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6년 12월 2006-12-01   611

반복되는 구태, 종지부를 찍자

꿈 많던 시절, 아주 잠깐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더랬다. 그냥 쓰면 되는 것을, 글 잘 쓴다고 소문난 이웃 오빠에게 ‘글을 잘 쓰려면 무에 필요해요’라고 물어본 것이 작가라는 꿈을 접은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오빠는 기억력이 제일이라고 답했다. 무언가 기억할라치면 까마득해지는 괴로움은 그 시절에도 가장 큰 고통이었기에 애면글면 노력할 필요 없이, 꿈을 접었다. 나를 괴롭히는 기억력 장애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최근에 기억력 장애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른바 ‘일심회’ 사건. 사건이 터진 후, 나는 아직 잡히지 않은 간첩처럼 불안해하면서 평소에 거들떠보지도 않던 TV 뉴스까지 꼬박꼬박 챙겨보았다. 난 간첩이 아니다. 하지만 나와 같은 생각, 나와 같은 대학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국가보안법 따위 등으로 간첩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십년이 지났는데도, 무고한 이들을 순식간에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던 그 시절의 공포는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어린 시절, 반에서 작은 물건이 없어졌는데 큰 도둑이 발생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범인을 색출하던 희한한 풍경과 그 없어진 물건이 꼭 내 책가방에서 나올 거 같아 가슴이 두근거린 때의 심경과 같다. 이런 끌탕의 바탕은 내 소심함이겠지만, 순수한 사회변화의 의지가 졸지에 반국가활동으로 둔갑하고, 이른바 간첩사건 하나 터지면 반드시 민주화 운동세력이 일망타진되는 그동안의 공포 체험때문일게다.

아직도 이 사건의 실체는 오리무중이다. 사건이 터졌을 당시 국정원장이 내로라하는 신문사 주간과 마주앉아 시시콜콜 사건의 개요와 수사의 방향, 사회에 미치는 파장에 대해 털어놓았건만 아직 먼지만 날리는 수준이다. 어쩌면 수사 결과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상사를 자기만의 프리즘으로 보는 것이야 나무랄 일이 아니지만, 남파 간첩 몇 명만으로도 남침을 상상하는 사람들의 프리즘 덕분에 이 사건은 386간첩단 사건으로 결말이 지어졌고, 시민단체 침투 혹은 연계설이 아무 근거 없이 보도되면서 시민단체는 북한의 쫄따구가 되었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간첩을 남파하는 북한 정권도 촌스럽지만, 그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미운털이 박힌 시민운동과 한 점이라도 연결을 해보려는 생청스러운 짓들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구태들과 종지부를 찍자. 그래야만 반에서 사소한 절도사건이 날 때마다 노심초사했던 병력(?)을 가진 나 같은 소심증 환자들이 발 뻗고 살지 않을까. 한 해를 마무리 하며, 좀 달라졌으면 하는 사회의 풍경이다.

간첩 사건과 관련해서 언론의 과감함이 몸글보다 더 중요할지 모르는 사족을 달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일심회 사건과 관련 조사를 받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시도 때도 없이 노출되었다. 때로는 모자이크된 수갑과 함께 말이다. 이런 현실이 바로 ‘형사 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 헌법 조문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고, 무심결에 그들을 간첩으로 기억하게끔 하는 것이다. 기억력 장애가 있는 나야 다행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쩔 것인가.

박영선 참여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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