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5년 07월 2005-07-01   771

번호를 넘겨다오, ‘지름신’을 보내주마

주민등록번호의 의미와 전망

얼마 전 헌법재판소가 주민등록법제 상의 지문채취제도에 대해 합헌결정을 내렸다. 국가나 기업, 타인은 그 개인의 행위나 사생활을 추적할 수 있는 여지가 있고, 그 가능성이 알려지거나 스스로 인식하게 되는 경우 개인의 일반적 행동의 자유에 제약을 가져오는 등 개인의 인격과 자유는 심히 위축될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험이 국가안보의 중요성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원론에서는 거창한 인권을 말하면서도 각론에 가서는 반인권적 판단으로 일관하는 헌법재판소의 이중적 태도를 잘 드러내는 사례다. 그렇지만 고루하기 짝이 없는 헌법재판소의 눈에도 개인정보가 중요한 인권요소로 보인다니 가상하기도 하다.

국민 총동원 수단에서 개인정보 꿰는 마법의 암호로

개인정보는 헌법재판소의 말처럼 사람의 성향이나 취미, 소비 행태, 병력 등 사생활을 엿볼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평가와 분석을 함부로 할 수 있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개인정보가 남용 및 오용되는 것은 사생활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험요소가 된다. 그 개인정보의 핵심에 주민등록번호가 있다. 주민등록번호는 신상명세를 드러내는 코드의 나열일 뿐이거나, 나의 소비성향을 드러내는 하나의 관리번호이거나 나의 경제상태를 암시하는 구좌번호에 머무르는 게 아니다. 주민등록번호는 21세기 대한민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인격 그 자체이며 전 세상이다!

주민등록번호는 그 태생부터 강력한 권력을 휘어잡고자 하는 통치자의 열망이 낳은 것이다. 일제 기류법(1942년)이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어난 것이라면, 그것을 이어받은 최고입법회의의 기류법(1962년)은 쿠데타 직후의 박정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1962년 주민등록법으로 개명되면서 모든 국민에 대한 관리·통제의 기반법으로서 지위를 확보한다. 3선 개헌을 앞둔 1968년, 1·21무장공비사건을 계기로 병역사항, 특수기술사항 등을 삽입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주민등록번호제도는 명실상부한 국민관제번호로 자리잡게 된다. 1970년 주민등록증 강제발급제도 도입과 함께 주민등록번호는 국가신분증명제도의 핵심이자 전국민 단일식별코드로서의 의미를 최대한으로 구현하게 된다.

그 동안 주민등록번호는 납세자번호로, 병역자원관리번호로, 범인의 추적을 위한 확인번호로 최대의 효율성을 가지고 이용되어 왔다. 대한민국이 20세기 말에 이미 전자정부시대를 선언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많은 정부 데이터베이스를 연동시킬 수 있는 단일식별코드로서 주민등록번호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떠한 정보도, 어떠한 자원도 대한민국의 국민됨과 관련이 있는 한 모두 이 코드를 통하여 연동될 수 있었다. 정부는 언제, 어디서든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국민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가장 체계화된 형태로 얻을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국민은 언제나 동원할 수 있고 조작할 수 있는 통치대상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다른 데 있다. 그것은 모든 국민에 대한 프로파일링을 가능하게 하고 그 결과 현실의 국민과는 다른, 가상의 국민을 창출할 수 있게 한다. 예컨대 A라는 사람에 대하여 국가는 자신이 필요한 모든 정보들을 확보하고 이를 다시 조합, 종합하면서 그 A를 새로이 복제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노인이지만, 집을 갖고 있고 아들과 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생활보호대상자가 되지 못한다. 실제로는 그 집은 담보로 잡혀 경매에 들어가 있고, 아들은 실직을 해 오히려 가계를 축내고 있는 실정이라든가 손자의 병구완이 이 노인의 몫이 되어 있다는 현실은 정보의 수집 가공과정에서 사라져 버리고 만다. 오로지 국가가, 관료가 원하는 정보만이 수집되고, 원하는 방식으로 가공되고, 행정관리의 목적아래 주민등록번호를 통해 연동됨으로써 ‘가상의 인격(virtual personality)’이 창출되는 것이다.

가상의 국민을 창출하는 주민등록번호

그래도 법의 지배라는 요청 속에서 개인정보의 보호를 위한 법제화가 가능하였던 국가영역에서는 나은 편이라 할 수 있다. 사적 자치와 교환의 법칙이 횡행하는 사적 영역에서 주민등록번호의 위력은 형언하기 힘들다. 여기서 주민등록번호는 모든 거래와 신용의 기반이 될 뿐 아니라 개인의 소비생활, 건강생활, 문화생활 하물며 가족생활의 깊은 곳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보를 담아내는 고리로 존재한다.

할인점에서 할인권을 준다는 유혹에 넘어가 신용카드 발급신청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금융정보와 더불어 구매정보, 즉 취향, 소비습관, 생활양식에 관한 정보까지 그 할인점에 넘겨주는 셈이 된다. 만약 그 백화점이 어느 재벌집단에 속한 것이라면, 사용하는 휴대폰 종류에서부터 몇 인치 짜리 TV를 보는지, 자동차는 어떤 것이며 어디서 정비를 하는지, 예금이나 보험은 어떤 것에 가입되어 있는지, 신문은 무엇을 보며, 놀이동산에 데리고 가는 아이들은 몇이나 있는지, 결혼기념일 행사는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 따위의 많은 정보를 신용카드발급신청서 한 장에 다 넘겨주는 셈이 될 수도 있다. 주민등록번호 13자리를 적는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이 역시 문제는 개인정보의 이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업들에 의하여 역으로 나의 인격이 재구성된다는 데에 있다. 요즘 인터넷상에서 ‘지름신’으로 불리는 충동구매의 ‘계시’는 여기서 완성된다. 나의 결혼기념일을 미리 알아 선물 구입을 유도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내 생활양식과 소비습관을 바탕으로 내가 가장 ‘욕심낼 만한’ 선물 보따리를 가공하여 구매를 ‘명령’한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동안 분석된 소비패턴을 바탕으로 나에게 필요라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이 환상의 물품을 통해 나의 욕망을 구성해내고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구매하도록 부추긴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나의 인격 자체를 재구성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고리마다 굳건하게 존재하는 것이 주민등록번호이다. 그것을 통하여 정보가 연계되고 가공되고 프로파일링되는 것이다.

군사정권 시절, 국민 총동원체제를 만들어내기 위해 창안되었던 주민등록번호가, 이제는 마치 구슬을 꿰는 실처럼 개인이 남긴 모든 정보를 하나로 꿰어주는 코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정보화가 무르익으면서 시민단체들이 주민등록번호에 대하여 유난히 민감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사회는 국가와 기업이라는 거대한 괴물에 억눌린 가여운 신민들의 집합으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상희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장, 건국대 법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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