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7년 04월 2007-03-29   1081

“우리는 모두 지구별 아이들입니다”

미니. 자꾸 입속에 굴리고 싶을 만큼 예쁜 이름이다. 참여사회에 실렸던 그의 글은 세상에 대한 관심과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따스하기만 했다. 삐뚤어진 고정관념으로 가득찬 내 머리속에 그가 남자가 아닌 것으로 입력된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나는 참여연대 사무실이나 집회 현장에서 그와 여러 번 마주쳤지만, 그가 미니인줄 몰랐다. 굳이 밝힐 필요는 없지만 그의 본명은 안영민. 그동안 나는 한 사람을 안영민과 미니 두 사람으로 알고 있었던 셈이다. 인터뷰 당일에야 비로소 그 둘은 ‘합체’가 되었다.

인터뷰는 서울 아현역 2번 출구에서 나온 후 롯데리아 골목을 따라, 신라마트 옆길로, 다시 은혜미용실 옆길로 올라가다보면 나타나는 백조사 세탁소 맞은편의 작은 살림방이 딸린 가게에서 이루어졌다. 친절한 약도 덕분에 쉽게 목적지에 도착하고도 정작 그곳이 그가 일하는 사무실인 줄은 몰랐다. 역시 내 고정관념이 문제였다. 하얀 종이에 달랑 <경계를 넘어>와 <팔레스타인평화연대>라고 씌어 있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겉모양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평화와 국제연대의 기운이 물씬하다. 플라멩코 기타연주자 아르믹의 음악,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짜서 보낸 올리브유, 네그로스 섬에서 건너온 필리핀 전통악기, 연대를 호소하는 세계 각국의 포스터 따위들과 옹색해 보이는 살림살이에 위안을 주는 몇 개의 초록 화초들. 그는 따스한 찻물과 깨끗이 씻은 과일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미리 준비를 하고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던가. 다시금 나의 삐뚤어진 고정관념이 발동한다. 미니는 남자가 아니라고 혼잣말을 삼키며 인터뷰 시작.

인도 불가촉천민 마을에서 국제연대운동 결심

미니. 현재 <팔레스타인평화연대>(이하 팔연대)와 <경계를 넘어> 상근 활동가. 몸으로, 글로, 말로 심지어는 라디오 디제이까지 하며 평화의 마음을 곳곳에 심는 활동가이다. 1972년 부산 출생, 롯데야구팀을 응원하고 문학전집을 읽으며 편안히 학교를 다니다가 고등학교시절 친구 따라 풍물패활동 시작. 이때부터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한국의 사회, 역사를 다르게 생각함. <부산지역고교생대표자협의회> 활동을 했는데, 고교학생운동을 하며 제 때 대학을 간 드문 경험을 가진 이로 기록됨. 대학 졸업을 앞두고 운동에 회의가 들어 학교를 그만둠. 다시 운동을 하는데 공부가 필요해 방송대 2년을 거쳐 성공회대 NGO대학원에 다님. 운동을 잠시 그만두던 동안에는 몸을 부지런히 굴림. 시급 4,000원을 받으며 고등학교 급식센터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한국사회의 모순을 한꺼번에 깨치는 행운을 얻기도 함. 여기까지가 그의 대략적인 인생소전이다.

그는 어느 글에서 “우리가 모두 지구별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이라고 했다. “대륙과 대양을 넘어, 시간과 시간을 이어 서로 연결되는 존재. 그래서 한 존재가 아프면 다른 존재에게 그 아픔이 전해지는 삶을 산다”고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가 지구별의 아픔을, 다른 존재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때부터 학생운동을 ‘쎄게’ 했던 그였지만,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기 위해 함정에서 쏘아올린 미사일을 보며 그저 “미사일이 날아가나 보다”라고 생각했을 만큼 지구촌 평화에 대해 그리 예민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청년이 ‘오랫동안 점령과 폭력 상황에 놓여 있는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바라고’, ‘민족, 국가, 종교, 성의 경계를 넘어 연대의 세계화를 꿈꾸는’ 사람이 되었다.

“2002년에 9개월 동안 인도의 보드가야에 있는 불가촉천민이 모여 사는 마을로 자원봉사 하러 갔어요. 병원에서 일했지요. 한국에서 생활할 때는 주로 정치적 민주화문제, 노동문제, 통일문제 이런 걸 생각하며 운동했는데, 꼭 이것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다른 것을 접해 보자는 생각이었는데, 마음을 굳히게 되었지요. 인도에 가서 보니까 정치적으로나 경제적, 문화적으로 모두 한국사회는 너무 살기 좋아요. 먹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국만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국제연대운동을 시작하게 됐어요.”

▲ 사회적 차별과 가난 속에 사는 인도 보드가야의 불가촉 천민. 마을 주민과 지내며 '내 나라'의 경계를 넘어 서는 운동가가 된 미니.(왼쪽에서 3번 째) 

이스라엘 검문소에서 안 피우던 줄담배 피운 이야기

말이 통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았던 인도. 그저 같이 있으니까 좋은 사람들을 떠나 한국에 돌아온 뒤 시쳇말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필이 꽂힌 후 무작정 2003년 <팔연대>의 문을 열었다. 팔레스타인의 인권과 평화와 관련된 활동이 전무한 한국에서 무모하다고 할만 했을 텐데, 그는 “뭘 알아서가 아니고, 누군가 궁금하면 물어볼 데가 한군데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하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현재 170여 명의 회원들이 언론에서 접하기 어려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하고, 이스라엘이 자행하는 폭력과 인권유린을 글과 사진으로 알리는 웹진을 운영하고 있다(www.pal.or.kr).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팔레스타인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만나 팔레스타인 사람들 이야기를 전하는 것.

2006년에는 팔레스타인도 직접 다녀왔다.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지요. 아마 그냥 여행 삼아 가면, 성지 여행으로 많이 가잖아요, 별 문제 없어 보이겠지요. 하지만 속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만나보고 경험해보면 다른 세계가 있어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기 땅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운 수많은 검문소에서 시시때때로 검문을 받아야 해요. 생계 때문에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왜 가냐, 언제 돌아올 거냐는 식의 똑같은 질문을 해대는 거 보고 열 받아서 안 피던 담배를 줄기차게 피워댔지요. 또 갑자기 통지서 한 장 달랑 보내고 나가라고도 하지요.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상황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점령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을 체험한 다음에야 비로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분노가 이해되지요.”

▲ <경계를 넘어>는 활동가들과 방문하는 회원들과 함께 직접 밥을 해 먹는다. 이 날도 인터뷰차 방문한 참여연대 일행들에게 손수 된장국을 끓이는 등 소박하고 따듯한 밥상을 차려 주었다

테러가 아니면 관심 받지 못하는 약자

하지만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우리에게 사각지대이다. 이스라엘이 무력을 사용하면 정당한 공격이 되지만, 팔레스타인이 무력을 사용하면 테러가 되는 현실에 의문을 갖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와 달리 팔레스타인의 디아스포라는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자살폭탄테러 이미지 때문일까.

“팔레스타인은 약해요. 그래서 무력적 방법으로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어요. 노동자들이 파업만 하면서 살 수 없듯이 매번 폭력을 쓰는 게 아니잖아요. 폭력은 어떤 목적으로 누가 사용하는가 하는 점에서 생각해봐야 해요.”

그러면서도 그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왜 폭력을 사용하는지 물어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끝내 물어볼 수 없었단다. 왜 묻지 못했는지 대답을 듣고 싶었지만, 그는 “우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본 것을 그대로 전해 달라.”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얘기를 대신 전해준다. 그가 그들에게 미처 묻지 못한 질문, 우리에게 미처 하지 못한 대답은 무엇일까. 폭탄하나 터뜨려야 관심을 갖는 세상은 눈물나게 비참하고 슬프다.

밤길에 봉변당하는 사람 위해 함께 소리쳐 주자

“제가 팔레스타인 평화 운동을 30년 한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바뀐다고 생각진 않아요. 음, 예를 들어 밤에 길을 가다가 죽도록 맞고 있다고 해봐요. 맞는 것도 아프지만 나 혼자 맞고 있다는 두려움이 더 크잖아요. 지나가던 사람들이 때리지 말라고 얘기해주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힘을 얻게 되구요. 마찬가지예요. 사람이 당할 때는 혼자 당한다는 고립감이 큰데, 혼자가 아니다, 저 먼 곳에서 팔레스타인 평화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다면 힘을 받겠지요. 또 저는 그토록 어려운 상황에서도 저보다 평온한 얼굴을 하는 있는 그 사람들을 보며 또 힘을 받거든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소식을 전하며 “서로의 존재가 서로에게 힘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2004년 ‘한국이라는 경계를 넘어 세계를 바라보자’며 국제연대를 고민하는 사람들과 함께 <경계를 넘어>(www.ifis.or.kr)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른바 진보진영조차 새로운 세상을 구상할 때 한국 사람들만의 새 세상만 생각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새 세상에 누가 살 것인지를 살펴볼 때, 한국 사람만 생각하고 아프가니스탄 사람을 생각하지는 않는 거 같아요. 일부러 배제하지는 않았겠지만, 한국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세상을 적극적으로 구상하고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요?”

<경계를 넘어> 활동 덕에 방글라데시의 줌마 사람들 네트워크(www.jpnk.org)가 만들어지는 등 한국 국제연대운동은 더욱 촘촘해졌다.

낙관과 능동이 함께 하는 삶

두 단체를 합쳐도 회원은 아직 300명이 채 안 된다. 최근에 팔레스타인산 올리브유와 필리핀산 유기농 설탕 판매 등 몇 가지 수익사업을 시작했지만, 그 정도 회원 규모로는 불편하게 운동을 하는 상태. 살림을 꾸려가기가 어렵다고 짐짓 앓는 소리를 할만도 한데, 그는 “전 세계 인구 중에서 자기 컴퓨터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몇 명일까요? 하지만 우리는 자기 컴퓨터 가지고 운동하잖아요.”라며 ‘상황이 좋다’고 생각한단다.

시야를 넓히면 낙관이 덤으로 같이 찾아오는 걸까. 그는 운동가의 자세에 대해서도 한마디 덧붙인다.

“재정이 어려우면 나가서 일해야죠. 활동가가 임금노동자가 아니잖아요. 처음에는 세상을 바꾸자고 모였는데, 어느 틈에 사무직 노동자가 되어가고 있는 경우도 있어요. 단체에서 나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저 자신도 그렇고 언제든지 필요하면 활동 중단하고 나가서 몇 달 돈 벌어 다시 활동할 수 있다고 봐요.”

그는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달랑 얹어놓고 생색내기를 일삼던 나와는 퍽 대조적으로 직접 밥상을 차리며 아니, 상차림꺼리를 준비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갑자기 아득해지는 내 마음.

한계는 줄이고 가능성은 키워가는 길

 

삶의 가닥을 모두 꼿꼿한 운동의 원칙으로 매듭지우는 그이지만, 세상의 변화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넉넉하기만 하다. “하루아침에 세상을 확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이 비참의 세계를 조금씩 바꿔야 합니다. 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면 바꾸지 못한 채로 슬픈 일들이 늘어날 테고, 바꾸면 바꾸는 만큼 기쁜 일들이 늘어날 것”이라며 울리히 백의 은유처럼 지네가 기어가듯이 세상을 바꾸는 실천을 하고 있다.

그는 때때로 우리에게 “여러분은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아마도 그런 과감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사람에 대한 희망’이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라크에서 어린애들이 죽거나 말거나 오늘 저녁에 맛있는 거 먹는 게 더 중요한 것이 사람입니다. 하지만 지하철에 앉아 있다가도 몸이 불편하거나 약한 사람이 오면 자리를 비켜주게 되는 것도 역시 사람이지요. 세상엔 한계만 가진 사람도, 가능성만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잘 사는 길은 한계를 조금씩 줄이면서 가능성을 조금씩 키워가는 거겠죠?”

그의 ‘사람운동론’의 고갱이다.

박영선 「참여사회」편집위원, 참여연대 전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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