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6년 12월 2006-12-01   827

고기를 먹다

지난 10월 29일 은 인간이 필연적으로 행하게 되는 ‘먹기’에 대한 윤리적 질문을 발생시켰다. 의식하지 못했던 살생의 과정과 이를 통해 얻어진 음식을 먹어 생존해야 하는 인간의 숙명에 대한 물음이었다. 미국산 쇠고기이든 한국산 쇠고기이든 음식은 필연적으로 무엇인가를 해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 생생하게 화면에 담아냈던 것은 조리된 음식 이면에 있는 보고 싶지 않던 시체와의 만남이었다.

그 즈음에 눈에 띄는 또 다른 뉴스가 있었다. <서울신문> 11월 18일 기사 ‘2056년엔 E.T.가 지구에 온다?’였는데 50년 뒤에는 “영장류, 포유류, 물고기를 포함한 척추동물 순으로 동물의 감정을 인간의 뇌에 전달할 수 있는 장치가 개발”된다는 기사였다. 그 결과 “지구인은 살코기를 먹는 데 혐오감을 느껴 모두 채식주의자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채식주의자가 되어도 상황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채식이건 육식이건 근본적으로 ‘먹기’는 나와 다른 무엇인가를 그 존재의 조건으로부터 분리시켜 내 속으로 소화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먹기’가 없이는 필연적으로 나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비약일지 모르겠지만 50년 뒤에 동물의 감정을 읽어내는 것이 가능하다면 100년 뒤에 식물의 감정을 읽어내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근본적으로 ‘먹기’는 내가 살기 위해 타자에게 해를 가하는 존재론적 숙명에 대한 딜레마를 담고 있다.

사실 조리의 과정은 이러한 필연적 살생의 과정을 문화적으로 감추는 행위이다. 어떻게 잘 요리하는가, 어떻게 시체를 시체로 보이지 않게 하는가가 조리의 문화적 의미이다. 날것과 익힌 것의 구분을 통해 야만과 문명을 구분했던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은 이에 기초한 것이었다. 한편 인디언들은 사냥한 짐승을 기리기 위해 제의를 행하였는데, 이 역시 문화를 통한 살생의 죄의식을 치유하려는 행위였다.

채식주의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견 채식을 함으로써 동물을 살생하지 않는 것 같지만 생명의 경계선을 동물과 식물로 나누는 것조차 문화의 산물인 셈이다. 더 나아가 미국산 쇠고기와 한국산 쇠고기의 구분 역시 -광우병의 전염 유무와 별개로- 신토불이와 같은 문화적 구별 짓기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딜레마의 문화적 치환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행할 수밖에 없는 행위이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는, 남을 해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문제는 그 거짓말과 폭력이 어떠한 효과를 내는가이다. ‘먹기’로 이야기 하자면 안 먹는 것이 아니라 ‘잘 먹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때의 ‘잘 먹는 것’은 나의 거짓말과 폭력이 타자에게 어떠한 효과를 내고 있는가에 대한 윤리적 성찰의 다른 표현이다. 문화에 대한 가치 평가를 내릴 수는 없겠지만 문화가 야기하는 현실 효과에 대한 책임이 윤리의 한축을 담당한다.

홍성일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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