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09월 2004-09-01   1806

사람 숫자를 헤아리는 양수사 속에 숨어 있는 신분차별

현대사회에서 인종이나 성, 종교, 계급이 다른 사람들이 모두 평등한 ‘인류’라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근대 사회에서는 인간은 평등한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서양의 노예나 동양의 노비는 결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동물이나 물건처럼 거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동아시아의 전근대 사회에서 노비(奴婢)는 사내종을 일컫는 노(奴)와 계집종을 일컫는 비(婢)를 합쳐서 부르는 말이었다. 당연히 사람의 숫자를 헤아릴 때도 신분제적 차별이 언어에 반영되었다. 광개토대왕 비문이나 일본 도오다이사(東大寺) 쇼소원(正倉院) 중창(中倉)에서 발견된 신라장적(新羅帳籍)을 보면 천민계급이 아닌 평민 이상의 계층은 ‘인(人)’이라는 단어로 그 수효를 헤아리고, 노비와 같은 천민들을 ‘구(口)’라는 양수사를 단위로 숫자로 표시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분재기(分財記)나 조선왕조실록, 경국대전 등에도 노비를 세는 단위는 변함없이 구(口)로 나타난다. 반면 관청에서 근무하는 벼슬아치나 양반 사족들을 나타낼 때는 ‘원(員)’이라는 양수사를 썼고, 일반 평민은 ‘인(人)’이라는 양수사를 썼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인구(人口)’라는 단어에는 이러한 신분차별의 역사가 숨어 있다.

지금은 사람 숫자를 헤아릴 때 신분에 관계없이 ‘명(名)’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명(名)’이라는 양수사는 신분제를 극복하여 인간평등의 개념이 보편화된 근대사회에 이르러서야 널리 쓰이게 되었다.

한편 노비제도는 1801년(순조 1)에 관청의 공노비(公奴婢)가 해방되고, 1894년(고종 31)에 사노비(私奴婢)가 해방됨으로써 법제상으로는 사라졌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사람을 차별하는 용어들이 남아 있다. 신분이 높거나 재산이 많은 사람은 ‘님’이나 ‘분’으로 대접을 받고 있고, 외국인 노동자나 동성애자 혹은 장애인 같은 소수자들은 ‘놈’이나 ‘년’이나 ‘새끼’로 불리고 있다.

언어는 현실을 반영하여 시대에 따라 변한다. 사람의 숫자를 헤아리는 양수사 속에 숨어있는 신분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억압받고 소외받는 소수자들이 모두 다 평등한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박상표 수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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