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06월 2003-06-01   921

‘눈물의 이라크, 나눔이 절실하다’

이라크평화팀의 바그다드 통신


참혹한 이라크. 바그다드 곳곳은 폭파된 채 널부러진 차들, 파괴된 도로들이 지난 전쟁의 폭격을 실감케 한다. 잠정적인 종전과 함께 잠시 무비자 상태로 열려 있던 이라크로 돌아가 3주간의 긴급구호와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평화운동가 임영신 씨의 현장보고를 듣는다. 편집자주

낯선 전쟁의 풍경들 사이로 미군 장갑차가 햇살 속에 빛나며 서 있었다. CNN은 이라크인들이 약탈하는 모습을 연일 보도했지만, 이면에 가린 장면은 총을 든 채 그 약탈을 방관하고 있는 미군들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집과 거리에서 죽어가지만 병원조차 지켜주지 않았던 미군은 박물관과 전기시설, 고아원마저 폭격하면서도 석유부만은 안전하게 지켰다. 이곳을 지나며 차를 운전하던 이라크인 기사는 말했다. “석유가 축복인지, 재앙인지 모르겠어요.”

죽어가는 이들과 산 자의 위험

폭격으로 단단히 막혀 있던 국경이 열린 4월 11일 무렵, 국경을 넘어 국제적십자는 전쟁보다 위험한 바그다드의 약탈 속에서 구호활동을 할 수 없다며 철수를 시작했다. 전쟁 중에도 그들은 요르단 국경인 루이쉴드에 수천 동의 텐트를 지어놓고 의료진과 의약품, 고단백 식량, 엄청난 식수, 39만 달러의 돈을 준비해 두고도 난민이 생기지 않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많은 돈과 의약품들이 아직도 국경근처에 쌓여있을 터이지만 여전히 죽어가는 자를 위해 일하기 위해서는 산 자에게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그들은 다시 국경을 넘고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남아 있는 적십자의 소수 관료들은 전기조차 쓸 수 없는 바그다드에서 자가 발전기를 가지고 에어콘이 나오는 저택에서 의약품과 식량 등을 싣고 들어오는 NGO들에게 창고를 대여해주며 돈을 벌고 있었다.

전쟁 중과 전쟁 후 약탈과 방화 때문에 모든 병원이 문을 열지 못하는 바그다드에서 폭격으로 죽어가는 이들을 맞이하고 병원 바닥의 피를 쓸어낸 것은 긴급구호의 명분만 내세우던 국제구호단체들이 아니라 박봉의 이라크 의사들이었다. 공무원인 그들은 한 달에 20달러도 안 되는 월급을 받는 일반 공무원과 똑같이 총을 들고 병원을 지키며, 총상을 입고 몰려오는 그들의 형제를 살려내고 있었다.

그들 곁에 머물렀던 단 한 사람의 외국인 의사는 전쟁 직전이었던 3월 17일 바그다드에 들어가 목숨으로 지키며, 사담 정형외과에서 헤드랜턴 하나에 의지한 채 하루에 3∼40명씩의 환자들을 수술해 온 프랑스 의사 쟈크였다. 그는 “정말 도움이 필요한 건 전쟁 중이 아니라 전쟁 후, 그리고 위험으로 아무도 이들을 돕지 않는 지금”이라고 말했다.

국제구호단체들의 두 가지 얼굴

전쟁 직후의 위험을 피해 모든 대형 국제기구가 빠져나가는 그 탈출의 행렬 속에 거꾸로 바그다드로 들어온 단체들도 있었다. 이탈리아의 20여 개의 단체 연대기구인 ‘브릿지 오브 바그다드(Bridge of Baghdad)’, 닥터 쟈크가 속해 있던 국제의료지원협회 ‘(AMI, Aid Medical International)’, 이라크계 미국인인 야룹 씨의 ‘재생과 개발을 위한 생명(Life for relife & Development)’, 국경 없는 의사회. 이들이 지닌 공통점은 조직 중의 적어도 한 사람이 전쟁 전에 이라크에 들어와 전쟁을 함께 겪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라크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암만에 머물던 다른 팀원들에게 알리고, 그들은 빠른 시간 안에 준비해 국경이 열리자마자 들어온 것이었다.

야룹 씨가 속한 조직은 12년 전 경제제재로 극도의 곤란을 겪던 이라크에 들어와 활동을 해 오고 있었다. 그들이 구입하는 모든 물품은 이라크 사람들이 직접 생산한 것이었고, 최대한 이라크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었다. 전쟁 중 알파나(국제평화활동가들이 함께 머물렀던 작은 호텔)에 머물렀던 시모나 역시 지원활동을 해 오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반전활동에 참여했다. 전쟁 직후에는 그녀의 단체 스텝들이 들어와 긴급한 지원이 필요한 곳을 찾기 위해 총성이 난무하는 사담시티(현재의 사우라시티) 같은 위험한 지역도 구석구석 조사를 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안전’보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전달하는 ‘나눔’이었기 때문이다.

전쟁 직후에 이라크 긴급구호 활동을 하던 단체들은 이라크 NGO협의체인 ‘NCCI’를 만들어냈다. 전화를 쓸 수 없어 직접 찾아가야 조사를 할 수 있고, 시간을 정하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야만 정보를 나눌 수 있는 상황에서 조사나 지원업무 중복을 피하기 위해 함께 정보를 나눌 협의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단체들은 4월 22일 첫 회의에서 협의회의 원칙을 만들었다. △경쟁적이 아닌, 협력적으로 일한다 △최대한 이라크 자원을 가지고, 이라크인들과 함께 일한다 △미군과 함께 진주한 ‘인도주의협회(Humaniterian Aid)’는 협의회의 멤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지막 조항은 논란의 대상이었다. 공격자의 양심을 위한 구호기관과 연대할 수 없다는 입장과 미군의 통제 하에서는 그들과의 정보교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 맞섰다. 결국 회의는 함께 하기로 했지만 곧바로 탈퇴의사를 밝힌 단체들이 있었다.

전쟁보다 깊은 사각지대

‘NCCI’는 사담시티와 시아파 120만 명이 살고 있는 뉴바그다드 같은 빈곤지역, 의료의 사각지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뉴바그다드에는 전후 모스크 내의 지역주민들이 힘을 모아 스스로 조직한 작은 진료소들이 있었다. 비좁은 사무실 안에 책상, 몇 개의 약이 전부인 그 가난한 진료소에는 레지던트, 군의관, 병원이 문을 닫아 돌아가지 못하는 의사들이 이웃들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의사가 하루에 300여 명의 환자를 맞이하는 진료소 앞에는 아이를 안은 수십 명의 어머니들이 가는 비를 맞으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실 곁 칠판에는 “약탈한 의약품들이 있다면 모스크로 돌려주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어느새 바그다드를 나온 지 열흘이 지났다. 남아 있는 반전평화팀원들과 보건의료연대에서 파견한 의료진들은 그 작은 진료소들에서 이라크의 젊은 의사들과 어깨를 맞대고 함께 일하고 있다. 이라크인들 스스로의 힘으로 그들 사회를 재건해야 하는 바그다드에 남아 함께 하고 있다.

이제 바그다드는 서서히 그 통곡이 잦아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팔과 다리를 잃은 알리의 그 가느다란 흐느낌, 온 몸에 화상을 입고 강아지처럼 사지를 파르르 떨고 있던 후세인의 그치지 않던 울음, 그 아름다운 얼굴이 짓뭉개져 죽어간 누이를 안고 미 군의관을 목놓아 부르던 한 오라비의 통곡, 미군을 상대로 매춘을 시작한 어린 딸을 보아야 하는 아버지의 탄식, 핵폐기장에서 붉은 플라스틱 통을 맨 손으로 씻어 가족들이 먹거나 마실 물과 쌀을 담아두던 가난한 마을의 어머니들. 그들의 신음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들의 신음 속에 이 전쟁은 아직 끝나지 못한 채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잃은 것과 그들이 빼앗긴 것, 그들이 흘린 피와 눈물, 고통과 신음을 심장으로 듣고 증언하는 일을 통해 그들의 고통을 나누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향해 심장에 손을 얹으며 “샬람”을.

“세상은 이렇게 끝난다 폭발이 아니라 흐느낌으로.”(T. S. 엘리어트, 『황무지』 중에서)

임영신 평화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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