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5년 03월 2005-03-01   844

[장애여성운동] ‘우리의 삶은 부록이 아니다’

7년 전, 어느 날 아홉 명의 장애 여성과 비장애 여성이 모여 ‘요상한’ 모의를 하고 있었다. 다들 생업으로 바쁜 사람들이었건만 일이 끝나면 어김없이 서울 고덕동의 한 작은 집에 모여들어 자기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수다를 떨었다. 당시 사회의 인식과 복지정책은 장애인을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존중하기보다 적당한 혜택의 수혜자로 사회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어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수준이었다.

그런 가운데 본격적인 장애인운동이 시작되면서 장애인의 인권이 새로운 이슈로 떠올랐다. 하지만 장애 여성의 인권은 ‘부록’으로 취급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할 수 없는 부록 말이다. 여성운동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삶이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몇몇 여성들이 겁도 없이 ‘장애여성’의 인권에 대해 입을 열기로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설득하며 말렸다. “장애인이 해방되면 장애여성도 당연히 해방되는 것이다. 사회의 소수자인 장애인에 대해 이제야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는데, 당신들 너무 조급하게 구는 것 아닌가?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봐라. 지금은 전략적으로 때가 아니다.”

장애여성이 자신의 욕구에 대해 입을 열다

하지만 그네들은 당장 자신들의 삶을 바꾸고 싶었다. 무성(無性)적인 존재로 취급받으면서 동시에 성폭력을 당하고 있는 모순적인 상황, 집안 일을 도맡아 하고 있지만 취업할 수 없기에 비생산적인 존재로 분류되는 상황, 여자도 아니라며 자궁절제수술을 강요당하는 상황, 장애 남성과는 다른 장애 여성의 몸과 그로 인한 경험의 차이들, 운동사회 내의 권위적인 조직구조와 몸으로 부대끼는 위험천만한 집회가 아닌 다른 방식의 사회운동에 대한 욕구. 이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는 절박했지만 ‘장애 여성’이 스스로 입을 열기 전에는 묻혀있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한 번도 자신에 대해, 자기의 욕구에 대해 입 밖에 내어 말해본 적이 없는 장애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그들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얌전하고 다소곳하고 말없이 희생하고 봉사하고 베풀고 깨끗하고 순결하며 누군가를 보조하는 나약한 여성이라는 사회의 편견이 감히 그들을 짓누를 수 없는 공간이 필요했다. 그들도 말하고, 회의하고, 웃고, 떠들고, 울고, 술 마시고, 일하고, 운전하고, 총괄하고, 주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남성이 끼어들 수 없는 그들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이렇게 태어난 ‘장애여성 공감’은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지난 올 2월 14일 일곱 살 생일을 맞은 ‘공감’엔 다양한 활동이 있다. 매년 장애여성의 문제와 관심사를 주제로 다양한 사업을 펼치는데, 장애 여성의 노동, 독립, 성, 생애사 등이 주요 주제가 된다. 회원교육으론 세미나와 장애여성인권캠프가 있다. 휠체어 20대가 함께 떠나 비행기 한 대를 전세내다시피 했던 제주도 캠프는 모두에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장애 여성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며 말문을 열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또 그 경험들을 사회적으로 구성하여 해석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될 것이다.

무대를 통해 사회에 말을 거는 작업으로, 연극과 퍼포먼스, 영화 등이 어우러지는 문화제 ‘난장’과 연극팀 ‘춤추는 허리’의 정기공연이 해마다 열린다. ‘춤추는 허리’의 공연은 장애 여성들의 끼가 한껏 발산되는 축제의 장으로, 배우들이 워크숍을 통해 풀어낸 실제 삶과 실생활에서 얻어진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탄탄한 이야기가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무엇보다 장애 여성들의 다른 몸과 언어, 속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작업으로서 연극의 묘미를 잘 살리고 있다. 장애 여성 배우들이 자신의 꿈이었던 무대 위에 오르게 된 순간의 감동을 간직하여 주변의 다른 장애 여성들과 따뜻한 자매애를 주고받게 될 때 연극팀의 목표가 이뤄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연극팀은 곧 극단으로 독립하여 더 깊이 있는 장애 여성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계획이다.

말 걸고, 차이를 인정하며 소통하기

잡지 발간은 ‘공감’의 주력사업이다. 장애 여성에 의한 장애 여성을 위한 잡지 이름이기도 한 좬공감좭은 매년 꾸준히 나와 지난해까지 7호가 선보였다. 잡지는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는 장애 여성이 집회와 같은 현장 투쟁 대신 선택한 운동방식이다. 현장운동을 대신할 수 있는 방법이 글을 쓰는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 작업이었다. 지금은 한 해 동안의 사업을 정리하고 작업한 결과물을 모아 장애여성의 언어로 만들고 알리려는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이밖에도 장애 여성에 대한 성폭력의 심각성을 절감하고 2001년 연 장애여성성폭력상담소와 장애 여성의 독립을 지원하기 위해 올해 연 장애여성독립센터 ‘숨’의 활약도 기대할 만하다.

‘공감’의 연대활동은 주로 소수자 여성들과의 연대인 다름으로닮은여성연대(이하 다닮연대)의 활동과 장애인이동권연대에 집중되어 있다. 다닮연대는 매년 3·8 여성의 날을 맞아 행사를 벌이고 있으며 전국인권활동가대회와 목적별신분등록제실현연대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장애인이동권연대에서는 이동보장법률 제정 투쟁을 함께 하고 있다. 곧 돌아올 여성의 날과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위해서도 여러 가지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공감’은 규모가 커지고 활동가들이 늘면서 예전에는 몰랐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부딪치고 있다. 장애의 유무와 종류, 나이와 학력, 성격, 일하는 방식과 속도의 차이들이 복잡하게 얽혀 소통이 원활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그들은 위기가 닥칠 때 초심으로 돌아가 스스로를 성찰하고 서로를 격려하곤 한다. 중증장애여성의 경험을 존중하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 스물 일곱의 나이에 처음으로 집 밖으로 나와 오렌지 다섯 개를 샀던 감동의 공유가 서로에게 더 큰 힘으로 돌아올 것임을 믿는다. 이런 믿음 위에서 장애여성공감은 오늘도 힘차게 구르고 있다. 7년 전 시작할 때 걱정했던 이들에게 이런 말을 돌려주면서. 장애여성의 해방은 장애인의 해방과 같으면서 다르다. 하지만 우리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의 해방 또한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행동해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김하기린 장애여성공감 운영회원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