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7년 04월 2007-03-29   448

잘 통하는 개구쟁이

그건 정말 미친(?) 짓이었다. 천식과 비염 등 각종 호흡기 질환을 앓고 있고, 아토피도 심하며 조직 생활 경험은 전혀 없다. 더욱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체력장 검사를 하면 ‘단 한 차례 예외 없이’ 5등급을 맞았던 내가 부모님 몰래 아버지 도장을 가지고 병무청 찾아가서 ‘해병대 입대 동의서’에 철커덕 서명을 해버린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어느 정도 ‘비장한’각오도 품고 있었고 나름대로 ‘달라져야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택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 사람 일이 의지만 있다고 순탄하게 이루어질 리가 있겠는가. 입대 첫 날부터 체력문제로, 또 조직생활경험이 없다는 문제로 크고 작은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러던 내가 무사히 복무를 마칠 수 있었던 건 첫째로내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가장 컸고, 둘째로 이제 소개하려는 내 선임 덕이리라.

“송영준! 왜 이렇게 쫄고 있어? 네가 뭐 못 올 곳에 왔어?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야.”

처음에 그가 내게 했던 말이다.

이진우 해병님(해병대에서는 웃기수의 선임들은 모두 ‘해병님’이라고 부른다)과는 같은 실무에 배치되어 같은 내무실을 쓰게 되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공통점이 많아서일까, 처음부터 그와 나는 통하는 게 정말 많았다. 같은 기독교인이고 같은 은평구에 살며, 해병대 내 여러 문제점들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군기 드센 해병대 생활을 하기에는 둘 다 너무 ‘개구쟁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부대 안에서 큰 실수를 했거나 다른 선임들에게 혼날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달려와서 내 편이 되어준 사람은 항상 이진우 해병님이었다.

“힘든 일이 있으면 항상 내게 말해.”라며 늘 위로와 힘이 되어주셨던 선임이다. 수송병이었던 그가 포병연대 본부에 갔다 오거나 할 경우, 내 사물함 안에는 항상 빵 등의 먹을 것이 듬뿍 담겨 있었다(군복무를 해본 사람들은 빵의 ‘소중함’을 잘 알리라). 과업 및 기타 작업 시간 중에도 둘이 살짝 빠져나와 ‘드라이브’를 하기도 하고, 장교식당으로 침투해서 장교인 양 행세하며 ‘삼겹살’을 구워먹는 ‘대담한 도전’을 하기도 했다. 2002년말에는 ‘해병노사모(가칭)’을 조직해 “우리 군인들이 자기 아들 군대 안 보낸 이회창을 찍어서야 되겠는가?”라며 선거운동을 하기도 했고, 어느 정도 계급이 올라간 후부터는 ‘구타 없는 해병대, 도둑질 하지 않는 해병대’를 만들기 위해 둘이 힘을 합쳐 이런저런 노력을 하기도 했다.

솔직히 25개월이 조금 넘는 해병대 생활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건 사실이다. 때로는 선임들의 괴롭힘과 종종 발생한 구타 및 성적 고문은 지금도 생각하기 싫은 순간으로 남아 있다. 하루에 몇 번이고 탈영하고픈 유혹 속에서도 적응해 나갈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전역 후에 군생활을 돌아보며 미소 지을 수 있는 건,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는 중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고, 나 역시 작년부터 대학을 다니고 있어 서로 만날 일이 굉장히 뜸해졌다. 그러나 최근에 좀 보기 어렵다고 하는 것이 무슨 큰 대수이겠는가? 내 생에 가장 힘든 순간을 함께 해쳐 온 그이기에 내 가슴 속에 잊을 수 없는 존재로 깊이 남아 있는데 말이다.

송영준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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