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12월 2002-11-29   861

동화작가 김중미- 지금 절망하고 있기에 나는 희망한다

…몽둥이를 휘둘렀다.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을 향해 닥치는 대로 휘둘렀다. 그리고 석이는 실신했다. 무서웠다. 자신의 몸 속에서 아버지의 폭력성을 느꼈다. 석이는 그게 정말 두려웠다.

엄마. 아버지에게 밤마다 맞으면서도 헤어나지 못하는 엄마에게 석이는 도망가자고 했다. 가난에 못 이겨 술로 스스로를 파괴하는 아버지로부터 엄마를 지켜야 했다. 아버지의 폭력성을 닮아가는 자신을 위해서도 그래야 했다. 아버지에게 다시 폭행을 당한 그날 밤, 엄마는 석이를 깨웠다. 석이와 엄마가 버스를 탄 새벽, 안개가 짙었다.…

그가 쓴 단편 동화의 줄거리다. 죄지은 듯 도망치는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는 아프다. 아파서 읽는 이의 마음을 깎는다. 그런데 뜻밖이다. 그가 붙인 이해할 수 없는 제목. 어둡고 절망스러운 이 이야기를 그는 『희망』이라 불렀다.

우리를 대변할 정당, 나는 아직 믿는다

그, 김중미.

11월 16일, 그를 만나러 갔다. 알 수 없는 희망의 실체를 확인하러 강화로 갔다. 불혹의 나이. 지금은 작가로 더 많이 알려진 김중미는 작가이기 이전에 빈민지역에서 공부방을 하며, 아이들과 만나고, 고민하며, 함께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줄곧 그래왔다. 자신의 책이 나오자 어디서 떨어진 대단한 사람으로 ‘만들어진’ 그이지만, 그래서 상처를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새삼스러운 건 전혀 없다. 그냥 살아왔고 또 살아갈 뿐이다.

그리 쉬운 길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한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강화 버스터미널. 다시 한참을 기다려 갈아탄 버스가 일행을 내려준 곳은 양도면 살문리였다. 남편 최흥찬 씨가 마중을 나왔다. 꾸불꾸불 올라가던 그의 트럭이 샛길로 빠졌다. 외딴집. 그들 부부가 딸 둘과 함께 살고 있는 집은 동네에서 벗어나 언덕배기에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개 네 마리와, 오리 십여 마리를 데리고.

김중미 씨는 인터뷰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다. 필요 이상으로 왜곡되고, 필요 이상으로 미화되는 게 싫기 때문이다. 그 어느 쪽도 그가 아니기는 마찬가지니까. 꼭 그 모습 그대로의 그를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기 시작한 기자에게 그는 “오늘 인터뷰를 수락한 것은 민주노동당을 도와주기 위해서”라며 입을 열었다. 올 초 그는 민노당 당원이 됐다. 이유는? 이유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에겐 당연했다.

“오랫동안 빈민지역에서 일해온 사람이라면 ‘당연히’ 갖게 되는 소박한 바람이 있게 마련이다. 빈민이나 노동자를 대변하는 정당이 있었으면 하는 것 말이다. 사회적 소수자들과 함께 하다보면 그들을 대변하는 정당, 함께 해줄 세력을 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나 역시 그런 바람이 항상 있었다. 민노당이 처음 창당됐을 때부터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강화로 이사 오고 하면서 다소 미뤄진 것일 뿐이다.”

그런 그가 당 활동에 좀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지난 11월 5일 공식적으로 발족한 민노당 여성선거운동본부의 홍보위원을 맡은 것이다. 아직 많은 일을 한 건 아니다. 기자회견 때 얼굴을 비춘 것 정도가 전부다.

“어떤 식으로든 당에 도움이 되고 싶었던 차에 민노당으로부터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강화 공동체일 뿐 아니라, 만석동 아이들과 어른들 만나는 일도 계속 해야 하니까 시간이 많진 않지만, 글로써라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다고 했다.”

사실 김중미 씨가 진보정당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92년 총선 때였다. 그가 동료들, 아이들과 함께 꾸려가고 있는 기찻길옆 공부방(지금은 ‘기찻길옆 작은학교’로 이름을 바꿨다)이 있는 인천 만석동 주민들과 함께 민중당 후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뛴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우리가 만석동으로 들어간 지 5년 정도가 흐른 후였고, 지역주민들과의 관계도 어느 정도 신뢰가 쌓였을 때였다. 물론 그때 함께 한 사람들은 우리가 지지하는 후보의 당선을 목표로 뛰었지만, 우리는 그보다 마을 주민들에게 자신들을 대변해 줄 정당이 있다는 것, 공동체를 일구며 가난하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모여서 힘을 모으면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이룰 수 있다는 꿈, 정말 세상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는 꿈을 갖게 해주고 싶었다.”

정말 열심히 했다. 남자들은 밤 9시 30분까지 이어진 잔업을 마친 후에도 피곤함을 잊고 동네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일요일에도 특근을 빼면서까지 유세장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투표가 끝났다. 남은 것은 극심한 배신감.

“우리가 걱정했던 건 선거에서 지는 게 아니었다. 선거가 끝난 후 우리가 필요 없어진 정치인들이 나 몰라라 하며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실제로 선거가 끝나자마자 지역에 있던 민중당 사무실이 다 폐쇄되었다. 함께 한 남자 주민들에게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도 이길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다만 선거운동 하면서, 그토록 열심히 살았지만 나아지는 거라곤 없는 삶, 시골에서 빚더미를 짊어지고 야반도주할 수밖에 없었던 일들, 그 이유들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 좋았던 것이다. 집에 가서 아내들과 이야기하고, 지역 노조활동 하던 사람들과 사랑방을 만들어 모임도 가지면서 우리에게는 이런 것만으로도 희망적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걱정했던 대로 그들은 미련 없이 떠났고, 그리고 나서는 당의 얼굴들이 몽땅 신한국당으로 갔다. 그후 다시는 정치적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났지만 마을 사람들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그래서 92년처럼 마을 차원에서 민노당을 지지할 수는 없다. 김중미 씨 개인 차원의 지지다. 그렇지만 그는 미래를 본다고 한다. 언젠가 다시 함께 모여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미래를 말이다. 물론 민노당이 민중당과는 다르다는 전제하에서 그렇다. 민노당에 대한 기대는 아직 꺾이지 않았으니까.

“현실적으로 민노당도 한계가 있을 거라고 본다. 그러나 민노당은 이제 시작한 것이다. 룰라의 지지율도 처음엔 3.3% 아니었던가.”

상처받은 사람에게 필요한 쉼터를 만들고 싶다

김중미 씨가 인천 만석동에 들어간 것은 87년이었다. 가난을 강요받은 도시빈민들과 같이 살려고 스스로 가난을 선택했다. 지역운동을 하는 것과 만석동 주민이 되는 것은 별개가 아니었다. 이듬해부터 시작한 아가방의 이름이 공부방으로, 다시 (기찻길옆) 작은학교로 바뀌어 가는 동안 완전한 만석동민이 된 그에게 운동과 삶이 하나가 된 지 오래다. 그렇게 살아온 지 15년째, 그가 지금 있는 곳은 만석동이 아닌 강화군이다.

부부가 같이 강화로 내려온 건 작년 2월이라고 들었다. 인천 만석동을 뒤로 하고 강화에 새로운 터를 마련한 것은 그만한 고민이 있었기 때문일 텐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공부방 아이들 때문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서 갖게 되는 사회적 지위, 사회적 토대라는 건 거의 똑같다. 앞으로도 노동자가 되고 도시 빈민으로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달라지지 않는 현실이다. 그래서 이 아이들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아이들이 학교를 그만두는 경우도 많이 생기고, 집안 환경이 바뀌지 않으니까 아이들이 전망을 갖게 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농촌공동체를 생각한 건 그 때문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일할 수 있고,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서 꺾이고 쓰러졌을 때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경제적인 문제였다. 우리는 90년대 초반부터 경제공동체를 해보려고 애썼다. 미싱하는 엄마들과 의류하청일도 해보고, 농산물직거래조합, 쌀가게 등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그러나 모두 한계가 있었다. 많이 어려웠다. 우리 스스로의 자존이나 자립이 매우 중요한 상황에서 자본주의를 무시한 채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어려움이 농촌공동체를 생각하게 된 또다른 이유였다.

처음 시작은 그랬다. 그런데 IMF가 시작되면서부터는 달라졌다. 나름대로의 이유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명분이 아니라 생존이 중요해진 것이다. 아이들의 고통이 너무 컸다. 많은 아버지들이 직장을 잃었고 많은 엄마들이 집을 나갔다. 그전에는 장기적으로 일어났던 일들이 IMF 땐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버틸 힘이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몸과 마음을 쉬게 할 곳이 더욱 간절해졌다.”

공동체를 꾸린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토대를 놓는 단계에서부터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 지금 중점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직은 별로 없다. 우리가 그렇게 급한 사람이 아니고 공동체도 급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남편이 농사짓는 법을 배워나가고 있는 중이다. 올해는 땅도 조금 마련했다. 자리잡는 데 한 10년 걸릴 거라 보고 있다. 우리에게 떨어진 또 다른 일은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통폐합을 막는 것이다. 4개 학급이 당장 내년부터 복식수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것부터 막아야 한다. 여기서는 따로 공부방을 만들지 않고, 이 학교를 통해서 해보려고 한다. 이런 시골에서는 학교가 마을의 중심이다. 제도교육에 대해 회의를 갖고 있긴 하지만 일단 지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초등학교가 남아 있어야 한다.”

그의 집에는 만석동 작은학교 아이들이 계절별로 돌아가며 찾아온다. 2박 3일 동안 머물면서 쉬다 간다. 그는 그렇게 공동체를 가꾸고 싶어한다. 도시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와서 쉴 수 있도록.

그냥 함께 사는 게 좋았다

만석동은 인천에서도 가장 오래된 빈민지역이다. 그곳은 개항 뒤 밀려든 외국인들에게 삶의 자리를 빼앗긴 철거민들이 들어와 살았고,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피난민들이 터전을 잡고 살았다. ‘괭이부리말’이라 말하는 갯벌을 메워 그 위에 집을 지었고, 산허리에 움을 만든 뒤 나무토막을 세우고 가마니를 덮은 토막집을 짓고 살았다. 그곳은 항구에서 가깝기 때문에 일제시대부터 커다란 공장이 많은 까닭에 가난한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나마 돈이 있는 사람들은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을 얻어 살았고, 그조차 없는 사람들은 루핑이라는 종이와 판자를 가지고 손수 집을 지었다. 집 지을 땅이 없으면 시궁창 위에도 다락집을 지었고, 기찻길 바로 옆에도 집을 지었다. 그리고 한 뼘이라도 방을 더 늘리려고 길은 사람들이 겨우 다닐 만큼만 내었다. (『괭이부리말 아이들』 중에서)

87년 그가 만석동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서울만 해도 상계동 등 대규모 철거싸움이 활발하던 때였다. 지역운동은 철거싸움만이 아니라, 비철거 지역에서 센터 중심으로 뿌리를 내리고 함께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다는 판단하에 그는 친구 두 명과 함께 만석동 주민이 되었다.

지역운동 차원에서 만석동에 처음 들어갔을 때부터 공부방을 운동의 구심점으로 삼을 생각이었나.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냥 같이 사는 게 중요했다. 내가 빈민이 되고 내가 낳은 아이들까지 빈민으로 살게 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시작도 하지 말라는 선배들의 충고도 있었다. 딴맘 없이 그냥 고지식하게 사는 게 중요했다. 처음 아가방을 시작하게 된 건 처녀 셋이 동네에 들어가 할 일을 찾는데, 마침 한 친구가 유아교육과를 나와 유치원 교사를 하고 있어서 시작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도 많이 힘들었다. 그래서 신문배달도 하고, 한 친구는 공장도 다니면서 버텼다. 그러다 보니까 동네에 아이들이 너무 많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공부방을 생각했다. 아가방을 운영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들고, 마을에 남긴 남아야겠는데 방법은 없고, 또 그 사이 같이 들어갔던 친구들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두면서 내가 혼자 남아서 할 수 있는 일은 공부방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좋아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정말 좋아했다. 또 부모회도 자발적으로 모이면서 마을주민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15년이 지났다. 처음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선 자신뿐 아니라, 주민 조직을 바꾸고 아이들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는 아이들과 만나면서 그냥 거기서 사는 게 좋다고 한다. 현재는 만석동에 기본적으로 한 주에 두 번 가는 상황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그는 만석동 주민이다.

“내가 지역주민으로 뿌리내리고 살면서부터는 만남의 깊이가 달라졌다. 이제 재개발 문제는 도시빈민들의 주거 생존권 문제로 일반화되는 게 아니고, 내 삶의 자리가 사라지는 문제이고, 바로 옆집에 혼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문제이며, 공부방에 다니는 우리 아이들이 갈 곳이 없어지는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괭이부리말도 점점 도로를 낸다, 주거 환경을 개선한다 하면서 기찻길 옆의 판잣집들이 철거되었다. 시궁창이 복개되면서 시궁창 옆의 판잣집들도 사라졌다. 판잣집들이 헐리고 상자곽 같은 빌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파트 공사가 시작되었다. (『괭이부리말 아이들』 중에서)

만석동은 주거환경개선지구다. 지난 10여 년 동안 신축 빌라들이 만석동 주위에 들어서면서 동네 환경도 많이 바뀌었다. 게다가 올 12월부터는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선다. 판자촌에 살아온 만석동 원주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제 200여 가구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김중미 씨도 고민이 많다.

“재개발 때문에 주민들이 흩어지면 사람들의 시선에서 빈민들의 모습은 다 사라지고 만다. 그냥 아파트 속으로 칸칸이 들어가거나 그런 처지도 안 되는 사람들은 도시 변두리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이다. 사회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별적인 문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지금 주민들의 환경이 열악하다면 어떤 식으로든 개선은 되어야 할 것이다. 재개발의 폐해를 막으면서도 가능한 방법이 있는가.

“우리는 개발을 하되, 지역주민에게 맞는 개발을 해야 한다. 만석동도 아파트가 들어서면 부작용이 크다. 우리 동네 특성상 마늘이나 굴을 까서 먹고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파트로 들어가면 작업실을 만들어 줄 것도 아닌 상황에서, 삶 자체가 바뀌고 아무 일도 못 하면서 아파트 임대료만 내고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에 맞는 개발을 하거나,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 자체를 막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막는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다. 판잣집들을 사유지에 무허가로 지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냥 놔두면 영세 주택업자들에게 야금야금 먹힐 것도 불을 보듯 뻔하다. 대안을 찾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한 발자국 내딛는 것, 그게 희망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아이들에게 섣불리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이들의 상처가 너무 크고, 발버둥을 쳐봤자 미래가 뻔한 아이들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이야기하는 건 무책임한 것인지도 몰라서.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같이 아파하고 같이 있어주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그런데 『희망』의 내용은 전혀 희망적이지 않다. 희망을 쉽게 얘기하지 않는다면서, 오히려 절망적인 얘기를 하면서, 제목은 ‘희망’이라고 정했다. 어떤 희망을 본다는 것인가.

“희망은…. 희망을 왜 갈망하겠는가. 지금 절망하고 있기 때문에 갈망하는 것이다. 희망에 들떠서 살고 있으면 희망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희망을 놓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건 그만큼 희망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현실이 희망과 너무 멀기 때문이다. 『희망』에서의 희망도 마찬가지다. 아이와 엄마의 삶이란 것은 정말 바닥이다. 그게 더 절망적인 건 어쩔 수 없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건 한 발자국만 내디딜 수 있는 기운이 있으면 그게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석이와 엄마가 집을 나가는 행동, 현실을 얽매고 있는 사슬을 끊어버리는 것, 그게 희망이다.”

희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는 희망을 쉽게 ‘립서비스’ 할 수 없다. 그건 그의 깊은 곳에서 희망이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첫 작품 『괭이부리말 아이들』부터 최근작 『우리 동네에는 아파트가 없다』까지, 그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희망이다. 절망 속에 숨겨져 있기에 더 꿈틀거리는 희망. 그 희망을 조심스럽게 꺼내 보이며 아이들을 향해 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자신에 대한 자긍심을 좀 가졌으면 좋겠어. 네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데. 그래도 그게 안 돼서 뛰쳐나가도 그건 너의 몫이야.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언젠가 다시 돌아오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함께 사는 거야. 알았지?”

이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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