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04월 2009-04-01   1246

삶의 길목에서_나를 위한 변명, 사교육의 화신부터 맹모까지




삶의 길목에서 나를 위한 변명
사교육의 화신부터 맹모까지




고진하 참여사회 편집위원


요즘 내가 주위의 여러 사람을 놀라게 한 것 같다. 외국 나간데. 어디? 필리핀이래. 언제 오는데? 내년에. 그렇게나 오래?

아이들은? 데리고 간데. 무슨 일로? 뭐, 여행 겸 어학연수 겸 이래. 아이들 학교는 어쩌고? 정말 뜻밖이다…….

뭐 대충 이런 정도의 대화가 요새 내 귀를 가렵게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나의 이웃은 나보고 농반진반 “사교육의 화신”이라고 했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사교육이라곤
아이들이 원했던 피아노 학원 말고는(그것도 절반의 이유는 통학수단으로) 학습지 한 장 시켜준 적이 없는 내게 말이다.

시골로 이사와 날마다 도시로 거의 초인적인 출퇴근을 하고 있는 그는 시골살이의 애환을 함께 나누어온 이웃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기분이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맞벌이를 하면서 남편보다 현실감각이 더 있어 보이는 그의 아내는 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갑작스런 나의 결정에 당혹스러운 기분은 같았겠지만 곧 방학 동안만이라도 자신의 큰 아이를 내가 가는 곳으로 보낼 수 없을까 궁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둘은 도시 아파트 지역의 살인적인 사교육 열풍에 대해 어떤 사람이 했다는 “옆집 엄마 말 한 마디에 무너지지 말자”라는 구호에 고개를 주억거린 지 겨우 며칠 만에  바로 그 말의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갑작스런 나의 출국 소식에 한 지인은 나에게 “맹모孟母”라 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자연 속에서 키우겠다고 시골로 갔고, 이제는 외국으로 나가려는 나를 보고 그녀는 자식의 장래를 위해 세 번의 이사를 감행하는 치열한 교육열로 청사에 길이 남은 옛 성현의 어머니를 떠올렸나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자식에의 무한한 헌신에 대한 찬양만은 아니었다. 그 결정 속에 자신에 대한 배려는 들어 있는지, 아이들 챙기느라 더 공부하고 경력을 쌓아야 할 자신의 인생은 정작 내팽개쳐놓고 있는 건 아닌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는 말로 받아들여졌다. 사교육의 화신부터 맹모까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효율적으로 제공하는 용단’이라는 지지에서부터 ‘살아온 이력으로 볼 때 영 뜻밖의 결정’이라는 의심의 눈초리까지 받고 있는 나를 위해 구차하지만 변명을 좀 해보련다.

먼저, 이번 여행은 아이들의 영어 공부를 위해 오래 계획하고 추진해온 일이 아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내 머릿속에 이 계획은 들어 있지 않았다. 지난달 다른 지인에게 그녀가 두어 차례 다녀왔던 필리핀의 어느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조용한 여행지로도 손색없고, 어학연수라는 부수적인 효과도 거둘 수 있으며, 비용도 그리 많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나는 ‘보름 동안 유럽 몇 개국 일주’ 식의 주마간산 여행은 질색을 하는 사람이다. 이전에도 두 차례에 걸쳐 한 달씩 집 떠나 다른 고장에서 머무는 여행을 한 적이 있다.

빈 집이나 민박을 얻어 지내며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집에서처럼 꼬박꼬박 하루 세 끼 밥을 짓고, 아이들 공부도 시키고, 간식을 만들어 구경을 다녔다. 집에서 그곳까지 오고 간 교통비와 사글세 외에 나는 여행경비를 평소의 생활비로 충당할 수 있었다. 1년간의 필리핀 체류는 그런 여행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무대가 국내에서 국외로, 기간이 한 달에서 1년으로 확장되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아이들 학교까지 쉬게 하고 여행을 간다는 대목에서 많이들 걸려하는 것 같다.

중학생인 큰 아이는 67일 이상인가 결석하면 유급이 되어서 다니던 학년부터 다시 다녀야 한다고 한다.

대개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 있는 것에 대해 사회의 정상궤도를 이탈한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는 것 같다.

우리가 언제 학교에 다니기 위해 태어났나? 그런데 적어도 이 나라에서 사람은 학생이 되기 위해 태어나는 것 같다.

아이는 반드시 학생이 되어야 하고,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 한다. 그런데 그 공부도 학교와 학원에서만 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하는 공부란 것이 인격이나 품성, 소질과 적성을 갈고 닦는 것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그런데도 아이가 공부하고 있을 때 부모는 가장 흐뭇해한다. 청소년 자녀가 학교, 학원, 독서실에 있을 때만 부모는 안심한다.

거의 모든 가정의 가훈은 사실 “(좋은) 학교에 가자”가 아닐까 싶다.

장구한 인류 역사에서 학교는 최신 발명품에 속한다. 그렇다면 근대 교육제도가 생기기 전엔 교육이 없었나?

우리는 학교 밖에서는 배우지 못할까? 큰 아이 담임선생님께 학교가 아니라 학원만 보낼 거라고 말씀드렸을 때 무심코 ‘무단결석’ ‘불법 유학’ 운운하셨다. 그래서 합법적인 교육기관으로 공부를 하러 간다고 부모가 미리 알리는데 ‘무단’ ‘불법’이 무슨 소리냐고 엄중하게 항의했다. 나는 아이가 감기몸살을 앓거나 생리통이 심하면 학교를 쉬게 한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원하는 고등학교를 가려고 할 때 결정적인 결격사유가 되어 이미 경쟁에서 탈락한 것과 다름없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국내 굴지의 기업이 졸업자가 아니라 졸업예정자를 채용하는 사원 모집 광고로 물의를 빚었다는 것도 엊그제 들었다.

이런 세상에서 남보다 한 해 늦게 학교를 다니는 일은 여간 불안한 일이 아니겠구나 싶어 이해도 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국제중→특목고→명문대→일류 직장으로 이어지는 길을 획일적으로 강요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결승선에 서서 도착해야 할 시간까지도 재고  있다. 햇살과 바람을 느낄 틈도, 시원한 물 한 잔으로 타들어가는 목을 축일 틈도 허락하지 않는다. 학교란 문턱을 간신히 넘으면 사람들은 그 다음에서는 “집은 어떻게 하고?”를 물어온다.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날마다 밥상을 차려주어야 할 사람이 아이들 말고는 없다. 밥을 주어야 할 개가 있었지만 지난 겨울 죽어버렸다. 집은 그냥 비워둘 거라는 말에 사람들은 아무래도 수긍이 되지 않는 표정이다.

겨울에 수도라도 얼어 터질까봐 걱정일까? 도둑이 들어 홀라당 털릴까봐, 아니면 집을 훌쩍 들고 가버릴까 봐 걱정일까?

집을 비워두는 것이 왜 그렇게 염려스런 일인지 나는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 학교와 집에 대한 애정이 유난한 것인지, 익숙하고 편안한 것에 대한 집착이 유난한 것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그것도 농경문화와 유교문화의 소산이라고 이해해야 할까? 아무튼 보리차 주전자를 불에 올려놓으면 십중팔구는 반도 안 되게 졸아들어 보리 탕약이 되어야 달려가곤 하는 건망의 나이에 내 삶의 길목이 아시아의 어느 나라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뜨거운 남국으로 이어진 ‘삶의 길목’을 변함없는 애정으로 지켜봐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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