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5년 07월 2005-07-08   1516

비루한 인간과 일상의 꿈, 홍상수의 <극장전>

홍상수 감독의 신작 <극장전>과 한재림 감독의 <연애의 목적>을 같은 극장에서 비슷한 시기에 보게 되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객석에서는 끊임없이 웃음이 흘러나왔다. 홍상수 감독은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상에서 발생하는 무의미해 보이는 사건들에 대한 그의 예리한 시선을 <극장전>에서도 보여주고 있다. <연애의 목적> 은 오직 연애에만 목적을 두고 있는 두 남녀의 우스꽝스런, 하지만 어찌 보면 끔찍한 사랑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두 영화가 지향하는 바는 사뭇 다르지만 그럼에도 관객들에게 평범한 인간들의 일상적인 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연애의 목적>은 남녀의 사랑을 그리지만 결코 낭만적이거나 아름답지 않다. 질펀한 농담과 섹스(육체적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언어적인)가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고등학교 영어 선생 이유림(박해일 扮)은 젊고 잘생겼지만 교육보다는 여자들에 더 관심이 많다. 어느 날 학교에 교생들이 실습을 오면서 유림은 그들 중 한 명인 최홍(강혜정 扮)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유림은 이미 애인이 있지만 최홍에게 섹스를 하자고 끊임없이 치근거린다. <연애의 목적>은 목적 없는 섹스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낭만적인 사랑이란 환상일 뿐, 우리가 연애를 통해 원하는 것은 실은 유혹과 섹스라는 것이다. 연애는 그런 점에서 일상적인 여행과도 같은 것이다. 여행에도 유혹과 섹스라는, 평범한 인간이 꾸는 일상의 꿈이 숨어있다.

홍상수의 영화는 코미디에 가깝다. 그의 영화는 웃음을 유발하는데, 이 웃음은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이 말하듯 어떤 거리감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동물원 우리에 갇힌 원숭이를 보며 웃는 것과 비슷하다. 원숭이는 인간과 너무 닮은 데다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기에 웃음을 유발한다. 마찬가지로 홍상수의 영화는 사회라는 거대한 우리 안에 갇힌 사람들의 행태를 보여준다. 그들의 행동은 우리의 실제 삶과 무척 닮아있고, 사건은 대단히 일상적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단순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무엇을 간직하게 되는가를 말해준다. 이들은 어떤 하루를 보낼까? 그들이 만약 사랑을 나눈다면 그들에게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가? 이런 평범한 이야기가 영화의 거대한 축을 이룬다.

<극장전>은 홍상수 감독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1부와 2부로 구성된

<극장전> 1부에서는 영화 속 영화 이야기를 들려준다. 재수 중인 상원(이기우 扮)은 우연히 종로의 안경점에서 중학교 시절 첫사랑인 영실(엄지원 扮)을 만난다. 상원은 영실과 술을 마시고 취해 여관에 들어가 그녀에게 섹스를 시도하다 실패한다. 낙담한 상원은 갑자기 영실에게 죽자고 조른다. 2부는 지금까지 본 장면들이 단편 영화 <극장전>임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영화감독 데뷔를 준비하고 있는 동수(김상경 扮)는 암으로 죽어가는 선배 감독의 회고전에서 막 단편영화 <극장전>을 보고 극장 문을 나선다. 그런데 극장 앞에서 동수는 영화 속 인물인 영실을 만나게 되고 무작정 그녀를 좇아간다.

<극장전>은 마치 체호프나 카프카, 헨리 제임스의 소설에 나오는 이상야릇한 인물들이 서울거리를 배회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만든다. 이른바 ‘비루한 인간들’의 이야기 말이다. 비루함이란 통상적으로는 품위가 없고 비천한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홍상수의 영화에서 비루함이란 일상적 인간의 본모습에 가깝다. 이들은 지극히 평범한 인물들, 즉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또한 이웃의 고소라든가 경찰의 소환, 연애와 수작 같은 잡다한 사건들을 접하면서 그들의 내면을 갑작스레 훤히 드러내는 인간들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술자리와 여관방은 이런 평범한 인간들의 비루함을 훤히 드러내 보이는 특별한 공간들이다. 여기에 홍상수 영화의 기이한 웃음이 있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의 엉뚱한 행동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그들이 원래 기이한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 그들의 속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가장 현대적인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물론 홍상수의 영화가 단지 일상에 대한 미세한 관찰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일상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것을 영화에 투사한다. 가령 <극장전>은 영화 안에 또 다른 영화를 끼워 넣으면서, 혹은 영화를 본 동수가 영화 속 인물 상원의 행동을 모방하면서 영화와 현실은 정도 차이만 있을 뿐 근본적인 차이가 없음을 느끼게 한다. 영화가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현실이 영화 속의 세계를 꿈꾸는 것이며 일상이 꿈을 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일상은 그래서 백일몽과도 같은 것으로, 여기서 꿈은 우리가 단편적으로 접하는 조각난 현실세계의 연결을 통해 세계의 윤곽을 그려내게 한다. 이를 통해 그의 영화는 어떤 깨달음을 이끌어낸다. <극장전>의 말미에서 죽어가는 극중 감독 이형수를 보면서 상원은 생각을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생각을 하면 담배를 끊을 수도 있고, 죽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죽음과 삶, 혹은 섹스와 죽음의 기묘한 조합의 효과로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온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일상은 이제 단순한 현실이 아니라 꿈을 꾸기 시작한 현실인 셈이다.

김성욱 영화평론가,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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