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6년 01월 2006-01-01   1424

한국 여성학의 선구자 이효재 선생

“이제 서울, 그들만의 잔치에 관심없어요”

이효재 선생이 살고 있는 경남 진해는 먼 길이었다. 내 어릴 적 추억 속의 진해는 아담한 바닷가, 싱싱한 갈치, 높아만 보이던 해군사관학교의 담, 그리고 일제시대의 흔적인 방사선형 도로가 떠오르는 조용한 도시다. 지금은 시내 초입부터 대형마트와 고층아파트가 눈에 들어오는 현대화가 진행중이다.

창원 버스 정류장까지 마중 나온 선생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정정했고, 예리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내뿜는 눈빛이 금새 나를 매료시켰다. 선생은 1924년생이다. 국망의 슬픔과 절망을 견디어내고 해방을 맞던 해에는 이미 스물을 넘긴 청년이었다. 그 후 격동의 60년 세월을 여성으로서, 학자로서, 운동가로서 부조리한 현실에 당당히 맞서며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은 아직 못다 한 가족사 연구를 위해 진해로 낙향했고, 아버지 이약신 목사의 전기를 쓰며 기적의 도서관을 통해 지방의 문화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을 실천하고 있다. 이효재 선생은 “이제 죽는 일만 남았다”고 말했지만, 아직도 청년의 기백을 잃지 않고 냉철한 안목으로 현실을 읽어 내며 실천을 모색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선민의식 대신 현실 직시로 열등감을 극복하다

지나온 80년을 되돌아보는 선생의 말 속에서는 여성으로서, 그리고 민족의 일원으로서의 주체적 자각이 분명한 삶을 엮어왔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안타깝고 절망적인 식민과 분단의 시대를 거치면서 선생이 처음 넘어야 했던 산은 열등감이었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배울 기회도 없이 못난 민족이란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미국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조차 없는 국제 사회의 골칫덩이로 전락한 민족의 정체성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면서 갖게 된 열등감이었다. 그런데, 선생은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다른 지식인들처럼 선민의식으로 열등감을 극복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둡기만 한 역사와 현실에서 실마리를 찾고자 했다. 우리 민족의 역사, 특히 여성의 삶에 주목하면서 여성의 주체적 자각이 열등감 극복의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성의 삶을 짓누르는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연구하면서 여성의 사회 참여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민주화를 통해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또한, 분단은 되었지만, 남한만이라도 민주화가 되면 언젠가는 자주성을 회복해서 통일을 이룩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바람을 품고 삶을 이어왔다고 한다.

칠순까지 이어진 운동적 삶

“70, 80년대에 학생들이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에 나서니까 나도 학생들과 더불어 참여하게 되고, 전두환 정권 시절 해직을 당하고 나서는 길거리에서 젊은이들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하게 되었지요. 그런 과정에서 나도, 제자들도 스스로를 깨어가면서 함께 여성운동의 과제를 제기하고 운동에 참여했지요.”

이렇게 시작된 선생님의 운동적 삶은 분단으로 이중 삼중의 고통을 받는 여성과 가족의 현실, 그리고 노동계급 여성에 주목하는 학문연구로 이어지고, 또한 가족법 개정 운동 등 제도 개혁운동과 통일운동에 동참하는 것으로 ‘고양’된다.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전쟁범죄라는 인식을 국제적으로 확산하는데도 앞장섰다. 할머니들의 피맺힌 증언을 들으면서 분노하고 서구세계에 알리고 일본에서 폭로하면서 국제여성인권운동의 계기를 만들었다. 선생에게 그것은 꽃다운 나이에 끌려간 동년배들과의 ‘연대’였고, 남북여성간의 ‘어울림’의 무대였다. 그 때 이미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선생은 동무들과 함께 희망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독신 고수하며 혈연 뛰어넘는 가족공동체 실천

학자로서, 실천가로서 선생의 가족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열의는 각별하다. 선생은 이론적으로는 사회구조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는 수동적 존재로만 인식되던 가족이 실제로는 인간 공동체적인 삶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해가는 동력을 갖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여성들이 자녀 양육이나 사회 역할을 통해 가족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에서 출발해 사회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운동과 공동체운동의 결합에서 사회변혁의 희망을 보았단다. 혈연관계를 뛰어넘는 또 다른 가족공동체를 꿈꾸거나 혹은 실천하면서.

그렇게 선생은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독립운동과 사회봉사를 하며 평생 홀로 살았던 고모의 영향이란다. 아버지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여덟 살 위의 누나와 어렵게 컸다고 한다. 평안도 정주 출신의 조부모는 아들 이름은 언약 약(約), 믿을 신(信)으로, 딸의 이름은 사랑 애(愛), 베풀 시(施로) 지을 만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평양에서 근대교육을 받은 고모는 신앙심 하나로 버티며 동생을 이승훈 선생이 세운 정주 오산중학교에 보내고 자신은 세브란스간호학교를 졸업한다. 3·1운동에 참가한 뒤 만주로 건너가 신흥군관학교에서 간호장교로 활약하다가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할 가망이 없다는 판단에 통영으로 내려와 전도와 간호, 모자보건 사업을 하며 영아원도 운영했단다. 선생은 웃으며 “고모의 유전인자 덕에 독신으로 큰 불편 없이 지냈다”고 말했다. 목사였던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도 상당히 개화된 집안 출신으로 근대교육을 받은 덕에 모범적인 삶은 요구했지만, 결혼을 강요하지는 않았단다. 한 번의 기회는 있었는데 선생이 피했다고.

기적을 만드는 도서관

선생의 낙향 후의 삶은 기적의 도서관으로 요약된다. 진해에 내려와 보니, 어린이를 위한 뮤지컬, 박물관 등의 문화적 혜택이 거의 없어 부모와 쇼핑하고 등산하는 것이 것이 무척 안타까웠단다. 그래서 기적의 도서관을 설립한다는 방송을 보고 선생이 시장과 여성계를 설득하고 시민들의 동의를 받아 유치했다. 막상 문을 열고 보니 이것이야말로 여성운동이고 지역사회운동이고 문화운동이라는 것을 실감했다고 한다. 기적의 도서관이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진해 문화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한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고 자란 어린이들이 우리의 미래인 만큼 기적의 도서관의 파급효과는 매우 크다는 것이다. 도서관 운동을 하면서 서울 생각은 싸악 잊어버렸으니….

풀뿌리 민주주의 만세!

보수적 도시 진해에서의 삶, 그리고 도서관 운동의 경험은 선생에게 풀뿌리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것 같다. 선생은 386세대는 늘상 평등, 공동체, 상생을 외치지만 실천하지 않는다고 질타했다. 선생은 민주적 제도 개혁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현 시점에서의 올바른 실천은 지역사회에서 풀뿌리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있다고 본다. 진보 개혁 세력이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인간관계에서부터 이념을 실천함으로써 민중들이 보수세력과의 차이를 실감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진보와 개혁을 표방하는 정치집단들이 서울에 모여 ‘그들만의 잔치’에 분주한 정치꾼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분개했다. 여성운동 출신의 정치인들도 민중과 여성과 어린이에게 희망을 주고, 지역에 뿌리내리는 운동에는 관심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매우 흥분하기도 했다. 참여연대에 대해서도, 그룹을 짜서 지역에 내려가 서울에서 만들어놓은 이념을 바탕으로 지역민들과 함께 지방화, 분권화를 도모할 것을 주문했다. 물론 이제 지역민은 계몽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과 함께 배우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내적 성장을 위해 분발하는 한해가 되기를

선생은 분발하라는 말로 새해 덕담을 대신했다. 황우석 교수 사건에 관해서는 엄격한 도덕성과 책임을 요구하는 생명존중과 인권문제에 대한 준비가 미비한 상태에서 과학은 없고 기술만이 앞서가면서 발생한 현상으로 평가했다. 권리를 누리기 위한 능력을 키우는 동시에 권리행사에는 막중한 책임과 도덕성이 수반된다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혼란은 이념과 가치 수준에서만 진보와 개혁을 외쳤지 지성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준비된 것이 없는 데서 나온 것이라며 열심히 듣고, 공부하고, 성찰하면서 내적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내적 성장을 바탕으로 자신감을 갖고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도 대화하며 상생을 도모해나가자고 했다.

개인적으로, 학자로서 사회활동에 참여하면서, 나름의 선택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던 차에 이효재 선생과의 만남은 상쾌하고도 긴 여운을 남겼다. 그녀의 삶은 아름다웠다. 지금도 여전히 희망을 일구는 그녀는 더 아름답다.

김정인 참여사회 편집위원, 춘천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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