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5년 08월 2005-08-01   2689

일본의 전후 보상과 우리의 진로

2005년을 ‘역사의 해’라고 한다. 이유의 하나는 한일 두 나라가 올해를 ‘한일 우정의 해’로 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흐름을 보면 오히려 2005년은 국교정상화 이후 한일관계가 가장 삐거덕거린 ‘한일 갈등의 해’이다.

왜 그럴까? 일본이 ‘전후(戰後)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중요한 이유의 하나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대일 과거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

이다.

국제사회가 일본의 대외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은 동경재판(1946~48)과 1952년 발효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통해서였다. 특히,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은 일본이 해야 할 전후 배상의 방향을 결정하였다. 강화조약에 의해 배상 문제를 처리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가리지 않고 본다면, 일본은 1952년 대만과 체결한 일화평화조약을 시작으로 1977년 몽골과의 조약까지 국가 차원의 전후보상문제를 마무리지었다. 북한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 특징을 정리해 보자.

일본 경제의 기틀이 된 전후 처리

첫째, 일본의 전후 배상은 동아시아 반공전선의 교두보로서 일본을 재편하려는 미국의 전략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그래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의 배상에 관한 제14조(a)항에는, 일본이 개별교섭에 의해 배상을 하더라도 ‘존립 가능한 경제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에서 실물배상과 금전배상이 아니라 역무배상(役務賠償, reparations in service, 각종 서비스를 통한 배상) 방식으로 한다고 명시되었다. 미국은 일본의 경제 회복과 보수반공세력의 집권을 위해 일본 정부의 부담을 최대한 줄여주려 했던 것이다. 대만 및 한국과의 조약 때 미국이 관여한 사실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둘째, 각 나라와 체결한 조약 및 협정은 일본이 저지른 행위와 피해 실태에 대해 진상 규명을 하지 않은 채 이루어졌다. 또한 피해국과 피해자에게 사죄를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중국을 제외한 국가와의 조약에는 국가만이 아니라 ‘국민’이 배상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조항을 명문화하고 있다. 그래서 국민 개인의 청구권까지 포기한 나라가 많았다.

셋째, 각 국가와의 배상에 관한 구체적인 교섭과정에서 역무배상 규정은 잘 지켜지지 않은 채 자본재도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배상이 통상(通常)의 무역관계를 방해하지 않도록 하였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고립된 국제관계를 극복하며 아시아에서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는 수단으로 배상협정을 활용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관료와 자본가들은 배상이 일본경제 발전의 특권이며, 피해국의 입장에선 배상이겠지만 일본에 그것은 투자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넷째, 무상원조와 경제협력이란 이름으로 지불된 배상금이 피해자 개인에게 지불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 신고한 피해자에게 30만 원을 지불한 경우와 미크로네시아에서 최고 5,000달러에서 최저 500달러를 지불한 경우(신탁통치국인 미국이 절반 부담)가 전부였다. 사실이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인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이 어려웠겠지만, 진실을 규명하려는 의지가 일본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아시아 국가의 위정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경제정책을 추진하는데 배상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다섯째, 1977년 4월 일본 정부에서 ‘배상·준배상의 지불’이 완료되었음을 확인하기까지 일본이 배상, 준배상, 각종 청구권 명목으로 대외에 지불한 돈을 합치면 약 6,565억 엔이다. 일본 국민 1인당 6,000엔이 조금 넘는 금액이었다. 더구나 1956년 협정을 체결한 필리핀과는 20년이 지난 1976년까지 5억 5천만 달러를 지불하기로 합의했을 정도로 장기간이었다. 일본 스스로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일본이 배상 교섭에서 상당 기간에 걸쳐 끈질기게 자기 입장을 주장한 것도 결과적으로 배상의 실질적 부담을 크게 경감시켰다. 배상 협정의 시기가 늦어진 결과로, 고도 성장기에 들어간 일본은 대체로 큰 고생 없이 배상을 할 수 있었다.

더불어 체결 시기가 늦어진 것은, 부흥한 일본이 동남아시아에 경제적으로 재진출할 때 절호의 발판으로 배상 지불과 무상 경제협력을 이용하는 효과를 가져 왔다(굵은 글씨는 필자가).

보상도 사과도 없었다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의해 일본에 배상을 청구한 나라는 필리핀(1956)과 월남(1959)이었다. 라오스(1958)와 캄보디아(1959)도 강화조약의 당사국이었지만 청구권을 포기하였다. 대신에 일본은 두 나라에 무상 자금 공여를 실시하였다. 개별적으로 평화조약과 배상협정을 체결한 나라는 미얀마(1954,63)와 인도네시아(1958)였으며, 대만(1952), 중국(1972), 인도(1963)는 평화협정을 체결했지만, 앞의 두 나라와 달리 전쟁 상태의 종결과 배상의 포기를 선언하였다. 이 가운데 대만과 중국의 사례가 분단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경우이다.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발효된 날 대만과 일본은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대만을 극동의 전략적 일부로 간주하려는 미국의 압력 때문에 중국과의 조약을 포기하였다. 대만도 전쟁 당사국이었지만 ‘일본국민에 대한 후의와 선의의 상징으로 샌프란시스코조약 제14조(a)1항에 기초하여 일본국이 제공해야 할 역무의 이익을 자발적으로 포기한다’고 밝혔다. 일본은 이를 기준으로 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상대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중국과 국교를 재개하는 과정에서 전쟁 상태가 이미 종결되었음을 대만과 합의하였고, 대만이 청구권도 포기했다는 점을 내세웠다. 그래서 1972년의 중일공동성명에서는 두 나라 사이에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를 종료하며, 중국정부가 ‘전쟁배상의 청구를 포기한다’고 규정하였다. 대신에 일본은 북경정부가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대만을 중국의 일부로 ‘이해’하고 ‘존중’할 뿐만 아니라 대만과 체결한 조약도 종료되었음을 인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정부가 공식적인 태도를 표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중국 국내에서는 국민의 인도법 위반에 기초한 민간의 청구권까지 중국정부에서 포기하지 않았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실제 중일공동성명에도 다른 나라와의 조약에서 나오는 ‘국가와 그 국민’이 청구권을 포기했다는 언급이 없다. 이와 연관시켜 볼 수 있는 사례가 하나오카사건재판이다.

2005년 현재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일본의 재판소에서 80건 이상의 대일과거청산소송이 진행되었거나 계류중인데, 원폭피해자를 제외하고 최종심에서 원고가 패소하지 않은 드문 경우가 하나오카사건에 관한 재판이다. 이 사건은 1945년 6월 30일 아키다현 하나오카광산에 징용된 중국인이 집단 탈출을 시도하다 헌병 등이 동원된 진압과정에서 418명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던 피해자들은 1995년 동경지방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였고, 2000년 11월 고등재판소의 직권으로 ‘화해’가 성립되어 ‘하나오카 평화우호기금’ 등을 만들었다. 대일과거청산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의 하나가 ‘기금’과 ‘화해’라는 점을 시사해준 것이다.

이처럼 일본은 피해국들과 피해 국민의 청구권까지 포기케 하는 여러 조약을 체결했다. 그렇지만 1990년대 들어 피해자들이 직접 일본 정부와 기업 등을 상대로 대일과거청산소송을 제기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피해보상보다 입법화와 일본 정부 및 기업으로부터의 사과 쪽에 비중을 두는 소송이 늘어나고 있다. 피해자에 대한 사과도 없고, 개인도 배려하지 못한 조약들과 배상협정의 맹점이 들어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후 보상’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침략과 지배의 기억, 우리가 상기시키자

21세기 들어 동북아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갈등은 교과서문제와 영토문제로 표출되고 있다. 동북아의 역사갈등은 경제교류와 국방·외교 관계까지 위협하는 요소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래서 ‘역사전쟁’이라고까지 말한다.

역사전쟁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동북아의 안정을 굳건히 할 수 있을까.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이 해체되었고 동북아 국가들이 세계화를 지향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여전히 냉전적 질서구조가 동북아를 지배하고 있고, 그에 입각한 패권경쟁이 상호공존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질서가 2005년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교과서문제와 영토문제의 본질적 바탕이며, 동북아의 민족주의는 이 틈바구니에서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인식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는 전후 배상문제도 같은 각도에서 보아야 한다.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민간차원에서 아무리 많은 집단소송을 제기한다 하더라도, 쉽게 해결점을 찾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본은 경제를 제외한 정치·외교·군사 등의 분야에서 다자간 협력체제를 구축하고 그 일원으로 참가할 이유가 없는 이상 피해자들의 소송을 계속 패소시킬 것이다.

국가간 전후 배상의 진정한 마무리는 침략에 대한 반성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 그리고 역사교육과정에서 반복되게 가르침으로서 달성할 수 있지만, 당분간 그것도 일본에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동북아에서 다자간 협력체제 구축 작업을 게을리 할 수 없다. 21세기 우리의 미래가 이것과 밀접히 연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이 여전히 ‘전후보상’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대일과거청산작업’을 우리 내부에서라도 계속해야 한다. 강제동원에 따른 피해와 친일에 관한 진상규명 활동은 그 일환인 것이다.

대일소송과 진상규명문제는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비판과 한국의 역사교과서에 대한 반성적 자기성찰과 더불어 학생들에게 반복되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내재적 지적 공간’을 확보하는 작업이라면, 38선에 남북공동으로 위령 공간을 세우고, 평화와 인권의 상징이자 비경제적 국제교류의 장으로 용산공원을 만드는 정책은 ‘내외적 정치적 상징공간’을 확보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용산공원에 ‘동북아 평화와 인권, 민주재단’을 설립하면 여러 공간들에 조직성과 체계성을 부여하고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를 동북아에 보여주고, 일본에 과거청산을 요구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나름대로 대일과거청산을 하는 작업과정이 아닐까.

신주백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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