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09월 2004-09-01   509

망각 속의 기억을 자극하다

『외면』(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열린책들)


당신이 낯설고 멀리 있는 무언가에 무작정 끌린다면, 혹은 무엇인가를 그리워하고 언젠가 그것을 탐험해 보리라 마음먹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당신에게 ‘낭만적 기질’이 다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당신이 ‘2년 전 우연한 기회에 고민 없이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당신 속의 낭만적 기질이 이끄는 대로 대책 없이 행동했다고 고백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낭만적’의 사전적 풀이는 대충 ‘현실적이 아니고 환상적이며 공상적인’ 정도일 터입니다. 당신처럼 무작정 파리행 비행기에 올라탈 만큼 용감하진 않다고 하더라도 환상과 공상 속에서 파리를 혹은 그 언저리를 수없이 배회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요컨대 당신과 나를 이어주는 보기 드문 공통의 문화 코드 중 하나가 파리일 수 있다는 이야기이지만 또 한편 그것은 굳이 파리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물론 문화적 편력에도 유행 같은 것이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파리는 당신과 나를 끌어당기기에 충분한 그 무엇입니다. “게으른 산책자만이 파리의 진정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에드먼드 화이트의 역설은 그래서 더욱 유혹적으로 들립니다. 목적 없는 산책, 그것이 내포하는 자유와 꿈은 당신과 내 속의 기질을 너무나 잘 표현한 것이며, 어느 날 문득 이곳을 외면하고 머나먼 어떤 곳으로 무작정 길떠나게 할 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오늘을 있게 한 고래로부터의 삶의 한 양식이기도 하고 어쩐지 현실로부터의 도피라는 말보다 더 정감있게 들리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 『외면』은 이렇게 당신이 길을 떠날 때 동반하기에 적합한 책입니다. 어쩌면 길을 떠나도록 부추기는 책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첫 장을 펼치면 비행기 혹은 기차나 버스 여행의 지루함을 완전히 잊게 해 줄 것임을 장담합니다. 마치 순전히 소낙비를 피하겠다는 마음으로 취리히의 어느 사진 전시장에 들르게 된 주인공이 그곳에서 마주친 한 장의 사진 때문에 20여 년 전 머나먼 산티아고의 집, 라칸텐 거리 20번지로 돌아가는 것처럼, 당신을 지금 여기를 떠나 당신 기억에서 사라졌으나 세포 속 어딘가에 고스란히 남아있을 어떤 곳으로 들어서게 할 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싫지 않은 경험이라고 일반화할 수야 없겠지만 고백하자면 이 첫 번째로 배치된 소설이 가져다 준 한 순간의 기억이 나를 이 책의 끝까지 이끈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친 김에 첫 편의 이야기를 더하기로 하지요. 10대 시절이란 얼마나 길고 지루하던가요. 20년 전 산티아고나 서울 혹은 그 밖의 어떤 곳에서 10대를 보낸다는 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른 세계에 대한 동경, 더디게 가는 시간, 이성에 대한 호기심, 친구에 대한 맹목적인 헌신과 믿음이 한 데 어우러진 그 어지러운 시기를 아무 일 없이 지나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짐작하는 대로 주인공은 목숨까지 내놓을 만큼 어디나 몰려다니는 친구 둘과 함께 주말 파티에 참석하다가 이사벨이라는 미지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함께 추었던 유혹적인 춤, 담배와 폰체 냄새, 낡은 음악 그리고 약속. 그러나 이후 다시는 이사벨을 만나지 못합니다. 다시 찾아갔으나 그 날 밤의 리칸텐 거리 20번지의 청동문은 이후 취리히의 전시장에서 사진으로 마주치기 전에는 결코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주인공이 마음대로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진실을 이사벨이 가장 아름답게 부정한 것일까라고 반문하는 20년 후의 그 날까지 말입니다.

이어지는 몇 편의 글들 역시 먼 망각 속의 기억을 더듬습니다. 어린 소년이 동승한 살인자에게 느끼는 두려움과 소년다운 연민, 회교승인 체 하던 재주꾼이 친구의 권유로 검을 삼키고 죽은 이야기, 문명의 이기인 자동응답기에서 빌린 목소리가 쏟아내는 독설은 작가가 왜 이 글들의 부제로 ‘사람들을 외면하다’라고 했는지 당신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짐작컨대 칠레라는 나라는 우리만큼이나 역사적 부침이 심했던 나라인 것 같습니다. 17번째 글인 「톨라의 기록」과 24번 째 글 「전장에서의 밀회」와 같이 다섯 개의 부제를 구성하는 총27편의 글들은 더러는 직접적으로 더러는 에둘러 칠레 역사의 어떤 면들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다만 그 담아내는 솜씨는 루이스 세풀베다라고 하는 작가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경험, 그리고 문학적 상상력에 기대는 바 클 것입니다.

흔히들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표현합니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불분명한 이야기들이 당혹스러울 때도 있고 또 한편으로 색다른 경험으로 신비감을 주기도합니다. 「탈선」은 아마 후자의 느낌이 강한 작품으로 묘한 여운을 주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이제 「솔로르사노 부인에 대해 말해 주마」에 대해 언급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프라하의 헌책 방에서 발견한 책 첫 장에 선물하기 위해 쓴 글이 솔로르사노 부인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확인시켜 줄 줄을 30년 전에야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모두가 노인이 상상으로 지어낸 이야기 정도로 생각했던 사랑이 ‘책처럼 망각의 밤을 딛고 살아남았으며’ 30년 뒤 프라하 거리에 그 사랑의 존재를, 못 이룬 약속을 증언케 하려고 주인공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었을까요. 현실과 상상이란 어쩌면 삶을 이루는 양 축이며 당신이나 나나 그것에서 비껴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작가는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책을 덮은 지금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신과 내가 지금 이 삶에서 경험하는 것들이 어쩌면 모두 꿈이고 환영이며 깨어나면 전혀 다른 누군가로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말입니다. 어쩌면 그런 기대, 그런 바람들이 당신과 내 속에 늘 도사리고 있어 언젠가 낭만성이라는 기질에 기대어 멀리 밖으로 튀어나올 때만을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땐 주저하지 않고 떠나게 될까요? 그곳이 파리든 산티아고든 혹은 투발로든 아니면 더 먼 곳이든 말입니다.

이지은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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