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5년 03월 2005-03-01   705

[경제 개혁센터] 좌초 위기에 몰린 재벌개혁

#장면 1. 2004년 9월 16일 국회 정무위원회 회의장. 전체회의 개회 전 유승민 의원 등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이 위원장석을 점거하면서 회의가 무산됐다. 17대 국회 첫 파행이었다. 이틀 간 계속된 회의장 점거 사태의 원인은 4대 법안 등 정치적 쟁점이 아니라 경제법안인 공정거래법 개정에 있었다.

#장면 2. 증권집단소송법 시행을 사흘 앞둔 2004년 12월 29일 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장에서는 한 떼의 관료와 열린 우리당 의원들이 여당 법사위 의원들을 둘러싸고 과거 분식회계를 증권집단소송 대상에서 2년 동안 유예하는 증권집단소송법 개정안 처리를 위한 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있었다.

앞의 두 가지 사례는 재벌 개혁에 대한 정부와 정치권의 입장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나라당은 정무위원장석 점거 이유로 합의처리를 무시한 여당의 일방적 처사를 내세웠지만 사실은 출자총액제도 유지와 재벌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 강화를 골자로 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저지해야 한다는 속셈이었다. 시행도 안한 법을 고치기 위해 국회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법사위원들 설득에 앞장선 사람들은 불과 1년 전, 야당과 재계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을 제정하기 위해 노력하던 여당 지도부와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위원회 관료들이다.

지금 재벌과 시장 개혁을 추진하는 주체가 과연 있기는 한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답은 부정적이다. 경제 위기 상황에서 기업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재계의 공세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기업의 기를 살리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는 여야와 정부, 언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때마침 불거진 해외투기 자본의 폐해는 이러한 논리를 강화하는데 적절하게 이용되고 있다.

개혁입법 미아로 전락한 증권집단소송법

증권집단소송법은 노무현 정부의 경제개혁 표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증권집단소송법은 법안 제출부터 심의 과정, 통과 뒤에까지도 어느 하루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바람의 진원지는 재계의 총력 로비다.

SK글로벌 사태 이후 마지못해 법안 수용 의사를 밝혔던 재계는 법안 심의 과정에서 과거 분식회계 해소를 위해 법 적용을 몇 년간 미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회가 이를 일부 수용하자 한 걸음 더 나가 과거 분식회계의 전면 사면을 요구하고 나왔다. 법 제정 후에도 재계의 요구는 끈질기게 계속됐고, 결국 시행 두 달 만에 과거 분식회계에 대한 법적용 2년 연기라는 성과를 얻어냈다.

정부와 여당은 분명한 원칙 없이 재계의 생떼에 휘둘려 오락가락하는 행태를 보였다. 입법 과정부터 법 시행을 1년, 6개월 연기하더니, 아예 자산 2조 원 이하에 대해 시행 연기를 추진하려다 각계의 비난에 물러섰다. 그러더니 결국 시행일을 코앞에 두고 실행 가능성조차 불투명한 과거 분식회계에 대한 법 적용 연기를 추진해 끝내 관철시키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증권집단소송법의 본질인 소수 투자자 보호와 기업 투명성 제고는 완전히 무시되고, 오로지 이 법이 기업에 불편을 주느냐 아니냐의 공방만 남게 되었다. 사실 왜 과거 분식회계에 대해 법 적용을 유예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정치권과 정부, 재계 모두 논리적인 대답을 하지 못한다. ‘소송 불안감에 대한 기업 부담 감소’라는 막연한 주장만을 되풀이할 뿐이다. 뚜렷한 이유도, 명분도 없이 증권집단소송법 개악에 앞장서는 관료와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이 법을 왜 만들었는지, 도입 반대론자에게 맞서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까맣게 잊고 있는 듯 하다. 결국 이들로 인해 노무현 정부의 유일한 개혁입법으로 받아들여지는 증권집단소송법은 제대로 시행조차 해보지 못한 채 껍데기만 남을 위기에 처하게 됐다.

규제보다 완화에 치중하는 공정거래법 개정 논의

공정거래법의 사정 역시 나을 게 없다. 공정거래법의 핵심인 출자총액제한제와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은 노무현 정부의 개혁 밑그림인 시장경제 3개년 계획 일정표에서 각각 유지와 강화가 확정된 바 있다. 그러나 재계가 출자총액제한제를 투자의 걸림돌이라고 목소리를 높이자 주무부처인 공정거래위원회를 제외한 정부와 정치권은 앞다투어 법 개정을 반대했다. 출자총액제한 뿐 아니라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 금융거래정보요구권 부활 등 개정안의 핵심 과제 중 어떤 것도 정치권과 다른 정부 부처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개정안은 결국 정무위 파행을 거쳐 지난해 말 간신히 여당 단독 통과로 국회 문턱을 넘었으나, 시행령 손질 과정에서 또다시 규제를 완화하는 조항이 삽입되는 등 수난이 계속되고 있다.

사실 이번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규제를 강화하는 내용이 아니다. 출자총액제한제도의 경우 졸업기준을 다양화해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유도하는 것이 뼈대이며,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 역시 전면 금지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재계의 반대에 밀려 3년 간 단계적으로 15%를 줄이기로 했다. 따라서 냉정히 따지면, 개선 의지를 끝까지 관철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재계의 눈치를 본 나머지 제도의 효율성을 살리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공정거래법을 둘러싼 논쟁은 제도가 얼마나 원칙과 목적에 맞게 효율적으로 운용되느냐의 문제에 있지 않다. 기업의 투자를 가로막고 경영권 안정을 해치는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일방적인 주장이 힘을 얻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재계와 일각에서는 왜곡된 통계자료를 제시하고, 일종의 경제 색깔론인 위헌시비까지 제기했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주장을 정치권과 언론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러한 여론에 밀려 공정위 스스로 원칙에서 한발씩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흔들리는 원칙, 표류하는 개혁

노무현 정부 2년 간 경제 개혁은 시작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는 증권집단소송법과 공정거래법의 모습과 꼭 닮아 있다. 지금 대통령과 정치권, 정부와 언론은 경제개혁이 대단한 불안과 혼란을 초래하기라도 할 것처럼 개혁 불안증에 걸려 있는 듯하다. 그러나 개혁은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정해진 개혁과제를 흔들리지 않고 추진하고, 당면한 현안을 원칙에 입각해서 처리하는 것으로 이미 개혁은 어느 정도 달성될 수 있다.

개혁과제와 그 실현 방법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논의가 이루어졌다. 문제는 언제 어떻게 실행하느냐다.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은 경제가 나쁠 때는 나쁘다는 이유로, 좋을 때는 좋은데 왜 하느냐며 딴죽을 걸기 마련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위기 상황이 경제개혁엔 가장 호기일 수도 있다. 정부와 정치권은 지금 이 순간이 우리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바로 그 때일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수정 참여연대간사 경제개혁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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