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10월 2004-10-01   898

[인터뷰] 독재정권 바로잡기에 앞장서

유신정권시절 인혁당 조작사건에 항의하다 강제 추방된 제임스 시노트 신부


인간의 삶과 죽음도 피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긴 하나 그 갑작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죽음은 늘 충격과 함께 닥쳐온다. 1975년 4월 9일. 그날의 어떤 죽음들도 정말이지 충격이 아닐 수가 없다. 이른바 ‘사법살인’이라 일컫는 ‘인민혁명당 재건위 조작사건(이하 인혁당)’에 연루된 사형수 8명이 대법원의 사형 확정판결이 있은 지 20시간 만에 형이 집행된 날이었다.

고문과 공판기록 변조 등으로 조작.은폐된 인혁당 사건을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조작이라 항의하고 세상에 알린 것은 외국인 제임스 시노트 신부와 조지 오글 목사다. 이로 인해 이들은 얼마 후 한국정부로부터 강제출국 당했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들은 1975년 본국으로 추방당해서도 30년 가까이 유신정권의 실상을 알리는데 온 힘을 쏟았다. 2002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해외민주인사 초청으로 한국에 다시 돌아온 76세의 시노트 신부(세례명 진 야고버)는 현재 서울 장곡동 메리놀 외방전교회 한국지부 상주 사제로 있다. 시노트 신부를 만나 당시 상황 등을 들어보았다.

유신시절 인권운동가 시노트 신부

멀고 먼 데서 한국에 눈길을 돌린 이방인 시노트 신부의 한국행은 6.25전쟁에 대한 불편한 마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1952년 군대생활 할 때 6.25 한국전쟁이 한창이었지요. 한국이 일제 침략의 아픔을 겪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인데, 저는 참전하지 않았지만 한민족끼리의 불가피한 전쟁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었어요. 그리고 얼마 후 한국을 방문하게 됐어요.”

1960년 8월 선교차원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시노트 신부의 나이는 31세. 전기공급도 안되고, 수돗물도 나오지 않는 낙후된 섬마을인 인천의 영종도 외 8개의 섬을 돌아다니며 선교활동과 의료봉사활동을 벌인지 15년째 되던 해, 유신정권의 조작사건에 휘말려 불편부당한 삶을 살아오게 된 배경은 이러했다.

“처음엔 조금이라도 더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면 좋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단순히 도와주는 게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서 도움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고 나니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억압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보이더군요.”

그 후 시노트 신부는 오글 목사와 함께 동아일보의 자유언론 실천운동, 인권운동 등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을 되찾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는 하실 말씀이 많으시죠?”

“처음 인혁당 사건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구속 기소된 관련자들의 가족들을 통해서였어요. 힘들어하는 그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봤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어요.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순 없었어요. 항의시위를 하고, 국제사면위나 미 하원 인권위에 진상 조사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무고한 그들은 19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노트 신부는 사형 당일인 4월9일을 ‘very very very bad day(아주 좋지 않은 날)’라고 말했다.

추방 당해 본국인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인터뷰나 번역을 통해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런던타임즈 등 해외통신사에 인혁당 사건 등 박정희의 실상을 알리다 감옥생활도 여러 번 했다.

“장준하 선생이 산에서 추락사 했다는 얘기를 듣고 또 박정희가 또 무슨 짓을 저질렀나 했죠. 워싱턴에 있는 한국대사관에 항의하러 가서 ‘장준하 선생을 위해 기도하러 왔습니다’ 했더니 경찰이 사지를 붙잡아 절 던져버렸어요. 순간 지난 75년 한국에서 당했던 일이 생각났어요. 그리고 주변사람들에게 진 신부는 공산당이니 가까이 하지 마라고 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국가보안법, 당연히 폐지돼야죠!!

시노트 신부는 중미, 남미, 엘살바도르, 칠레 등을 돌아다니며 선교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함은 물론 인권운동과 평화운동에도 참여했다. 또한 쉬지 않고 한국의 상황을 이야기 하고, 한국에서의 생활을 잊지 않으려 일기를 쓰기 시작해 700페이지 분량의 이야기를 소설화해 좬영종도 사람들좭이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시노트 신부가 한국을 떠나 지낸 30년 동안 한국사회는 많이 변화했다.

“이제는 학생이 수업시간에 ‘민주’에 대해 물었을 때 대답하면 잡혀가는 그런 시대는 아니지요. 군사독재시기를 지나 학생들 뿐 아니라 온 국민이 참여해 민주화라는 성과를 이루어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인혁당 사건을 비롯해 깨끗하게 진상규명되지 않은 일들이 많잖아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인혁당 사건의 일부 진실은 밝혔으나 억울하게 죽게 된 그들의 명예회복과 그 가족들이 그동안 얼마나 고통 받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지금 한국사회의 논란거리인 국가보안법 폐지문제에 대해서도 이어 말했다. “당연히 국가보안법은 폐지돼야 합니다. 정쟁의 대상이 아니지요. 각 정당은 민족화해와 상생을 바라는 국민의 요구에 호응해 국가보안법 폐지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피해 입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하지 않을까요.”

국가보안법폐지에 대한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아마도 더 이상의 희생은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리라.

한국은 또 다른 고향

시노트 신부에게 영종도는 행복했던 과거이기에 한국은 제2의 고향이다. “기쁠 때 함께 웃어주고, 슬플 때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한국사람들이 형제처럼 느껴져요. 오글 목사, 박형규 목사, 인혁당 관련자 가족들, 수도회 식구들.. 참 좋은 사람들이죠. 물론 자기 믿음 때문이지만 노력과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어요. 그들을 사랑합니다.”

30-40대의 젊음을 힘들게 한국에서 보냈는데 이후 삶의 정착지도 한국이라는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45년 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나이 들어 적극적인 활동을 못해요. 제가 관여했던 인혁당 사건 등 그 외 다른 일들을 힘닿는 대로 도와줄 뿐일 테지만, 계속 한국에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한국은 미국보다 노인들을 공경하는 마음이 큰 것 같아요.(웃음)”

이제 그는 1975년 4월9일 경찰에게 끌려가는 사진에서처럼 강한 투사의 느낌보다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인자한 신부님의 모습이다. 집필한 『영종도 사람들』에 자필서명을 해주며 등장인물의 이름이 필자의 이름과 같다며 반가워한다.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진리를 위해 분투하는 민초들의 성실한 삶을 함께 확인하며 사랑하는 한국의 모든 벗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영종도 사람들』작가의 말 중에서…

시노트 신부님, 당신도 한국 사람들의 영원한 ‘벗’입니다.

최인숙 참여연대 시민참여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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