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6년 02월 2006-02-01   980

버마, ‘주권’과 ‘인권’의 화해에 이르기 위한 기나긴 고통의 여정

버마 민주화를 위한 행보


1988년까지 버마(BURMA)라는 국가명을 사용했으나, 그해 8월 버마 민주화항쟁에서 군부에 의해 국민들이 죽음을 당한 일이 전 세계에 알려지자 버마 군사정부는 이미지 쇄신을 위해 미얀마(Myanmar)라고 국가명을 바꿨다. 그러나 국민들의 동의 없이 한 개명에 대해 인정할 수 없었던 많은 버마 국민들은 버마(BURMA)로 개명할 것에 대한 투쟁도 함께 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버마(BURMA)로 국가명을 표기했음을 알려둔다. 편집자 주

버마, 군사정부의 건재 속에 최악의 인권상황

100여 년의 영국 식민지 역사 속에서도 전통에 대한 자긍심을 잃지 않고 민족해방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던 버마. 하지만 주권을 되찾고 58년이 지난 지금도 버마는 법치를 무시하고 있는 군사정부에 의해 국명조차 미얀마로 바뀐 채 최악의 인권상황, 최악의 경제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국제사회까지 나서서 아웅산 수지 여사의 가택연금 해제, 정치범 석방, 강제노역과 소수민족들에 대한 박해 중단 등 인권개선을 촉구하는 압박을 가하고 있지만 버마 군사정부는 요지부동이다.

지난 해 버마 군사정부는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인해 수치스럽게도 2006년도 아세안(ASEAN) 의장직을 포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버마 군사정부는 현재 수도 양곤에서 북쪽으로 320㎞ 가량 떨어진 산악지대 핀마나로 수도를 옮기기 시작하였다.

서방 선진국들은 군사정부의 폭압에 저항한 국민들이 유혈 진압된 1988년 8월 이후 버마에 대한 제재에 나섰다. 1990년 5월 총선 결과에서 완패한 군사정부가 권력을 이양하기는커녕 선거에서 압승한 전국민주동맹(NLD)의 지도자 아웅산 수지를 비롯한 주요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탄압에 나서자 서방 선진국들의 제재 수위는 점차 높아졌다. 그렇지만 군사정부는 통제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2003년 가택 연금 상태에서 풀려난 아웅산 수지가 지방을 순회하게 되면서 그녀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재확인되자 군사정부는 아웅산 수지와 그녀의 지지자들을 살해할 의도로 폭도를 투입하기까지 하였다. 이른바 ‘디페인 사태’다.

식민의 유산인 이념·종족문제 속에 부상한 군부

버마 사회에서 군이 절대권력을 누리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버마 독립투쟁의 영웅 아웅산 장군은 소수민족 대표들과 버마 연방의 기초를 다지는 ‘핀롱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정적에 의해 아웅산은 피살되었다.

버마는 1826년부터 2년 간에 걸쳐 영국과 치른 전쟁에서 무릎을 꿇었다. 1886년 1월1일 영국은 버마가 영국 식민지임을 정식으로 선포하였다. 이후 영국령 인도의 한 주로 편입되었다. 왕정이 폐지되고 화폐경제와 기독교가 급속히 유입되었다. 특히 기독교는 카렌, 친, 카친 등과 같은 소수민족 사회에 퍼졌다. 영국 식민당국은 불교를 자기 정체성으로 하고 있는 버마족을 철저히 불신하였다. 이들은 다수족인 버마족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변경의 소수민족들에 대해서는 그들 고유의 통치방식을 인정하며 간접지배 방식을 취한 반면 버마족이 거주하는 중앙 평지 지역은 식민당국의 직접 통치 아래에 두었다. 군도 대부분 소수민족 출신들로 채워졌다. 특히 기독교인들이면서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카렌족 출신이 우대를 받았다.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은 민족간 이간질을 획책하는 분할통치 하에서 그나마 교육기회를 누릴 수 있었던 소수의 버마족 출신 학생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민족주의 성향의 그들에게 전통 혹은 근대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무의미하였다. 그들은 근대식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열렬한 불교신도였으며 또한 사회주의적 이상을 키웠다. 제국주의 전쟁이 격화되자 아웅산을 중심으로 한 ‘30인 동지’는 버마독립군을 결성하였다. 독립투쟁 기간에 군과 민족주의 운동의 긴밀한 상호작용은 군의 위상을 높였다.

그렇지만 독립 직전 종족간 신뢰의 기틀을 마련한 ‘핀롱합의’가 아웅산의 피살로 깨져 버리자 버마군은 내전상황에 직면하였다. 한때 우 누 수상이 이끄는 신생독립정부는 영국 노동당 정부와의 교섭을 통한 평화적 독립에 반대했던 공산주의자들과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소수민족 중심의 반란군이 국토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수세에 몰렸다.

위기 속에서 군이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하였다. 위기는 1958년 민간정부의 요청으로 네윈을 우두머리로 하는 군이 치안회복과 선거시행을 위한 위기관리내각을 맡는 사태로까지 치달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집권 반파시스트인민자유연맹(AFPFL)은 우 누가 이끄는 ‘청렴파’와 우 바쉐와 우 짜 네인이 이끄는 ‘안정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들 간의 대립은 상이한 이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파벌간 다툼이었다.

군은 평화 회복과 법치 실현, 민주주의 실천, 사회주의경제 구축 이 세 가지를 과도정부의 목표로 선언하였다. 1958년부터 2년 가량 군은 침체된 경제를 회복시키지는 못했지만 질서회복과 물가안정에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1960년 선거에서 우 누의 ‘청렴파’가 군의 지지를 받은 ‘안정파’를 누르고 승리를 거둠에 따라 군은 다시 병영으로 복귀해야 했다.

민주화는 ‘아웅산 실험’의 성공적 재연을 의미

‘청렴파’가 선거에서 이겼지만 이들은 적지 않은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우선 선거공약에 따라 불교를 국교로 지정함에 따라 대다수가 기독교도인 카친족, 카렌족이 반발하였다. 여기에다가 샨주 지도자들은 연방으로부터의 이탈을 꾀하였다. 아라칸족과 몬족의 목소리도 커졌다. 우 누 정부는 소수민족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자 1962년 네윈이 이끄는 군이 국가분열의 위기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쿠데타를 단행했다. 학생조직들은 즉각 쿠데타에 반대했다. ‘사회주의로의 버마식 경로’를 기치로 내건 군사정부는 학생들에게 철퇴로 ‘응답’하였다.

반제국주의 투쟁의 진원지였으며 영국으로부터 독립 이후 무한한 자유를 누리며 존중받던 대학사회는 44년이 지난 지금도 군사정부 치하에 있다. 오랜 기간 반(反) 군부 전선에 동참하고 있는 버마족과 소수민족들은 그들간의 단합을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해 종족간 신뢰를 정착시킬 수 있는 새로운 헌법 기초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여러 종족으로 이루어진 버마사회에서 종족간의 신뢰 없는 민주화란 있을 수 없다는 뼈아픈 교훈의 결과다.

물론 군부의 개입을 유도했던 민족 간 불신은 과거 영국 제국주의가 활용하였던 분할지배의 산물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역사를 갖고 있는 서방 강대국들은 인권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버마 군사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버마군사정부는 이러한 ‘역설’을 극히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국가주의의 빌미로 악용해왔다.

한마디로 ‘사회주의로의 버마식 경로’는 ‘인권 없는 주권’의 극단적 사례다. 이는 일부 군부 엘리트들의 과거 식민지 경험에서 기인한 정신적 외상과 무관하지 않다. 주권과 인권의 화해를 추구해온 한국 시민사회, 아시아 시민사회가 ‘버마 문제’를 간과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버마 문제’가 강대국들의 패권전략에 악용되면서 ‘주권 없는 인권’의 수렁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주권과 인권의 화해를 시도하였던 ‘아웅산 실험’의 재연이 성공할 수 있도록 버마 민주화세력과 아시아 시민사회가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박은홍 성공회대 아시아NGO정보센터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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