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4월 2002-04-10   671

주부가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변한다

일본 가나가와네트워크 시민정치인 1호 테라다 에츠코


“저는 그게 정치활동인지도 몰랐지요.”

82년 “가해자가 되는 것을 그만두자”라는 표어를 내걸고 직접청구운동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던 한 여성의 회고다. 그의 이름은 테라다 에츠코(寺田悅子). 올해 나이 예순여섯의 흰머리가 성성한 할머니다. 그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정치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그것이 정치활동임을 자각하고 있지 않은 점에 바로 풀뿌리 민주주의의 파워가 숨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의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한 게 정치활동의 시작이었지요. 당시, 저는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의 빈터에 유기농법으로 야채를 기르는 활동을 열심히 했지요. 그 활동을 하면서 환경오염의 가해자가 화학세제를 사용하는 주민들 자신이라고 느꼈어요. 직접청구운동에 나서게 된 동기는 단지 부엌에서 화학세제 대신 비누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지요.”

그러나 화학세제추방을 위한 조례청구운동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는 그가 다음해 지방의회선거에 직접 입후보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일본 시민자치운동의 메카 ‘가나가와 네트워크 운동’의 `1호 의원은 이렇게 탄생했다.

평범한 주부였던 그가 지방의회 의원선거에 입후보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가족의 동의를 받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치의 ‘정’자도 모르던 제가 후보자로 나선다는 것은 힘든 결정이었어요. 주위 분들에게 2주간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지요. 남편이 이해해 줄지가 무엇보다 큰 걱정이었거든요. 무역상사에서 일하던 남편은 타지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답니다. 고민 끝에 남편을 찾아가 저의 상황을 털어놓았어요. 그런데 남편의 반응이 뜻밖이었어요. 남편은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는 에피소드입니다. 그때 남편은 병을 앓고 있었는데 자신이 중병에 걸려 있다고 오해를 하고 있었어요. 제가 고민을 털어놓자 남편도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거예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한 남편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이 진정으로 후회 없는 것이었는지를 매일 돌이켜보고 있다는 겁니다. 남편은 저에게 ‘`당신이 어떠한 선택을 하든, 나로서는 그 선택이 당신의 앞으로의 삶에 후회 없는 것이었다고 여겨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길 바랄 뿐이오’라는 것이에요. 그 뒤 ‘후회 없는 삶’이라는 말은 제 삶을 바꾸는 키워드가 되었지요.”

의원활동을 지역사회 현장으로

‘가나가와 네트워크 운동’은 지역사회의 정치가 직업정치가에 의해 이뤄지는 것에 반대한다. 직업정치인의 존재는 정치란 정치가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니라는 정치적 무관심을 낳는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가나가와 네트워크 운동’은 2기 8년제의 임기제한이라는 내부원칙을 만들었다.

그 취지는 보다 많은 주민들이 의원생활을 체험하도록 하고, 의원생활을 통해 얻은 지혜는 지역사회의 삶의 현장에서 새로운 시민사업을 일으키는 데 쓰자는 것이다. 또한 의원생활의 체험은 새로운 주민후보를 길러내는 데도 유용하게 쓰여진다. 의원생활을 통해 얻은 지식과 지혜의 ‘리사이클링 시스템’이라고나 할까.

“남편은 제가 2기 8년의 임기를 마치고 의원직을 그만두는 것에 대해 심하게 반대했어요. 그토록 힘들게 선거운동을 해서 얻은 의원직인데 왜 스스로 포기하느냐는 거지요. 게다가 3기에 걸쳐 의원을 하게 되면, 의원연금도 받을 수 있거든요. 하지만 저는 그때 그만두기로 한 제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해요. 그로 인해 지금 이렇게 ‘워커즈 콜렉티브’라는 시민사업을 하면서 의원생활의 체험이 활용되는 즐거움을 맛보고 있으니까요.”

재작년 일본의 어느 한 중견교수가 필자에게 던진 질문이 생각났다. “제가 알기로는 정치정당 중에 파벌이 없는 조직은 가나가와 네트워크 운동이 유일하지 않은가 싶어요. 20년 가까운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시민운동 조직으로서의 성격을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이 뭔지 궁금하군요. 합리적 선택이론으로 그 단체의 멤버들의 행동을 설명할 수도 있지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관점에서 그 단체의 특징을 검토해 보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싶군요.”

2기 8년제의 원칙이 정착될 때까지 겪어야 했던 우여곡절을 들으면서 이 단체가 지금까지 70여명의 의원을 배출할 정도의 조직으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시민운동 단체로서의 성격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지난해부터 노인 및 산부들에게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워커즈 콜렉티브’라는 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다. 의원생활에서 다시 삶의 한복판으로 돌아와 시민사업을 하고 있는 그녀가 현재의 가나가와 네트워크 운동을 평가할 수 있는 적격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들의 정치참여를 가진 자들의 정치운동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가나가와 네트워크 운동에 참여하는 멤버들도 중산층 이상의 고학력 여성들이 많더군요.”

풀뿌리 민주주의 얼굴은 각양각색

“저와 같은 사람이 가나가와 네트워크 운동의 첫 대리인이었다는 점을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는 정치와 무관했던 평범한 주부에 불과하고 고졸의 학력임에도 의원생활을 무리 없이 할 수 있었거든요. 바로 저의 이런 경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것이 아닌가 싶어요. 주민들에게 저 같은 사람도 의원생활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해준 셈이니까요. 중요한 건 한 개인의 자질이 아니에요. 자질이 뛰어난 사람을 의회에 보내면 더욱 좋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의회에 보낸 사람을 외부에서 도와주는 공육(共育) 시스템이에요. 사람을 골라 의회에 보내놓고 난 뒤 나 몰라라 한다면 그것처럼 무책임한 것이 어디 있겠어요.”

정치얘기는 때로 사람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만든다.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온화하고 부드럽게 말씀하셔서 그런지 제 맘이 편해집니다. 활동하면서 그런 말투 덕도 보시겠어요. 전 행복해요 하는 게 얼굴에 쓰여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청년도 인터뷰하는 솜씨가 보통 아니구먼. 어쨌든 칭찬해 주니 고맙구려. 만약 그렇게 보였다면 제가 만주출신이라 그런지 모르지요. 이 일이란 게 예측할 수 없는 문제들이 수없이 도사리고 있어서 때로는 느긋하고 유연한 성격이 도움될 때도 있거든요. 그리고 제가 행복해 보인다면 그건 제가 ‘자기답게’ 살고 있다는 느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자기다운 삶이라! 바로 이 표현이야말로 풀뿌리 민주주의의 원점이자 풀뿌리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삶의 자화상이라는 느낌과 함께 얼마 전 세 차례 인터뷰했던 다른 한 분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분은 주민 5만 명의 기부로 만들어진 노인복지시설의 대표인데, 기발한 아이디어로 자신의 활동과 일상적인 삶 속에서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계시는 시민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분 또한 자신의 활동에 ‘자기다운 삶의 추구’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삶이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만큼 풀뿌리 민주주의도 다양한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다고 봐요. 삶의 진리는 하나일지 몰라도 그것이 드러나는 모습은 각양각색이며, 그렇기에 그것을 주민들과 공감하는 방법도 다종다양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분의 체험담은 다음호에서 다루기로 한다.

나일경 게이오대 정치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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