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08월 2003-08-01   636

한국에 건강한 보수는 있는가

벼랑 끝에 선 수구의 발목잡기, 우리사회의 마지막 위기


“정의사회 구현”과 “국익”. 한국사회의 보수주의자들이 내걸어온 가치다. 하지만 이를 위한 수단과 철학은 척박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이 말하는 국익의 실체란 무엇인지, 이땅의 보수를 진정한 보수라고 말할 수 있는지 되묻게 된다. 보수에 대한 보수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편집자 주

한국 사회에서 보수주의를 정의하기란 간단치가 않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한국의 보수주의는 체계적인 이념이나 사상으로 정립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자신을 다듬고 단련시켜 오지 않은 결과이기도 하다. 냉정하게 말하면, 한국에 과연 보수주의 이념이 존재하는가, 하는 회의가 들 정도다.

거창한 대의명분 속에 감춘 수구적 지배욕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보수 집단은 국민 앞에서 떳떳하게 토론하고 국민의 정치적 선택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물리적 힘과 정략으로 자신의 지배를 강제해 왔다. 자신들의 뜻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거나 숙청함으로써 기득권을 유지해 왔다. 도전자에 대한 무자비한 억압과 고문, 언론 탄압, 학문과 사상의 규제 등으로 자신의 지배적 지위를 지켜왔던 것이다.

그러면서 내건 명분은 늘 국가안보요 사회안정이었다. 예를 들면, 5·16 군사쿠데타도, 유신쿠데타도, 12·12 쿠데타도 모두 국가안보와 사회의 안정을 그 이유로 내걸었다. 정치적 반대 세력을 구속하거나 고문할 때도 나라의 안녕과 질서를 운운했다. 기자와 학생을 구속하고, 교수를 강단에서 내쫓을 때도 질서와 안정을 이야기했다. 질서와 안정이 지고의 가치이기 때문이라지만, 질서와 안정이 무엇을 위해 필요한 지에 대해서는 답도 철학도 없었다. 안보와 국익을 위해서라고 이야기 하지만, 그것을 믿는 국민은 많지 않았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질서와 안정, 안보는 국익이 아니라 ‘그들만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많은 국민은 생각했다.

경제성장과 선진국 도약도 보수주의자들의 단골 메뉴였다. 예컨대, 재벌에게 온갖 특혜를 몰아주는 것, 달동네의 무허가 판자촌을 강제 철거하는 것, 무자비하게 산을 깎고 강을 오염시키는 것도 보수주의자들은 성장과 개발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거기까지라면 그래도 이해할만 한데, 어떤 때는 거창하게도 사회정의와 복지까지 내걸었다. 총칼로 무고한 광주시민을 학살했던 정권, 삼청교육이란 이름으로 무고한 시민을 짐승처럼 다루었던 정권도 출범의 변으로 ‘정의사회 구현’을 말했다. 모두가 보수주의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이들의 단골 메뉴였다.

그래서 한국의 보수주의에는 구미 사회에서 보편화된 이념과 전혀 관계없이 독특하게 따라다니는 이미지들이 있다. 보수주의의 이름으로 무엇을 내걸고 주장하는가는 별 의미가 없다. 그들이 내건 명분을 액면 그대로 믿는 이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폭력, 협잡, 술수, 강압, 권위주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돌진주의 등이 보수주의에 따라붙는 이미지들이다. 냉전질서와 흑백논리와 친미 사대주의도 보수주의의 이미지로 고착되어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한국의 보수주의는 보수주의의 가면을 쓴 수구인 것이다. 이념적 일관성이나 논리적 체계도, 인간과 사회와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권력으로 협박하고 뭉칫돈으로 로비하면서 자신의 이해를 관철시키는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선동하며 국민을 분열시키는 것은 이들의 대표적인 통치 기술이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변화를 거부하고 도전을 억압해 온 수구 노선인 것이다.

이런 수구 노선이 최근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 거시사회적 구조 변동이 수구 노선의 사회문화적 토대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는 세계적인 규모로 진행되어 온 냉전 질서의 해체다. 이제 반공과 반북, 전쟁 불사의 안보 논리 하나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짓밟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가속화되는 정보화 또한 권위주의적 억압이나 밀실야합의 관행 등에 우호적이지 않다. 위계적이고 폐쇄적인 조직운영으로는 정보화사회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화도 수구 노선을 걷는 자들에겐 위협이 아닐 수 없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요구하는 거대한 물결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세대 교체의 거센 파고도 수구 노선을 위협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물질적 풍요와 정치적 자유를 만끽하면서 자란 젊은 세대들에게 권력과 물질에 눈먼 수구 집단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추하고 불쌍한 기성세대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수구 노선은 더욱 노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애를 쓴다.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한반도의 냉전질서를 해체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들을 안보의 이름으로 매장하고 단죄하려 든다. 심지어는 대결과 냉전의 불씨를 되살리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위기에 처한 수구의 몸부림

전쟁 위기가 고조되어도 자신에겐 나쁠 것이 없다고 말하는 철면피 지도자를 보면 섬뜩해진다. 이쯤 되면 이들이 내거는 국익이란 분명 허구다. 오직 냉전질서 위에 기초해 있는 자신들의 이해를 지키는 것이 최고의 목표인 것이다. 이들은 복지 확대와 차별 해소, 사회세력간의 균형을 강조하는 정책 노선을 사회주의적이라고 색칠한다.

미국의 부당한 처사에 이의 제기하는 것을 마치 반민족 범죄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1960년대 이후 권위주의 정권과 유착해 엄청난 돈을 벌었으면서도, 불균형을 해소하고 복지를 확충하기 위해 정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것에 대해서는 좌파적이라고 비난한다.

벼랑 끝에 선 수구 노선의 험담과 발목잡기는 우리 사회가 평화와 상식의 공동체로 진입하기 위해 넘어야 할 마지막 고비이다. 이 고비를 넘지 못하면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소모적인 갈등과 퇴행을 반복하면서 소중한 국력을 소진하게 될 것이다.

최근에는 보수주의를 표방한 단체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 상에서 새로 조직되거나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어 주목을 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보수주의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온갖 야만과 퇴행에 놀라서 그런지, 우선은 걱정이 앞서고 불길한 느낌에 휩싸이게 된다. 물론 건강한 보수주의가 정립되어 진보 진영과의 합리적 경쟁과 토론이 가능해진다면 매우 환영할 일이다. 그러기에 새로 출범하는 보수주의 단체들에게 당부 좀 해야겠다. 건강한 보수로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두 가지만 당부를 하도록 하자.

수구와 결별하고 변화하는 건전한 보수로 거듭나야

첫째는 수구 노선과 과감하게 결별하라는 것이다. 예컨대, 반공과 반북을 주장하더라도 최소한 마녀사냥 하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분단과 냉전질서에 대한 집착을 넘어 끊임없이 대결과 증오를 부추기면서 심지어 전쟁 불사까지 외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강조하더라도 스스로 경쟁의 룰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자신뿐만 아니라 남의 자유와 인권도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도 있어야 한다.

사회적 책무를 기피하지 않으며 스스로에게 더욱 엄격할 수 있어야 한다. 돈을 뿌리거나 지역감정을 선동해 유권자를 동원하려 하기보다는, 합리적인 설득으로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로비나 청탁 대신 정책으로 승부하려고 해야 한다. 진보주의 노선과의 이성적인 토론도 회피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둘째는 변화하는 보수주의자가 되어 달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스스로를 변화시켜 가는 것은 가파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부디 좁은 우물 안에서 뛰쳐나와,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21세기 사회변화의 거대한 흐름을 껴안으면서 자신을 연마해 가는 보수주의자여야 할 것이다.

대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버리는 보수, 변화하는 보수주의자이기를 당부해 본다. 그런 건강한 보수주의라면 당연히 탓할 일도 경계할 일도 아니다.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도 보수주의가 제대로 터를 잡아 합리성과 건강성을 갖춰 주기를 기대해 본다.

홍덕률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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