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7년 04월 2007-03-29   1312

진보(進步)의 짧은 이력서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했던가? 서양에서 들어온 ‘진보’라는 놈이 객지에서 솔찬히 욕보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자신을 ‘좌파 신자유주의자’라고 이름 붙였던 노 대통령이 불쑥 진보논쟁에 뛰어드는 바람에 진보의 굴욕이 시작되었다. 아마 자신을 스스로 진보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좌파 신자유주의자가 이번에는 ‘보수적 진보주의자’라고 거들먹거리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쯤 되면 모든 개념들이 정신분열을 일으키거나 다중인격장애에 시달릴 법도 하다.

고향 로마에서 ‘프로그레서스(progressus)’라고 불리던 진보는 1789년 프랑스대혁명을 계기로 세상에 그 이름을 뚜렷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진보는 늘 좌파, 좌익, 혁명과 같은 친구들과 붙어다녔다. 진보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손을 잡고 자본주의가 새롭게 만들어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해방을 위해 세상을 뒤집어엎고자 했다. 물론 프랑스대혁명의 진정한 소울 메이트는 포르노였다는 주장도 있다.

역사학자 로버트 단턴은 18세기 프랑스 국경 마을에 있던 뇌샤텔 출판사가 남긴 5만 여 통의 편지와 장부책을 발굴하여 프랑스대혁명 이전에 민중들이 즐겨 읽던 금서를 분석했다. 그는 당시의 베스트셀러는 볼테르, 디드로, 루소, 몽테스키외 등이 쓴 계몽서적이 아니라 정치적 중상 비방문과 파렴치한 추문류, 그리고 포르노그라피였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한편, 프랑스대혁명을 눈엣가시처럼 시샘하던 에드먼드 버크는 1790년에 「프랑스혁명에 대한 성찰」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보수주의자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지만, 사실 그는 이 글 속에서 ‘보수주의’라는 명사를 사용한 적이 없다. 다만 ‘보존하다(conserver)’는 동사만을 사용했을 뿐이다. 이후 샤토브리앙이 『보수주의자(LeConservateur)』(1818)라는 간행물을 발간하면서 보수주의가 비로소 세상에 명함을 내밀기 시작했다. 보수는 주로 우파, 우익, 수구와 같은 녀석들과 어울려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보수주의는 틈만 나면 자유주의와 한패를 이루어 산업혁명으로 형성된 부르주아 계급의 밥그릇을 단단히 지켜주기도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진보라는 개념은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을 떠돌다가 19세기에 이르러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입항하게 되었다. 일본에 입항한 ‘프로그레스(progress)’는 창씨개명 권유를 받아들여‘진보(進步)’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진보는 ‘문명’이나 ‘개화’와 같은 낯선 친구들과 함께 일본에 들어갔으며, 당시 유행하던 사회진화론과 뜨거운 연애를 했다. 사회진화론은 다윈의 생물진화론을 그대로 인간사회에 적용하여 우월한 민족은 승리하고 열등한 민족은 패배한다는 인종주의적이고 차별적인 편견이 담긴 유언비어를 퍼트린 것으로 악명 높다.

조선으로 건너온 진보

얼마 후 사회진화론과 결합한 진보라는 새로운 개념은 옴팡 쥐 마냥 조선에도 은근슬쩍 발을 들여 놓게 된다. 윤치호는 1884년 6월 14일(음력 5월 21일)자 일기에 “아버지의 일이 어찌 우리 집의 사사로운 일이라 하겠는가? 이는 개화와 진보를 위한 큰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은 무과에 급제한 무관으로 1880년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을 다녀온 후,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부친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윤치호는 1881년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에 파견된 어윤중의 수행원 자격을 얻었다. 그는 일본에서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도진샤(同仁社)에 입학함으로써 유길준과 함께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되었다. 도진샤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와 더불어 메이지 시기의 개화사상가로 이름을 날리던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가 설립한 학교였다. 그가 일기에 쓴 ‘개화’나 ‘진보’와 같은 일본에서 만든 근대번역어를 처음으로 접한 것은 아마도 일본 유학 시절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에서 진보나 개화라는 근대 번역어는 예전에는 전혀 듣도 보도 못했던 낯선 단어였으므로 그 개념 자체가 명확하지 않고 추상적이고 다의적이었다. 또한, 이들 번역어는 조선 땅을 밟자마자 좋다 혹은 나쁘다는 것과 같은 색깔이나 가치를 부여받았다. 어떤 사람은 개화나 진보 같은 낯선 말을 접하고는 ‘혼란’이나 ‘지옥’을 떠올렸을 테고, 또 다른 사람은 ‘뭔가 매우 위대하다.’라고 느꼈으리라.

19세기 말에 조선에 들어온 진보라는 말은 일제 초기까지 개화, 계몽, 문명, 친일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904년 2월, 이용구는 일본에 망명 중이던 손병희의 지령을 받고 동학의 잔여세력을 그러모아 ‘진보회’를 결성했다.

초기에 진보회는 부패한 정부를 탄핵하고 교육·산업의 부흥을 주장했으나, 얼마 못 가서 친일단체로 전락하여 1904년 12월 일진회와 통합되고 말았다. 같은 해 7월 22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대한제국 외무대신 이하영 앞으로 일본군의 작전상 필요로 한국의 치안을 담당하겠다는 조회를 보내면서 그것이 곧 ‘진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1910년 대한제국의 전·현직 관리들이 만든 친일단체인 정우회의 정강에도 ‘개명진보(開明進步)’를 기도(期圖)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김종한, 민원식 등이 주도했던 정우회가 내걸었던 정강은 이른바 ‘좌파 신자유주의’의 단골메뉴와 얼추 비슷했던 것 같다. 그들은 명목상으로 황실 존영(皇室尊榮), 교육 진흥, 산업 발전, 사회 개량,빈민 구제, 한일 친선을 도모하려 했다. 엉뚱한 데서 얼굴 마담 노릇을 하던 진보는 러시아 혁명 이후 식민지 조선에 사회주의 사상이 들어오면서 그야말로 깨복장이 동무였던 좌파나 혁명과 재결합하였다. 아울러 진보는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독립이나 민족해방 같은 새로운 벗들과도 사귀게 되었다. 물론 조선총독부는 이들을 불령선인 또는 마적이라는 딱지를 붙여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일제 패망으로 해방을 맞이하게 되자, 진보는 잠깐이나마 좋은 시절을 누리기도 했다. 학자들은 건국준비위원회, 조선공산당, 남조선노동당, 근로인민당, 신민당, 민전 등을 해방공간에서 활동했던 진보세력으로 분류하고 있다.

진보는 진보할까?

그러나 진보는 미군정, 남북분단,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빨갱이로 몰려 엄청난 마녀사냥을 당해야 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무자비한 독재정권은 ‘반공반북’을 표면으로 내세우며 진보의 싹조차 틔우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통제해왔다. 1956년 조봉암을 중심으로 결성된 진보당은 대표적인 마녀사냥의 희생자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진보당 당수 조봉암을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이라는 덫을 놓은 후, 간첩이라는 낙인을 찍어 사형시키는 악행을 저질렀다. 한국사회에서 진보가 다시 새로운 싹을 띄운 것은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의 희생을 바탕으로 일어난 1987년 6월 항쟁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진보의 나무가 채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엉뚱한 돌연변이가 발생했다. 그뿐만 아니라 진보의 전진을 가로막는 신자유주의, 사회양극화, 이라크전쟁과 파병, 북핵문제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한미FTA라는 장애물이 나타났다. 과연 21세기 진보는 이러한 돌연변이와 장애물을 극복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박상표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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