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6년 01월 2006-01-01   1080

다시 길 위에서

길은 언제나 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노자는 아예 길에서 최고의 가르침을 얻고자 했다. 그 노력의 결과로 창시된 것이 바로 ‘도교’, 곧 ‘길의 가르침’이다. 길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결코 동양적인 특성이 아니다. 서양의 지배적 종교인 기독교를 창시한 예수는 자신을 길이라고 가르쳤다. 길은 그 자체로 대단히 중요하다.

사실 길은 생명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생명체는 복잡한 길들로 이루어져 있다. 코는 호흡의 길목이다. 코를 통해 우리 몸으로 들어온 공기는 혈관이라는 길을 통해 우리 몸 곳곳으로 퍼져간다. 입은 음식의 길목이다. 음식은 위장과 대장을 지나며 우리 몸에 영양분을 공급하고 요도와 항문을 통해 우리 몸 밖으로 나간다. 우리 몸 속의 크고 작은 수많은 길들이 막히거나 망가지면 아프거나 죽게 된다. 우리 몸 자체가 자연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길이다.

오늘날 우리는 길이라고 하면 무엇보다 찻길을 떠올린다. 근대화와 함께 무수히 많은 길들이 만들어졌는데, 그 대부분은 사람이 아니라 차를 위한 길이다. 돌이켜 보면, 그야말로 경천동지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박제가 선생은 <북학의>에서 이 땅에 수레가 다닐 길이 없는 것을 통탄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찻길이 너무 많은 것을 탄식하고 비판할 지경에 이르렀다. 널따란 고속국도 바로 옆에서 일반국도 확장공사를 벌이고, 또 바로 그 옆에서 각종 지방도로 신설공사나 확장공사를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언제부터인가 ‘도로’는 찻길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또 언제부터인가 그것은 자연파괴와 부패의 문제를 떠올리게 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잭 케루악은 1956년에 “길 위에서”라는 제목의 소설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비트세대’라고 불린 새로운 세대의 경전이 되었다. 짧은 시간에 도로와 자동차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으나 우리는 새로운 문화를 생성하지 못하고 있다. 생명의 상징인 길이 갈수록 죽음의 상징으로 타락하는 양상을 안타깝게, 또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일본의 행정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 꼽히는 것이 이른바 ‘도로족’이다. 도로공단 출신의 임직원들이 거대한 이익집단을 형성해서 불필요한 도로공사를 대대적으로 벌이고 엄청난 혈세로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상황은 더 나쁘다. 매년 정기국회에서 도로공사를 비롯한 개발공사들의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매년 지적되어도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길에서 인생을 배우기 위해, 길에서 생명을 배우기 위해, 우리는 자연파괴와 부패의 대명사로 타락한 우리의 찻길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로드 킬’은 야생동물이 찻길에서 차에 치여 죽는 것을 가리킨다. 지리산 일대에서만 매년 3천마리 이상의 야생동물이, 그리고 전국적으로 매년 수만마리의 야생동물이 ‘로드 킬’의 희생물이 되고 있다. 길은 지금도 여전히 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생명보다는 죽음에 가깝다. 다시 새해의 길 위에 서서 간절히 바라건대, ‘도로족’에 맞서서 길을 되살리는 새해가 되기를

홍성태 참여사회 편집위원장, 상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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