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7년 04월 2007-03-29   846

길에 나선 아이들

큰 아이가 초등학교 병설유치원에 입학한 뒤로 6년 동안 아침마다 아이를 학교까지 차로 태워다 주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초보운전임에도 스노체인도 걸지 않은 채 눈 쌓인 언덕을 오르내렸다. 감기로는 학교를 쉬게 할 수 있어도 교통편이 없어 결석시킬 수는 없다는 엄마의 소박한 신념이 무모한 도전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오늘 그 일을 그만두었다. 학교버스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통학버스를 놓칠세라 초등학교 6학년, 1학년인 딸아이들은 부지런을 떨었다. “이봄아! 빨리 나와!” “배하늘! 학교 가자!” 이웃의 동생들을 재촉하는 큰애의 목소리가 쌀쌀한 아침 공기를 기분 좋게 가른다. 울긋불긋 차려입은 네 명의 계집아이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 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기도 하면서 마을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가슴 뭉클하게 정겹다. 유리창에 붙어 서서 아이들이 버스를 타러 큰길까지 걷는 모습을 눈으로 좇는다. 아이들이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거의 감격을 느낀다.

어린 시절 나의 통학길이 떠오른다. 버스도 다니지 않는 벽지였다. 2㎞ 남짓한 거리를 걸어 다녔다. 길에는 햇빛도 내려오고 비와 눈도 왔지만 길의 주인은 역시 바람이었다. 옷깃을 세우고 앞섶을 아무리 단단히 여며도 옷 속으로 파고드는 칼바람, 조그만 몸을 날려버릴 것 같은 세찬 바람. 그곳은 섬이었다. 신체검사 하니까 밥 먹지 말고 일찍 오라고 해서 빈속으로 어둑한 눈길을 걸었던 1학년의 어느 날이 어쩐 일인지 기억에 남아있다. 큰비가 내린 날 꿈틀대는 지렁이들이 징그러워 팔짝 팔짝 뛰던 일도 떠오른다.

경찰지서 앞을 지날 때 땀을 뻘뻘 흘리며 내달리곤 했던 겁 많은 나는 이 일로 꽤 오래 웃음거리가 되었다. 우마차를 얻어 타거나 경운기 꽁무니에 매달려가던 장면도 추억의 사진첩에는 꽂혀 있다. 탐조등이 재빠르게 주위를 훑어가는 것처럼 해와 구름의 장난질로 들판의 이쪽부터 저쪽 끝까지 음지와 양지가 순식간에 뒤바뀌던 풍경은 볼 때마다 신기했다.

추억은 길처럼 이어진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신작로의 여름은 숨이 막힐 듯 했다. 그늘 한 조각, 바람 한 점 없는 하굣길엔 이파리 무성한 가로수가 즐비하고 가지마다 시원한 얼음과자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상상만으로 더위를 쫓을 수 있었다. 사내아이들은 상상력이 부족했던 듯 길가 밭에 뛰어들어 오이, 참외를 따먹으며 갈증을 달래기도 했다.

멀리서 눈에 띄는 노란색 통학버스가 다가온다. 버스를 기다리고 선 아이들 못지않게 내 마음도 설렌다. 갓길 없는 국도에는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시골에서 아이들은 다리의 자유를 빼앗겼다. 집에서 목적지까지 승용차가 오간다. 결과만 알 뿐 과정은 잘 모르는 아이들. 차창으로 불어오는 봄바람이 단 줄은 알아도 몸으로 맛보는 봄바람이 어떤지는 잘 모르는 아이들. 아이들에게 길을 되돌려주어야겠다.

고진하 (참여사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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