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10월 2004-10-01   946

시끄러운 세상 한복판에서 더 빛나는 ‘평정심’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최민희 사무총장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곳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어느 회의장이었다.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 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 사회자와, 자기가 말한 토씨 그대로 결론이 나야한다는 믿는 참석자들 때문에 곤혹스럽기 그지없는 자리였는데, 갑자기 손을 들고 발언을 신청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회자의 무능과 참석자들의 비생산적인 토론방식을 나무란 후 마침내 그 지루한 토론을 종료시켰다. 더 신기한 것은 아무도 그의 오만하다면 오만하다 할 수 있는 발언에 토를 달지 않았고, 오히려 그 힘겨운 논쟁에서 해방시켜준 그에게 고마워하고 있는 듯 했다. 순간 나는 그가 마술사처럼 보였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이하 민언련) 최민희 사무총장이 그 마술사다. 요즘 그는 여러모로 사람들의 관심 속에 있다. 조선일보를 위시한 보수진영에서부터 좌파진영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언에 시비를 안 거는 사람이 없다. 논쟁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지금껏 걸어온 길을 언제나처럼 그저 묵묵히 가고 있는 그를 만났다. 대뜸 “요즘 시국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부터 던졌다.

피로하다고 논쟁 회피하면 머지않아 탈진현상 온다

최민희(이하 최) : 지금 시국은 ‘수구 기득권 세력 대 범개혁 세력’간의 대치 전선이 확실히 자리잡은 시기라고 봅니다. 최근 노무현 정부가 국가보안법 폐지를 정책으로 내세운 게 수구기득권 세력과의 전선을 분명히 하는데 일조한 측면이 있지요. 이는 노 정부의 정권유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은 하되, 근본적인 동기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지요.

박영선(이하 박) : 국가보안법과 과거청산 등의 문제로 범수구진영과 범개혁진영의 대항 전선이 명확해졌다고 말씀하셨는데요. 탄핵국면을 겪은 국민들은 이런 상황을 무척 피곤해 하는 거 같아요. 매일 전쟁터처럼 벌어지는 보수-개혁간의 기싸움에 국론분열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주장의 옳고그름을 따지기 전에 이런 논쟁구도 자체에 염증을 느끼는 국민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을 거 같은데요.

: 물론 누구에게나 정서적으로 느끼는 피곤함은 있을 거예요. 그런데 과연 과거청산이나 국보법 개폐가 왜 논란이 되는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다른 나라의 경우, 잘못된 과거가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보수인사들이 앞장서서 과거청산을 주도하는데, 우리의 경우는 한나라당이 자신들의 구린 경력 때문인지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면서 정쟁으로 이끌잖아요. 여기에 일부 언론들이 동조해서 정쟁을 부추기고요. 사실 국보법 폐지 문제도 인권침해 근원인 법을 먼저 없앤 다음 대북한관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차분하게 논의하면 되거든요. 저는 현재의 혼란이 시민사회가 민주적 의제를 던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를 받아들이는 수구기득권 세력의 대응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 논쟁을 지켜보는 국민들이 비록 피로를 느끼더라도, 지금 해결하지 못하면 언젠가 몇 배는 더한 탈진현상을 감내해야 할 지도 몰라요.

: 최근 <인물과사상> 9월호의 ‘노정권과 시민단체들 유착, 혹은 상생?’ 같은 글에서 제기하는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그 글이 제 말을 왜곡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필요한 비판이었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도 “혹시 내가 정말 그랬었나” 하고 반성해 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응을 안 한 것이고요. 사실 운동을 하다보면 실용적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잖아요. 그 동안 실용적인 선택으로 인한 고민에 대해서는 좌파나 민중운동 하시는 분들이 늘 경각심을 일깨워 주셨으니까 지적 자체에 대해서는 섭섭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글을 읽으면서 진보개혁진영조차도 알게 모르게 조선일보식 사고패턴을 닮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굉장히 아프게 다가왔지요.

: 마치 군부독재와 싸우면서 그렇게 비판해 왔던 군사문화가 운동사회 내부로 많이 침윤돼 들어갔던 것처럼 말이지요.

: 그렇지요. 예를 들어 파병철회 운동 과정에서 노무현 퇴진구호를 내걸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을 때, 퇴진구호가 과연 파병을 철회시키는 데 유용한 전술인지 문제제기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런 주장에 대해 너는 ‘노빠’라서 그렇다고 해 버리면, 더 이상 논의가 안 되는 거잖아요.

: 지금 정기국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많은 사회운동진영에서 입법안을 줄줄이 내놓고 있고요. 열린우리당의 역할이 관건인데요. 실망스럽다는 평가가 일반적입니다. 총장님께서는 열린우리당이 개혁적 정체성을 갖고, 개혁성향의 의원들이 최대계파를 형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해 오셨는데, 그 말씀은 계속 유효한가요?

: 열린우리당에게 의회에서 개혁을 할 수 있는 의석을 만들어 준 국민들 뜻은 쓸데없는 장외투쟁이나 사회적 논란 없이 조용히 개혁을 추진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개혁세력이 뿔뿔이 흩어져 있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정책적으로 확고한 개혁적 입장을 견지한 최대의 개혁계파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개혁은 어렵다고 봐요. 한국정치의 암적 존재였던 인맥중심의 계보정치를 재현할 수 있단 우려 때문에 정당한 계파를 만드는 것조차 꺼리고 있지요. 하지만 저는 열린우리당 내 누군가가 개혁 계파를 모아내는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열린우리당에 대한 기대요? 잘 할 거란 기대를 한다기보다는, 열린우리당이 제대로 못하면 최소한의 개혁도 물거품이 될 거라고 보기 때문에, 열린우리당에 대해 개혁 정체성을 분명히 하라고 계속 촉구하는 거구요.

‘엄마의 마음’으로 민언련 이끈 만능아줌마

민언련이 깃발을 내건 지 벌써 20년째다. 민언련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역사적으로 민언련의 역할은 대단했다. 6월 항쟁의 기폭제로 평가받는 월간 ‘말’뿐 아니라, ‘한겨레신문’, ‘오마이뉴스’ 등이 모두 민언련의 산파 역할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 ‘조선일보’의 영향력이 줄고 있는 것도 신문시장 정상화나 안티조선운동 등 언론개혁운동을 집요하게 펼쳐 온 민언련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숨차게 달려온 민언련의 주역으로서 그의 소회를 물었다.

: 20년…. 오래됐죠.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눈앞에 닥친 일 열심히 하고 결과에는 크게 연연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이만큼이나마 왔다 싶어요. 민언련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아닌 해직기자, 교수로 구성됐어요. 그래서 조직 갈등이 많았어요. 조직을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운 짐이었습니다. 제가 엄마의 마음으로 조직을 관리하지 않았으면 민언련이라는 조직이 깨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많은 어려움 때문에 고통스럽긴 했지만 그냥 참고 해낸 거죠. 그런 과정을 극복하고 나니까 진짜 고진감래가 되더라고요.

: 참여연대 회원들도 언론개혁운동에 관심이 매우 높습니다. 회원들의 총의를 모으는 자리 때면 언론개혁운동에 앞장서라는 주문이 빗발치는데, 참여연대에 서운한 건 없으세요?

: ‘조선일보’의 ‘권력 멀리해야 할 단체가 돈 받고 낙선운동’이란 기사 건으로 참여연대가 총선연대 가입 단체들과 함께 소송을 제기하면서 “이제는 가만두지 않겠다”고 선언한 마당에 뭐가 서운하겠어요? (웃음)

: 그런데 ‘조선일보’를 위시한 언론들은 왜 그렇게 민언련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건가요?

: 과거 80년대까지는 언론이 수구기득권 카르텔의 종속변수였는데, 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서서히 주요변수로써 작용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한나라당과 기업들이 우왕좌왕하는 반면, 좬조선일보좭와 일부 보수언론들이 사회적 의제를 적극적으로 이끌고 있는 상황이지요. 사실 과거나 지금이나 민언련의 하는 일은 똑같은데 최근 들어 수구세력들의 집중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은, ‘안티조선’ 같은 민언련 활동이 수구기득권 세력의 이데올로그 조선일보와 맞서 싸우는 첨병처럼 돼 버렸기 때문이죠.

학생운동, 감옥, 노동현장, 야학이라는 ‘전통적인(?)’ 사회운동 경로를 거쳐 월간 좬말좭 기자를 지낸 그가 지금은 언론개혁운동의 상징처럼 되어 있지만, 그의 ‘사정권’이 언론계에만 국한 된 건 아니다. 그는 『창작과비평』을 통해 정식으로 등단한 소설가이기도 하고, 『황금빛 똥을 누는 아이』, 『해맑은 피부를 되찾은 아이』등의 책을 펴낸 자연요법 운동가기도 하다. 이 책들은 10만 부 이상 팔렸고, 그는 주부들이 주 대상인 문화센터 강좌의 인기강사다. 바람과 물, 소금, 신선한 채소 등과 함께 자연의 순리에 따라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모임인, 그가 운영하고 있는 ‘수수팥떡(아이들을 사랑하는 어머니들의 모임, asamo.or.kr)’은 지난 총선 때 ‘아줌마총선연대’까지 만들어 아줌마들을 ‘의식화’시켰다.

: ‘수수팥떡’이 사단법인으로 전환한다고 들었는데요. 보금자리를 만들 기금도 현재 1억5천여 만 원 정도 모으셨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놀라웠습니다.

: 『황금빛 똥을 누는 아이 인세』와 물품수입, 공동구매 수입 등을 모두 합치니까 1억5천쯤 되더라고요. ‘수수팥떡’은 더 키워야 해요. 아줌마들을 더 끌어내야죠. 잠자고 있는 주부들의 역량을 끌어내는 게 중요하니까요.

: 자연요법에 관심을 가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 92년도에 장기수 한 분과 인연을 맺었는데, 그 분의 치료과정을 지켜보면서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 때 이후 민족생활의학회에서 난치병 환자들과 만나면서 자연건강법을 익혔지요. 제 큰애가 어릴 적에 너무 아팠는데, 자연요법으로 치료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이런 것을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구요.

: 그렇게 많은 역할을 해내시면서도, 언제나 기운차 보이세요.

: 자기관리에 철저한 편이에요. 평소 술담배 안하고, 식사 규칙적으로 하고, 이게 가장 중요한 건데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해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가만히 보면, 내가 책임져야 할 몫과 다른 사람이 책임질 몫이 따로 있거든요. 그런데 보통 남의 몫까지 대신 고민하다보니까 기분이 더 나빠지게 되는 거예요.

참 태평스럽다. 세파에 시달리는 나이가 되면 유독 ‘평정심’이란 말에 집착할 정도로 심성이 절로 흐트러지기 마련인데, 그는 “‘자기(自己)’같은 건 없다”고까지 말하면서 복잡하기 그지없는 현실을 스스로 평정시키고 있었다. 나도 그처럼 밤마다 논어나 불경, 성경을 곁에 두면 그럴 수 있을까?

박영선 참여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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