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10월 2004-10-01   2346

과거청산의 현재적 의의

과거사청산에 대한 정치권의 논의가 더욱 뜨거워지고 최근 국가보안법 개폐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치닫고 있는 현 시점, 과거사청산의 필요성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방향설정은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본다. 편집자주

지난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통령은 과거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인권침해 사건들의 진상을 밝힐 법 제정을 제안했다. 예상된 것이지만, 제1야당은 오랫동안 과거청산의 요구를 회피하다가 여기에 친북 용공행위를 포함시킬 것을 요구했다. 몇몇 언론들은 ‘과거로의 퇴행’ 또는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의 ‘국력낭비’를 내세워 이에 반대하면서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시민단체들을 ‘홍위병’으로 매도하고 있다. 이때문에 오랫동안 지연되어 온 과거청산 문제가 과연 이번 가을에 매듭될 수 있을지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은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어느 정도 이루었으나 정의가 굳건히 살아 숨쉬는 문명사회에 이르지는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이처럼 과거청산으로 불려온 역사적 정의 세우기가 계속 지연되고 흐려진 까닭이다.

과거청산, 세계적 흐름과 함께 해야

세계 2차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과거청산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 과제였다. 나치하 유태인학살이나 2차대전 전범들의 재판을 비롯하여 각종 형태의 대량학살과 인종차별 등 인도적 범죄에 대한 국제적 심판이 줄을 이었다. 이런 과거청산의 물결은 새로운 국민국가의 건설과 야만적 세계질서를 보다 문명적인 것으로 바꾸려는 인류사적 각성의 결과였지만, 탈식민화 과정에서 들어선 냉전체제는 전지구적 차원의 과거청산에 새로운 암초가 되었고, 세계 곳곳에서 또 다른 ‘청산되어야 할 과거’를 낳았다. 정통성이 취약한 군사독재정권들은 새로운 방식의 국가폭력을 통해 수많은 불법과 불의를 자행했으며, 세계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에 자행된 민족청소도 인류사적 재앙의 하나였다. 이 때문에 과거청산의 두 번째 물결이 1990년대 민주화의 세계적 이행기에 터져 나왔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과거청산의 과제도 사실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세계사적 흐름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사회학적 시각에서 본 과거청산

과거청산을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면 과거청산의 주체와 대상, 그것이 제기되는 맥락과 동기, 방법과 의의 등을 포함하는 정치사회적 배경을 포착해야 하고 그리고나서 과거청산의 보편적 원칙들을 검토해야 한다. 과거청산의 문제를 역사사회학적 시각에서 분석한다면,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포함될 것이다.

첫째, 과거청산은 특정 역사적 시점에서 발생된 과거의 부정적 유산을 바로잡는 것으로, 청산되어야 할 부정적 유산과 그에 대신하여 새롭게 세워져야 할 긍정적 경험을 동시에 포괄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과거청산은 청산과 복원의 유기적 통일과정이다. 복원은 없는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민중적 시민적 경험을 기초로 한 기억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복원은 사건이 발생했던 과거의 인식 위에서가 아니라 복원이 이루어지는 시점의 변화된 역사적 인식을 토대로 진행된다.

둘째, 청산은 인적 차원과 제도적 차원, 또는 사회체제적 차원에 걸쳐 있다. 흔히 과거 청산을 인적 청산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인적 청산은 그 자체 목적이 아니라 중대한 인권침해를 낳는 제도나 사회체제의 구조적 조건을 바꾸는 수단적 위치에 있다.

셋째, 청산은 보복이 아니라 화해를 본질적 조건으로 한다. 미래를 위해 과거를 청산하는 것이지 일부 정치세력의 승리의 축배를 위해 또는 현재의 권력투쟁을 위해 청산하는 것은 아니다. 청산과 복원은 사회의 야만성을 제거하고 인간성이 구현되는 문명의 실현을 지향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과거청산은 사회 체제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

넷째, 과거청산은 대상 뿐 아니라 주체의 문제를 수반한다. 청산의 주체는 가장 큰 희생자, 또는 이들을 대변하거나 계승한 정치사회적 집단이 되어야 한다. 청산의 대상이 동시에 청산을 부르짖거나, 주체로 나설 경우 그 청산은 왜곡되며, 청산자체가 차후에 청산대상이 된다. 또한 가장 큰 희생자집단을 제3자로 방치하거나, 또는 단지 수혜자로 위치시키는 경우 이 청산은 또한 불완전하게 된다.

다섯째, 청산은 역사적 당위로 제시되지만,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항상 정치적 기회구조의 변수이다. 청산의 대상이 되는 집단이 강력할 경우 격렬한 권력투쟁을 수반한다. 역설적이지만, 청산대상이 이미 사회적 재생산능력, 또는 정치사회적 권력을 상실했을 경우 청산의 역사적, 정치적 의미는 감소된다. 청산과 복원은 사회체제의 변동을 유발하거나 그 자체이다.

과거청산의 근본목적은 ‘진실규명’

과거청산은 이처럼 다양한 차원과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과거청산의 문제를 검토하려면 과거청산 원칙의 이념형적 모델을 상정하여 현실적인 조건과 목표 속에서 정책적 함의를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과거청산은 ‘진실규명’과 ‘정의구현’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을 단계로 생각할 수도 있고, 유형이나 방법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과거청산의 수위나 방법은 과거에 저질러진 부정의 성격 그리고 현실정치적 조건이라는 변수에 따라 달라진다. 진실고백 후 사면 방식은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정치권력의 배분 상황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볼 때 과거청산의 일반 원칙은 비교적 늦게 정립되었다. 1992년 7월 테오 반 보벤은 유엔에 제출한 특별 보고서에서 중대한 인권침해사례의 배상(reparation)형태로, 현금 또는 그와 유사한 형태의 배상, 사실규명과 진실의 공개, 책임의 공개적 인정, 책임자 처벌, 희생자와 친척 또는 증인들의 보호, 기념과 애도의 표시, 희생자 지원기구 설립, 재발방지조치 등을 규정했다.

한국의 경우 이에 못지 않는 과거청산의 이념형적 모델을 정립했는데, 그것이 바로 광주모델이다. 1980년대부터 약 20년간 지속된 ‘5월운동’의 과정에서 정립된 ‘광주문제 해결 5원칙’은 한국형 과거청산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광주문제 해결 5원칙’은 비록 특정 역사적 국면에서 정립된 것이지만, 매우 보편적인 원칙을 담고 있다. 이 5원칙은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배상, 명예회복, 정신계승을 위한 기념사업으로 구성된다. 이 5원칙을 다시 정리하면, 진실규명과 정의구현이라는 두 가지 원리로 집약되며, 본질적 선결조건은 진실규명이다.

무엇을,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한국현대사에서의 과거청산은 한편으로 부정적 역사의 극복을 위한 지속적 사회운동의 맥락에서 전개되므로 청산의 사례들간에 연속성을 갖지만, 동시에 사회체제의 중층성, 즉 군부 권위주의와 상응하는 민주주의라는 지평과 분단체제와 상응하는 자주와 평화의 지평의 차이로 인해 단절성을 갖게 된다. 이런 차이들은 보다 근본적으로 세계체제적 시간의 지평 속에 놓여 있는 한국사회의 중층적 모순구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과거청산의 주요 내용은 첫째, 일제 지배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 둘째,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문제의 진상을 밝히는 것, 셋째, 군사독재시절의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피해를 원상회복시키는 것이다.

과거청산은 피해자나 희생자 집단이 문제를 제기하고 시민사회가 이를 받아서 추진하는 아래로부터의 길과 국가기구가 주도적으로 과거의 문제를 조사하고 처리하는 위로부터의 길이 있다.

과거청산의 한 방법으로서의 국가기관들의 고백은 실추된 국가기관의 권위를 회복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단기적으로는 혼란이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시민의 신뢰를 받는 국가기구가 되려면 과거와 단절하는 의례가 필요하며, 그 의례는 마땅히 과거의 잘못을 명명 백백히 고백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제대로 된 청산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양자가 한편으로는 견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협조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독립성과 조사권이 보장된 기구가 필요하다.

이 때 쟁점은 과거청산의 조사대상을 확정하는데 있어서 지위중심 접근과 행위중심 접근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과거청산의 이른바 연좌제 효과를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가의 문제가 될 것이다.

필자는 ‘오래된 과거’와 ‘가까운 과거’의 해결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가까운 과거의 경우는 정의구현을 지향하는 방식이 불가피하나 오래된 과거의 문제는 진실규명에 치중하는 것이 옳다.

한국의 과거청산, 시민사회 공론화 통한 합의가 중요

그동안 한국의 시민운동은 정치권력의 민주화와 시민적 권리의 옹호를 중심으로 활동해왔고, 과거청산의 문제에 대해서는 둔감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사회처럼 과거사가 현재의 문제와 긴밀하게 얽혀 있는 경우, 시민사회가 과거청산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처럼 보수가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 극단으로 치달음으로써 진보와 거리를 크게 할 경우 사회의 양극화의 위험이 발생한다. 따라서 시민사회가 공론의 활성화를 통해 과거청산의 수위나 방법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시민사회의 합의가 있을 때만 과거청산이 가능하고 유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한국사회를 추동시킨 힘으로써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최종적으로 과거의 불의와 불법을 바로잡아 정의가 살아 숨쉬는 문명적인 시민사회의 건설을 통해 최종적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과거청산은 일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한 지속적 노력, 즉 역사복원운동을 통해 수행되며, 이 과정에서 얻어진 경험 또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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