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4월 2002-04-10   984

대관절 연봉 300만원에 만족하라굽쇼?

한국영화 성장의 그늘에 가린 조감독들의 근로현실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판에 뛰어든 지 4년을 넘어서는 조감독 박모 씨(31세). 밤샘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택시비가 모자라 촬영장 근처 PC방에서 날을 지새웠다. 끼니는 컵라면으로 때웠다. 또다시 몇 년간 계속해온 고민에 휩싸인다.

‘이 길(영화)을 계속 가야 하나? 지금이라도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하나?’

함께 학교를 졸업한 뒤 기업체에 취직한 친구들과 비교해 보면 자신의 처지는 한숨만 나올 뿐이다. 영화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열정이 생계를 책임져 주지 않는 것이다. 2년 동안 1편, 잘해야 3년에 2편의 작품으로 그가 벌어들이는 수입은 작품 당 1000만원 안팎. 언젠가 자기 이름을 내걸고 작품을 찍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고단한 생활을 버티고 있지만 녹록치 않은 일상이다.

한국영화 성장 불구, 조감독 근로조건은 참담

지난해 한국영화의 성장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흥행순위 상위권 대부분을 한국영화가 차지했고 점유율은 45%를 넘어섰다. 이에 따라 영화산업에 몰리는 자금 또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다. 하지만 화려한 성장의 뒤안길에는 영화에 대한 열정을 담보로 잡힌 채 부당한 근로조건을 강요받는 조감독들이 있다.

“한국영화가 최근 성장하고 규모가 커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영화 흥행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대부분 제작사에 돌아가고 영화에 대한 재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또다시 투자자들을 모아 대규모 제작금이 마련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마련된 자금은 대부분 스타배우의 출연료나 홍보비로 쓰이고 작품성 향상이나 현장 영화인들의 근로환경 개선에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전국에 1000∼1500명으로 추산되는 조감독들이 최저생계비에도 훨씬 못 미치는 급여를 받으며 이 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조감독협회 부회장 이상필 씨의 말이다.

영화를 제작할 때 조감독들은 대개 4∼6명의 팀을 꾸려 제작사와 계약하게 된다. 이들이 제작사로부터 받는 금액은 많아야 2000만∼3000만 원 정도. 이 돈을 팀원이 모두 나눠 가져야 한다. 그러다 보면 이들 중 나이가 가장 어린 막내에게 돌아가는 돈은 고작 300만 원 정도. 경우에 따라 30만∼40만 원의 돈을 받으며 일을 하는 이들도 있다. 대부분의 조감독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일을 해야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막노동이다. 밤샘 촬영으로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영화촬영이 없는 날 새벽 노동시장을 찾는 조감독들이 적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감독들은 제1·2·3 조감독, 스크립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밑바닥부터 시작해 제1 조감독이 되는 데 짧아도 6년 정도 걸린다. 하지만 제1 조감독이 된다고 해서 생활에 여유가 생길 리는 만무하다. 감독이 되어 자신의 작품을 찍지 못한다면 곤궁한 생활을 계속해야만 한다.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작품을 찍는다고 해도 흥행에 성공해 계속 작품을 찍을 수 있는 감독들은 또 몇 되지 않는다. 더구나 일부 제작자들은 이러한 조감독들의 처지를 악용해 연출비 없이 감독 노릇을 하라고 강요하기도 한다.

계약서, 제작사 맘대로

조감독들이 제작사와 맺는 계약서의 내용은 그야말로 제작사 맘대로 꾸며진다. 목소리가 큰 조감독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계약서에 관철시킬 수 있지만 대다수는 말 한마디 꺼내보지 못한다. 제작사에 견주면 현저한 약자인 조감독들로서는 감히 눈 밖에 나는 말이나 행동을 할 수 없다. 행여 제작자들에게 찍혔다가는 이 바닥에 다시는 발붙이기 힘들어지기 때문에 불리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꾹 참고 있을 수밖에 없다.

영화 제작과정은 보통 시나리오 작성 및 기획, 촬영, 편집 등으로 나누어진다. 조감독들은 촬영 이전단계부터 제작에 참여하게 되는데, 계약은 본촬영 단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이전에는 최소한의 차비나 용돈만을 받으며 일을 하게 된다. 그나마 이러한 과정을 밟아 영화가 제작되고 계약이 성립되면 상관없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제작 이전단계에서 6개월이 넘게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도 많다. 이럴 경우 조감독들은 전혀 돈벌이가 안 되는 일에 긴 시간 매여 있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 시간만 끌다가 영화제작이 무산되는 경우 이들은 시간과 돈과 열정만 낭비하게 된다.

또한 대부분 계약서에는 제작기간이 명시되지 않기 때문에 예정보다 제작기간이 길어질 경우에도 항변할 길이 없다. 예정보다 기간이 길어지고 운이 좋아 재계약이 이뤄지더라도 그 금액은 기간에 상관없이 원래 계약금의 50%를 넘지 않는다. 조감독들은 1년 이상 제작되던 영화가 ‘엎어지는’ 경우에 비하면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제작비 부족으로 촬영이 중단되는 경우 조감독들로서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제작이 끝난 뒤에나 이루어지는 잔금지급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물론, 경력에도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처우개선 위해 조감독협회 창립

이처럼 열악한 근로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조감독들의 목소리가 모여 지난 2월 28일 한국조감독협회(회장 박진우)가 탄생했다. 조감독협회는 조감독들의 근로환경을 개선하고 한국 영화제작 시스템을 개선하는 한편, 한국영화 제작 활성화에 기여한다는 목적으로 창립됐다.

이전에 보기 힘들었던 ‘대박’이 한국영화에서도 터지고, 대기업 자본이 영화판으로 흘러들어오면서 영화산업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이윤을 창출하는 산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감독들의 보수는 여전히 절감해야 하는 것으로만 인식되고 있다. 이처럼 변화되지 않는 현장제작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조감독협회에서는 우선 근로환경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표준계약서’ ‘표준이력서’ 등을 마련하고 있다.

“15년 넘게 영화판에서 굴러먹었다”는 41세의 조감독 김모 씨는 “그래도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밖에 아는 게 없어서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자기보다 나이 어린 감독 밑에서 일을 하면서 감독이 되는 것을 더 이상 기대하기도 힘든 형편이다. 그는 영화산업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도 성장의 혜택이 젊음과 열정을 영화에 바치고 있는 후배들에게도 고루 돌아가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상필 부회장도 “감독이 되는 것에만 연연하지 않고, 하나의 전문직으로 자리잡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조감독들의 전문화, 보수의 현실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태욱(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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