너편 저 영도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았던가. 더 이상 내몰릴 길 없는 피난민들이 마지막 보따리를 움켜잡고 주저앉아 서로 으르렁거리던 성난 도시의 마지막 끝이 바로 영도였다.

나도 뒤질세라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담배부터 배웠다.

625 직후라 먹을 게 귀했다. 나는 오그라든 배를 움켜쥐고 동무들과 무밭이나 고구마 밭을 점잖게 털었다. 그리고서는 길에서 줏은 담배꽁초를 불붙여 입에 터억 허니 물고는 담배 연기를 왕자처럼 내뿜기도 했다.

그래도 배가 고팠다.

그러면 동무들과 바닷가로 내려갔다. 전쟁 때 부서진 무지막지한 철선들이 죄다 영도 앞바다로 끌려온 듯했다. 폐선에서 녹아내린 시커먼 기름이 온 바다를 검은 담요처럼 뒤덮긴 했지만, 그 든든한 쇠붙이에는 홍합이 흥건히 달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온몸이 검은 기름으로 뒤범벅되긴 했지만, 그 홍합은 꿀맛이었다.

물론 자갈치 시장이 빠질 순 없었다.

바로 이 자갈치 시장에서는 우리 할머니가 환갑이 넘도록 미역 장사를 하고 계셨다. 버젓이 가게를 차려놓고 장사하실 형편은 물론 아니었다. 할머니는 요컨대 무허가 불법 장사꾼이셨던 것이다.

헌데 거기서 얻어먹는 국밥이 왜 그리도 환장할 맛이었던지. 나는 때맞춰 곧잘 자갈치 시장으로 진격했다. 내가 출동하면 할머니는 미역통을 옆 언니에게 맡기시고는, 내 손을 붙들고 흰 머리털을 나부끼며 손수 바로 이 ‘토종 국밥집’으로 오시곤 했다.

“이놈이 바로 내 손주요, 고기나 한점 더 얹어주시오” 하며 간곡히 부탁하시는 할머니의 떨리는 목소리를 나는 자주 엿들을 수 있었다.

할머니의 로비였던 것이다.

비계만 자욱히 깔린 돼지고기 국밥이었지만, 그 얼마나 환상적인 밥상이었던가!

허나 내가 그득히 먹고 밖으로 나올 때쯤이면, 할머니는 이미 동지들과 함께 도주하신 지 오래였다. 벌써 단속반원이 출동한 것이다.

바로 거기서 나는 나의 또 다른 형제들을 발견했다. 비록 한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같이 사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내 할머니도 그 속에 버젓이 끼어 함께 튀셨으니, 어찌 그들이 내 가족이 아니었겠는가.

귀여운 광장, 유치원 속의 정치사상

이렇던 나도 드디어 아빠가 되어 한때 원효로4가에 산 적이 있었다.

딸애가 여기서 태어나 급기야는 유치원 갈 나이가 되었다. 변변한 유치원 하나 제대로 있을 리 없는 낙후된 동네였다. 그래서 거의 유일하게 몰려드는 곳이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유치원 하나뿐이었다. 그러니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아내가 출근해야 했기에, 내가 딸애의 손을 잡고 추첨이 행해지는 그 유치원으로 가야만 했다. 추첨이라니, 그 얼마나 공정하고 민주적인 방식인가!

으레 여성들만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홍일점이었던 탓에 온갖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여기저기서 여성 특유의 비명소리와 환호성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성공한 쪽과 실패한 측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비장했다. 나는 내 딸애의 손을 잡고 ‘단두대’로 발을 옮겼다. 떨렸다. 이 너댓 살밖에 안 된 녀석이, 이 어린 나이에 벌써, 이처럼 살벌한 생존경쟁의 격전장으로 도살장 가는 소처럼 끌려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가 싶었다. 여기서 내가, 아니 내 손가락이 실패한다면, 인생 최초의 숨막히는 경쟁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한 내 어린 딸은 얼마나 크게 상처받을 것인가. 소위 아비라는 작자가 딸의 이 조그만 인생 출발에 찬물을 끼얹어서야 되겠는가 하는 책임감과 인륜의 닦달질이 극심했다. 내 손가락 놀림 하나에 모든 게 달려 있다니! 온갖 번뇌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허니 오직 하늘에 비는 수밖에.

긴장된 순간이었다. 떨리는 다리를 추스르며 성스럽게 추첨함으로 접근했다. 온갖 눈길이 이 기괴한 남성의 손에 집중되었다. 운명에 모든 걸 맡겼다. 장원급제! 그렇다고 뭇 여성들처럼 환호성을 내지르며 팔짝팔짝 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아비로서 드디어 내 딸애의 인생 출발에 청신호를 보내는 쾌거를 달성한 것이다.

문을 나서자 직업의식이 도졌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이른바 ‘기회균등의 원칙’이 기림 받는다.

이 원칙은 비유컨대 모든 사람을 -그들이 장애인이든 건강한 청년이든, 재벌의 자식이든 철거민의 아이든지를 가리지 않고- 100m 출발선 위에 똑같이 세워놓고 자유롭게 달리기 경주를 시키는 경우와 흡사하다. 그것은 ‘가장 무능한 자와 가장 유능한 자에게 성공을 위한 경주의 평등한 출발을 부여’하는 셈이 된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도 “사자와 소에게 동일한 법을 적용하는 것은 억압이다”라는 글 화살을 날리고 있다. 이를테면 기회균등의 원칙이란 불평등해지기 위한 균등한 기회 제공의 원칙에 다름 아니다.

한국도 소위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탓에, 부부 둘 다 한꺼번에 나가서 돈벌이를 하지 않으면 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달동네 가정이나, 남편이 워낙 돈을 잘 벌어다주기 때문에 집에서 고스톱이나 치며 빈둥거려도 좋은 주부의 가정도 다 같이 ‘평등’한 대우를 받아 공평히 추첨에 동참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시장에서 광장으로

시장을 사익을 위해 흥정하는 곳이라 한다면, 광장은 공익을 위해 절규하는 곳이라 이를 수 있다. 역사 발전을 위해 우리는 불의로운 정치체제와 흥정할 것이 아니라 규탄의 함성을 내지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알제리의 민족해방 운동가였던 프란츠 파농과 우리 신채호 선생의 ‘광장’을 향한 포효는 늘 우리의 뼈를 깎는다. 파농은 백인을 닮아가려는 동료 흑인들을 “백인보다 얼굴이 더 흰 흑인”이라 질타했다. 비슷한 시기에 신채호 선생도 “조선에 주의(主義)가 들어오면,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으로 전락한다고 개탄한 적이 있다.

시장에서 광장으로 사람들이 몰려가는 꿈만 꾼다.

규탄의 함성을 내지르며 뜨거운 연대의 손을 서로 맞잡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광장 아니겠는가.

박호성 본지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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