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12월 2002-11-29   1454

우성 유전자만 대접받는 섬뜩한 사회

생명윤리법 제정 무산—미리 가본 2040년 한국


이번 정기국회에서 ‘생명윤리법’ 제정은 물 건너갔다. 생명공학기술 발전에 따라 비롯될 수 있는 인간존엄성, 윤리실종 그리고 인권침해를 예방하기 위한 대안이 좌절된 것이다. 복제인간, 유전자조작 등은 더 이상 먼 미래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가타카>가 보여준 미래의 현실처럼 본지도 2040년 한국사회를 미리 가봤다. 그 썰렁한 현실을 직접 만나보자. 편집자 주

2002년에 사는 여러분들에겐 믿기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2040년에도 재벌 그룹들은 건재하다. 아니, 오히려 여러분 시대보다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훨씬 커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재벌의 가장 큰 고민은 재산 상속과 후계자 선정 문제이다. 하지만 21세기 초반과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당시 여론은 단지 재벌가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거대 그룹의 주인이 되는 세습 경영에 부정적이었고,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는 소액주주운동을 펼치며 재벌과 전쟁을 벌였다. 가장 인상적인 일전은 삼성과의 싸움이었으리라. 2001년 3월, 삼성전자 주주총회에서 삼성은 이재용 부장을 상무보로 발령냈는데, 한 참여연대 회원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는데…”라며 반대한 적이 있다.

하지만 요즘 재벌가의 자제들은 하나같이 왕후장상의 씨를 타고났다. 재계 30위 안에 드는 대기업의 자제들은 지적으로 탁월하고 육체적으로 우수하다. 세계 천재들의 모임인 ‘멘사’의 회원 아닌 사람이 없고, 자기들끼리 ‘철인 3종경기 클럽’을 결성할 정도로 운동에도 능하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여론은 세습 경영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이다. 오너 아들이라 해도 경영자로서 능력이 있다면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우연이 아닌 지난한 노력의 산물이다. 인간 복제와 유전자 조작이 보편화한 지금, 재벌들은 첨단 유전자 공학의 힘을 빌려 우수한 자녀들을 쑥쑥 낳고 있다. 후계자 외에 그를 보좌할 자식도 필요했다. 한 연구기관의 발표에 따르면, 앞으로 10년 안으로 30대 그룹의 임원급 이상 직위에 오너의 직계가족 및 친족이 차지하는 비율이 50%를 넘을 것이라고 한다.

똑똑한 자제를 미국으로 보내 공부시킨 뒤에 현장에서 실무경험을 쌓도록 하면 회사의 미래를 짊어질 훌륭한 인재가 탄생한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기업 경영이 어디 머리로만 할 수 있는 일인가. 그룹 문화에 따라 필요로 하는 후계자의 성격도 달랐다. 삼성은 세밀하고 꼼꼼하고 신중한 지도자를 원했고, 현대그룹은 과감하고 모험적인 기질을 요구했다. 그래서 월스트리트의 투자은행들을 비롯한 외국인 투자자들이 주목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재벌들이 어떤 후계자를 생산해내느냐이다. 이제 재벌 후계자들은 21세기 초반과 달리 자신의 경영 능력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들은 태어날 때 이미 유전자적으로 검증받았기 때문이다. 훌륭한 후계자를 둔 기업은 주가도 높았다. 즉 ‘인적 자산’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다.

유전자 검사로 원하는 인재를 찾는다

2040년에는 대입시험이든 입사시험이든 모든 종류의 시험이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시험 당일의 심신 상태를 걱정하고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까 두려워할 일이 없다. 어떻게 수학 문제 몇 개로, 영어 성적으로, 면접관과 나누는 몇 마디로 한 인간을 평가할 수 있겠는가. 과거의 입시제도, 입사시험 절차, 고시제도는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이제 대학과 기업은 유전자 검사를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인재를 찾아낸다. 이러한 ‘유전자 전형’은 2010년대에 국민의 평등권에 어긋난다는 논란이 잠시 일긴 했지만, 2019년 헌법재판소에서 합헌 판결을 받은 뒤부터는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 그에 따라 유전자 검사 기술도 발달했다. 21세기 초반에야 고작 유전적 질환을 탐지해내는 정도였지만, 이제 그 사람의 성격과 지적 신체적 능력을 모두 아울러 계량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유전자 지도를 넘어 내면의 지도(유전공학자들이 ‘영혼’이라고 부르는)를 그리는 것이다.

연애의 형태도 2002년과는 많이 다르다. 20세기 말에 나온 영화

<가타카>에는 손쉽게 유전자 검사를 의뢰할 수 있는 시설이 등장한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신탁(神託)을 기다리듯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주인공과 사귀는 여성도, 주인공의 유전자를 갖고 와서 이것이 우수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려 한다. 거의 반백 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2040년의 한 풍경을 정확히 예측해냈다. 지금은 밀고 당기는 연애 게임은 별 의미가 없다. 상대를 유혹할 필요도 없다. 남녀는 시내 곳곳에 있는 건강 센터에서 첫 데이트를 하며 상대가 얼마나 우수한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 알아본다. 그저 같이 성관계만 하는 사이라도 그렇다. 21세기 중반에는 에이즈보다 더 무서운 질병이 많으니 관계를 갖기 전에 상대방의 몸에 치명적인 질병이 도사리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2010년에 ‘유전자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세상이 이렇게까지 변화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2002년에도 우수한 유전자를 생산해내려는 노력은 눈물겹지 않았던가. 이화여대 앞에서 난자를 사려고 돌아다니는 브로커가 심심찮게 보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선진국에서도 전문직에 종사하는 백인 남성과 여성들의 정자와 난자는 정자은행에서 절찬리에 팔려나갔다고 한다. 2010년은 그러므로, 더 나은 유전자를 만들고자 하는 발버둥(인간복제 및 종간 교배, 유전자 조작)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해에 지나지 않는다.

그 당시 정부의 결정을 모두가 찬성한 것은 아니다. 종교계와 일부 시민단체는 우려를 표시했다. 종간 교배를 허용할 경우, 짐승과 인간의 교배행위로 예측할 수 없는 생명체가 태어날 위험이 있었다. 엄연한 생명체인 인간 배아를 복제해 의학실험에 쓰고 죽이는 것은 살인행위이다. 유전정보 남용으로 인한 사생활 침해 우려도 제기되었다. 하지만 여론은 실보다 득이 더 많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불치병도 막고. 유전자 속에 도사리고 있는 각종 질환도 일찌감치 찾아내고, 더 나아가 키 크고 아름답고 똑똑한 한국인도 만들어내고. 물론 거대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한 생명공학 회사들의 로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정부는 세계적인 추세를 거부할 수 없었다. 선진국들이 유전공학 기술로 자국 국민들을 품종개량하는 데 나서니 그에 맞서려면 똑같이 해도 부족하다. ‘유전자가 국력’이라는 표어는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리고 ‘유전자가 곧 성공’이다. 부모들은 우수한 자식을 낳으려고 지극정성을 기울였다. 돈을 벌기 위해 뼈빠지게 노력했다는 것이다. 유전자 조작에 드는 비용은, 기본 사양으로 한다고 해도 서울 시내 집 한 채 값이 들었다. 다국적 생명공학 기업들이 유전자 조작에 대한 특허권을 모조리 갖고 있었기 때문에 비용을 낮추기가 어려웠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옵션으로 가면 비용이 서너 배로 뛰었다. 자식이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암기력·관찰력과 손놀림이 정교한 아이를 만들려고 추가 비용을 지불했다. 변호사 자식을 만들려면 아이의 유전자에 논리적이며 분석적인 측면을 강화해야 했다. 이렇게 작업을 한창 하다 보면 태어난 아기가 부모와 이모저모로 딴판인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자기 자식임을 확실히 할 수 있도록 얼굴이 부모와 유사하게 만드는 기술도 각광받았다.

주의할 점은 부모를 쏙 빼닮게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부모들이 워낙 갸름한 얼굴에, 코가 높고 눈이 큰 아이들을 선호하다 보니 부모를 쏙 빼닮게 만들어놓으면 내 자식을 왜 이렇게 못생기게 만들어 놓았냐는 항의가 들어온다. 반면 재벌의 경우는 내심 자기 후계자를 완벽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심리가 있었다. 정말 뛰어난 경영자라면 피도 눈물도 없이 부모를 내치는 냉혹한 자식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 ‘효도 유전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유전자 전형’이 보편화하면서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긴 했다. 2015년 정부는 이듬해부터 유전자 전형을 거쳐 공무원을 채용하겠다고 발표하면서, 특별법을 제정해 의사는 의대에서만, 변호사는 법대에서만 나올 수 있다고 못박았다. 유전자 검사의 정확성을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의사의 자질이 없는 사람이 수술실에 들어간다면? 변호사로서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법정에 들어간다면? 2010년 전에는 그런 일이 벌어져도 알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다르다. 모르고 하는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알고도 하는 것은 죄이다(대외비 하나. 정부가 공무원의 바람직한 유전적 성품으로 ‘고리타분함’을 집어넣었다는 웃지 못할 사실이다. 그것도 미국의 제도를 벤치마킹한 것이라고 하니 할말이 없다).

우수한 인간 대접받는 사회

2010년도에는 부모들이 너도나도 의사 자식을 만들려고 했다. ‘의사용’ 아이가 무수히 태어났다. 문제는 이들이 대학에 들어가는 2027년과 2028년에 터졌다. 이들 ‘준비된’ 예비 의사들을 모두 받아들일 정도로 의대 정원이 많지가 않았던 것이다. 유전자 전형을 끝내고 대학들은 난감한 지경에 빠졌다. 동점자가 너무 많았다. 그 현란한 손놀림으로 배관공을 하면 딱 좋겠지만, 자기 자식이 그런 직업을 갖기를 원하는 부모는 없다. 그래서 자식 하나 의사로 만들겠다고 가산을 탕진한 학부모들은 의대 정원을 늘리라며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뾰족한 수는 없었다. 일부 학부모들은 꿩 대신 닭이라고 자식을 변호사로 만들기 위해 법대로 몰려갔다. 그러나 법대 정원도 부족했다. 의사 자식을 뽑아내기에는 돈이 부족해 대신 ‘변호사용’으로 키운 부모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서울대 정문 앞에서 이들 부모들은 내 자식이 더 잘났다며 패싸움을 벌이는 촌극을 벌였다.

중요한 사실은, 어쨌든 우수종 중의 우수종들은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다는 점이다. 다윈주의의 신봉자들(2002년에 이들을 ‘수구세력’이라고 불렀다는데 사실인가?)은 적자생존의 법칙과 시장원리는 절대 선이라며, 정말 우수한 인간이 대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이들이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세력이니 그들의 말대로 되고 있다.

2010년 이후 정말로 우수한 ‘신한국인’은 매해 태어나는 아기들의 10%에 지나지 않았다. 상위 10%가 90%의 부를 차지하는 세상이라 그런 것 같다. 키 크고 늘씬한 새로운 한국인들은, 비만 유전자를 근본적으로 조작하고서 태어나기 때문에 무엇을 먹어도 살찔 염려 없이 건강한 체격을 유지한다.

성형수술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받는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2002년에서 2040년으로 날아와 명동 거리를 본다면, 여러분들은 기절초풍할 것이다. 지금 한국은 아열대 기후 국가에 속한다. 여러분도 여름이 점점 더워지고 겨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자외선을 막기 위해 선탠 크림을 몸에 잔뜩 바르고, 노출 심한 옷을 입고 다니는 여자들을 보면 말리부 해변에 온 듯한 느낌일 것이다.

2040년은 신한국인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하는 해이다. 어디 그뿐인가.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기성 세대와 비교해 어떤 면에서든 우수하다.

벌써부터 30대 후반과 40대들은 긴장하고 있다. 앞으로 생존 경쟁이 더 치열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세대들은 노화 유전자까지 개량했기 때문에 쉽게 늙지도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우수한 후배들이 치고 올라올 것이다. 유전공학 기술은 계속 발전하기 때문이다.

우수한 자들이 우수한 자들에게 밀리고, 나이 마흔까지 직장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행운이 될 날도 머지않았다. 21세기 초반에 영광을 누렸던 기업 ‘오라클’(2017년에 마이크로소프트에게 흡수합병 당했는데)의 회장 래리 앨리슨의 말이 생각난다. ‘인생은 상어와 같아서, 늘 앞으로 전진하고 매일 더 잘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죽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식이라도 우수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

겸용형 정치인

내가 있는 2040년이 여러분들에게는 살벌한 사회로 보일 것 같다. 하지만 2002년에 우려되었던 유전공학의 부작용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러분들 중에는 인간 복제가 공인되면 정부·기업 등이 복제 인간을 마구 양산해 착취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한국에서 중산층은 2020년도에 무너졌다. 일자리는 없고 구직자는 넘쳐났다.

2040년에 3D업종이란 없다. 돈을 주겠다며 의학실험 대상을 모집하면 “나를 다 사가시오”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순식간에 줄을 이룬다. 이러한데 무엇 하러 복제인간을 만들겠는가? 유전공학 덕분에 범죄율도 줄어들었다. 2040년의 교도소는 거대한 수술실이다. 강간범들은 성욕을, 폭력범들은 공격성을, 사기꾼들은 교활함을 제거당한다. 정부는 이들의 두뇌를 고치는 것과 동시에 유전자 조작도 함께 실시해서 이들이 범죄의 고리를 끊고 건실한 사회의 일꾼이 되도록 장려한다.

미래 사회에는 여러분이 통쾌해 할 만한 변화도 한 가지 있다. 전업 정치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투표율이 아침 드라마 시청률보다 낮다보니 유권자를 상대해 봤자 별 수확이 없다. 정당이 2개 있긴 하지만 정책 차이가 없어 누가 집권을 하든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다보니, 사람들의 정치 혐오는 극에 달했다.

정치인만 아니면 누구나 좋다며 투표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교수 겸 국회의원, 의사 겸 국회의원 등이 줄을 이었고 전업 정치인들은 정치판에서 밀려나버렸다. 사실 자기 자식을 정치인용으로 만들려고 하는 부모도 없었으니, 어차피 대가 끊어졌을 것이겠지만 말이다.

이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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