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5년 09월 2005-09-01   409

한 뮤지션의 죽음을 바라보며

바로 얼마 전에 쿠바의 전설적인 밴드인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한 멤버였던 이브라힘 페라가 사망했다. 여든에 가까운 나이였다. 뉴스를 들은 그 날 저녁 나는 한 죽음을 슬퍼하는 대신 어스름 저녁 빛 사이로 퍼지는 그의 음악을 들으며 한 뮤지션을 기억했다. 그의 노래에는 기교도, 영광도 없다. 다만 곰삭은 서글픔과 평온이 있다. 인생을 깨달은 자의 노래가 누구의 가슴엔들 파고들지 않을까.

나는 이들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꼭꼭 음반의 재킷을 들여다보곤 한다. 표지 사진은 오후를 걷고 있는 늙은 사나이 이브라힘의 모습을 담고 있다. 쿠바 가난한 동네의 골목인 듯 널어놓은 빨래도 보이고 헐렁한 속옷 바람으로 뛰노는 아이들도 보인다. 서글프고 따분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가난에 휘둘리고 부에 주눅 든 사람들의 모습은 아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라. 어찌 그다지도 꾸밈없고 자족하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일까.

우리는 물질적으로 넘치도록 풍요로우면 다른 부분이 상당부분 메워지리라 기대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이 옳은 지적임을 자주 깨닫게 된다.

때때로 나는 과연 내가 사는 21세기의 이 도시를 견뎌낼 수 있을지, 겁이 날 때가 있다. 빼곡히 높아져 가는 주거 공간들, 주택가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질주하는 자동차들의 굉음, 자연스런 생김새를 여지없이 누르는 온갖 인공적인 것들의 위력, 그 안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의 모습. 이런 것들 안에서 얼마나 흔들리지 않고 버티어낼 수 있을 것인지, 또 그때그때 제대로 잘 대처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다.

물론 어느 한가로운 인생의 길목에서 저 시골로 피난을 가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가 휘두르는 개발의 행태나 속도로 보자면 어느 곳인들 온전히 남을 것 같지 않다. 시골이든 도시든 가리지 않고, 지역여건이란 것도 상관없이 우스꽝스럽고 불균형한 난개발의 침입을 어느 힘이 막아낼 것인가. 피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을 것 같은 예감이다.

작년 겨울 제주도에 갔을 때 엉터리 개발이란 것이 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국제도시 제주시의 가장 큰 버스터미널이란 곳이 저 어디 이름 없는 면소재지 버스 주차장과 하나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화장실이라고 들어가 보면 덜렁거리는 문이 옛날 재래식 화장실에 달려있던 거적때기를 연상시켰다. 바로 몇 미터 거리 안에 국제 수준의 호텔이 대리석 욕조로 관광객을 맞이하느라 부산을 떠는데 코앞의 버스 터미널은 창피한 수준, 아니 그저 생각도 하기 싫은 수준이었다. 우리가 말하는 ‘발전’의 의미를 아는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그것이 주는 불균형과 사회적 차원의 결여가 어떻게 이다지도 변하지 않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새삼스레 서울의 ‘뉴타운’, ‘강북개발’을 들먹거리고 싶지 않다. 들장미 넝쿨을 드리운 나지막한 주택가를 밀어내고 고층의 아파트, 빌딩들을 마구 지어대는 게 최선의 발전이라는 주장에는 할 말이 없다. 불도저의 굉음은 숱한 목소리마저 지워버린다. 두려운 것은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은 이 도시에서 그저 조용히 사라져줘야 한다는 사실이다.

권은정 『참여사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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