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02월 2010-02-01   1587

최성각의 독서잡설_땅을 갖고 장난치면 안된다


땅을 갖고 장난치면 안 된다

최성각 작가, 풀꽃평화연구소장

나는 종교가 없다. 그렇지만 태어나 오십 중반이 넘도록 살면서 만난, 많지는 않지만 몇 성직자들에 대한 깊은 존경심은 감추고 싶지 않다.

대천덕 대천덕戴天德 신부님도 그분들 중의 한 분이시다. 신부님을 처음 만난 때는 1980년 여름이었다. 멀리 남녘에서 대학살이 일어났다는 풍문을 나는 광산촌에서 들었다. 20대 중반, 나는 광산촌의 교사였다. 학살을 알게 된 이후, 무슨 일을 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남쪽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 학살극에서 내 역할은 다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 슬픔은 나를 자주 무기력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비참한 슬픔’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 한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대학을 아주 잠깐, 같이 다녔던 친구였다. 그 역시 앓고 있었다. 앓다가 문득 내 생각이 나서 찾아왔다고 했다. 검은 물이 흐르던 광산촌에서 나는 친구와 갈 곳이 없었다. 문득 하사미 예수원에 대천덕 신부님이 계신다는 것을 떠올렸다. 어쩌면 친구와 그곳에 가면 늘 체한 듯한 답답한 가슴과 만성 우울증에서 잠시라도 벗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지에서 하장면 하사미로 가는 버스를 탔다. 1980년 황지는 비록 전성기는 지났지만, 아직 땅속의 석탄을 활발하게 지상으로 퍼 올리던 시절이었다. 황지연못 옆 버스 정류장의 파인 도로에서는 검은 먼지가 진종일 피어올랐고, 비라도 내릴라치면 장화 없이는 다닐 수 없는 형편이었다. 버스 정류장 언저리에는 전국 팔도에서 탄 때문에 모여든 사람들이 광대뼈 튀어나온 거무튀튀한 얼굴로 늘 잡답을 이루고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유행가가 뿜어져 나왔고, 읍내 어디를 가나 섬뜩할 정도의 활기를 뿜어내곤 했다. ‘빨간마후라’는 동대문 너머 동편에서 가장 큰 조직폭력배를 지칭했는데, 돈이 많이 도는 황지가 그 터전이었다.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조폭들이 손도끼를 들고 싸우는 것을 본 적도 있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하사미 예수원까지는 당시의 도로사정과 버스 노선으로 한 시간 남짓 걸렸던 것 같다. 하사미에 이르기 위해 넘어야 하는 피재를 대천덕 신부님 일가는 ‘한국의 애팔래치아 산맥’이라 불렀다고 한다. 애팔래치아 산맥은 젊은 신학도였던 아처 토리 3세(대천덕 신부의 본명)가 캠프 안내원으로 20시즌 이상 오르락내리락 하던 곳이었다. 신부님은 그가 하사미에 오기 전에 일하던 성미카엘신학원(현 성공회대)의 원장직에 안주하기에는 피가 뜨거운 사내였던 것 같다. ‘말씀’을 현장이 아닌 곳에서 읊조리기에는 성이 차지 않는 젊은 목자였던 것 같다. 당시 삼척군 하장면 하사미는 지금도 그렇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지였다. 버스도 드문드문 있었다. 비포장의 그 길로 직행하면 정선 동면이 나온다. 대낮에도 신작로에 멧돼지가 떼를 지어 튀어나오곤 했다. 신부님은 바로 그곳이 이 땅에서 가장 춥고 황량한 산골짜기 오지이기 때문에 자리 잡았다고 하셨다. 어느 시대에도 이상한 사람은 있는 법, 대천덕 신부님도 이상한 분이셨다.

태백에 있는 '예수원' (사진출처 :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381950.html)

지금은 예수원 입구에 토지정의에 특히 집중한 신부님의 사상이 요약된 레위기 25장 23절,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이 커다란 돌에 새겨져 연중 1만여 명의 손님을 맞이하고 있지만, 30년 전 내가 찾아갔을 때에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이 돌에 새겨져 있었다. 1964년 대천덕 신부님이 예수원을 건립했을 때에는 “누구든지 오시라, 그리고 같이 소매 걷고 일하자”는 게 모토였다. 오겠다고 언약한 사람들은 오지 않았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산비탈의 바위 위에 한 채 한 채 집을 지었고, 돌밭을 일궈 채소를 심고, 흑염소를 키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편쟁이도, 전과자도, 흉악범도, 폐병장이도, 술주정뱅이도, 전직 깡패도 신부님은 가리지 않고 환색하며 맞이했다. 훌륭한 사람의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사람을 가려 대하지 않는 사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일약 시민운동으로 명망을 얻은 성직자들을 가까이에서 봤더니만, 사람을 그 학벌과 직위와 신분으로 은근슬쩍 가려 대하기 시작해 닭의 쓸개를 씹은 심정이 된 기억이 있다.

내가 예수원에 갔을 때에는 마을길에서 2킬로쯤 산길을 오르는 길가에 컴프리가 지천으로 심어져 있었고, 가파른 산등성이에는 흑염소 떼들이 울고 있었다. ‘예수원’이라는 이름은 후일 발생할지도 모를 그 집의 주인이 누구냐는 논쟁을 애초부터 차단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공의公義에 대한 깊은 감수성을 지닌 신부님은 몸이 따르지 않는 ‘말의 신앙’을 공허하다고 여겼고, 그가 모방하고 싶은 예수처럼 가난한 사람들만큼 낮아지려고 했던 것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라”, 이 말은 참으로 간단 명쾌하고 깊어서 “밥이 곧 하늘이다”라는 뜨거운 시詩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사실 이 간단명료한 진리는 무학의 내 아버지로부터도 자랄 때 늘 듣던 말이기도 했다.

“땅을 사고파는 건 죄악입니다”

나는 친구와 예수원에서 하룻밤을 잤다. 딱 하룻밤이었다. 오후 녘에 도착해 이튿날 아침을 얻어먹고 하산했을 뿐이다. 신부님은 험한 길을 찾아온 우울해 보이는 젊은이들을 이웃집 아저씨처럼 온화하고, 친절하게 맞이해 주셨다. 키가 큰 신부님은 “어떻게 살아야 옳단 말인가”라는 한심한 질문에 진지하고 자상한 얼굴로 성심껏 대답해주셨다. 계산되거나 교육 받은 것이 아닌 진짜 친절을 나는 그때 신부님에게서 느꼈다. “예수 믿어야 구원 받는다”, 그런 협박(?)의 말씀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아름다운 인품이었다. 그런 신부님이 그러나 이 나라에 몰아치던 부동산 투기 광풍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온화하던 얼굴이 금세 돌멩이처럼 굳어지면서 뜨거운 분노를 감추지 않으셨다.

“땅을 사고파는 것은 죄악입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땅을 사서 놀리면서 땅으로 큰돈을 벌려고 모두 혈안이 된다면 한국 사회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부동산 투기 광풍이 ‘있는 자’들뿐 아니라 보통사람들에게까지 닥친 것은 70년대 후반부터였던 것 같다. 급기야 80년대 초반에는 생전 처음 들어보던 ‘복부인’이라는 말이 출현했고, 땅으로 돈을 벌었다는 사람들 이야기가 주변에서 심심찮게 나돌던 때였다. 온 사방에서 땅 투기로 떼돈을 벌었다는 이야기와 ‘딱지’ 어쩌구 하는 처음 들어보던 말과 함께 아파트 전매 이야기가 우리 사회를 역병처럼 휩쓸고 있었다.

강원도 오지의 돌산과 돌밭에 엎드려 묵묵히 농사짓고,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조용히 공동체생활을 하던 대천덕 신부님이 한국사회의 부동산투기 열풍에 마침내 비판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주로 『신앙계』잡지를 통해 그의 대사회적 발언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신부님이 땅 투기에 대해 그토록 분노하실 줄은 몰랐다. 당시 내 사회정의의 감수성은 그런 졸부들에 대한 혐오와 경멸의 수준이었건만, 신부님은 대로大怒하고 계셨다.

이튿날 예수원을 나설 때 신부님은 입구까지 배웅하면서 이야기 도중에도 쉼 없이 길가에 지천으로 자라고 있던 컴프리(쌍떡잎 식물 통화식물목 지치과의 여러해살이풀)를 선물로 뜯어주셨다. 컴프리라는 귀한 작물도 처음 봤지만, 오지의 서양신부님이 그토록 한국사회의 미래를 염려하시는 것은 놀라우면서도 충격적이었다. 신부님이 헤어질 때 책 한 권을 건네 주셨다. 주황색 표지에 얇은 문고본 크기의 책이었다.

“토지를 공유해야 한다”는 고귀한 신념

30년 전, 헨리 조지의 『빈곤에서 벗어나는 길』을 나는 그렇게 만났다.
헨리 조지(1839~1897)라는 19세기의 특별한 미국 경제학자를 나는 이 책을 선물 받고도 한참 동안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대천덕 신부님은 그토록 인상적이었지만, 게을러터진 나는 돌아오자 곧바로 책을 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추 보니 경제학 책 같은  데다가 ‘경제’라면 내가 모르는 영역으로 간주하고 손사래부터 치는 게 멋인 줄로 알던 한심한 문학도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어떻게 책 한 권에 ‘빈곤에서 벗어나는 길’이 담겨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바보 같은 의구심도 작용했는지 모른다.

그 후 10년쯤 지나서야 나는 책을 일별했지만 그때도 그 작은 책에 담겨 있는 깊은 사상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에는 이르지 못했다. 헨리 조지가 독학을 한 괴팍한 경제 사상가였고, 단지 소유만 하고 값이 오를 때까지 놀리는 토지에는 매우 무거운 지대地代를 매겨 부동산투기 같은 짓을 할 수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책 정도로 간주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나는 연전에 FTA 강행으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을 때, 내가 경제에 대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무식하다는 자책감이 일자 비로소 정색하고 책에 달려들었다. 150쪽짜리 작은 책 한 권을 읽는 데에 자그마치 30년이 걸린 셈이다.

내가 신부님에게 선물 받은 책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헨리 조지의 대표작인 『진보와 빈곤』을 1944년 미리암 알랜 드포드라는 사람이 대중용으로 발췌, 편집한 다이제스트판을 대천덕 신부의 권유로 김반열金槃悅이라는 재미언론인이 번역해 낸 책(창원사, 1964년)이었다. 이 책은 이후 예수원의 화재로 거의 전량이 소실되어 보이스사(1980년)에 의해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헨리 조지의 경제사상은 최소한의 양심을 지닌 인간이라면 당연히 지닐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의문에서 비롯된다. “왜 문명이 발달하고 물질적으로 한 사회가 풍요로워지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은 더 늘어나고 그뿐 아니라 더욱 비참해지고 가난해지는가”라는 의문이 그것이다. 강단의 주류 경제학자들이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다”는 하나마나한 시장원리를 되뇌고 있을 때 독학의 비주류 경제이론가인 헨리 조지는 진보와 궁핍이 병행하는 데 대한 참을 수 없는 고뇌가 담긴 ‘양심의 경제이론’을 펼쳤으니, 그것은 곧 “토지를 공동소유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서의 레위기 용어로 말한다면, 토지 사용자의 회년제回年制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불평등한 토지소유는 반드시 부의 불평등한 분배를 초래할 것이고, 그런 사회는 아무리 선진문명국이라고 뽐내도 결국은 붕괴하고 말 것이다,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라는 이야기였다. 경제사상經濟史上의 족보로 따지면 헨리 조지는 아담 스미스의 아들이며 데이비드 리카도의 형제로 분류되는 모양이다. 리카도 또한 풍요의 열매를 토지 소유자가 독점한다는 ‘차액지대론差額地代論을 수립했지만, 헨리 조지는 토지를 공동소유하거나 엄청나게 높은 지대를 물리고 다른 세금은 다 없앰으로써 인류의 궁핍을 타개해야 한다는 사상을 필생의 신념으로 밀고 갔다. 리카도는 비관했고, 헨리 조지는 토지를 사회 공동체가 관리할 수 있는 인류의 지혜와 이성적인 힘을 낙관했다.

헨리 조지는 이 책의 첫 교정판을 받은 뒤, 그의 부친에게 쓴 편지에, “아버님, 제 책이 처음에는 인정받지 못할 것이며 그리고 아마 얼마 동안은 인정받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종국에 가서는 위대한 책으로 인정되어 양반구兩半球에서 여러 나라말로 번역되리라 믿습니다”라고 썼다. 자신의 사상이 현실에서 쉽게 실현되기 힘든 이상주의적인 사상이라는 것을 헨리 조지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상적인 주장이 현실화되기 힘들다는 이유가 그 주장의 합리성과 당위성까지 묵살당할 이유가 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헨리 조지의 토지사상은 그의 믿음대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버나드 쇼와 톨스토이, 중국의 쑨원은 그의 토지사상에 깊은 공감을 했으며, 헬렌 켈러와 아인슈타인 같은 이들 역시 헨리 조지의 고귀한 신념에 경의를 표했다. 특히 톨스토이는 헨리 조지의 이 책(『진보와 빈곤』)을 읽은 뒤, 그의 대표작인 『부활』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 헨리 조지의 사상을 소설 속의 가장 이상적인 토지제도로 묘사하기도 했다. 일설에는 톨스토이가 지닌 재산과 귀족의 특권을 모두 버리고 만년에 감행한 ‘세기적 가출’ 역시 헨리 조지의 사상에 영향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학계는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조차 철저하게 묵살한 헨리 조지의 사상은 그러나 오늘날 자본주의正와 사회주의反를 지양하는 합合의 개념으로서도 재해석(김윤성)되고 있으며, 배타적으로 자연을 독점하는 사람은 공동체에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를 부담해야 한다는 생태적 가치와 토지정의의 경전으로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빈곤을 타파하기 위해 토지를 공유화해야 한다는 100년도 훨씬 전에 펼친 헨리 조지의 대담하고 고귀한 사상은 우리나라의 진보신당이 내세우는 3대가치(노동가치 존중, 생태가치 실현, 보편적 복지)보다 간명하면서 진일보한 사상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나라는 오늘도 땅 투기의 나라다. 대기업은 오래 전부터 땅 투기로써 획득한 부가 매출로 인한 순이익을 언제나 상회한다. 보통사람들조차 조금만 돈이 생기면 땅부터 사고 볼 일이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이 정권은 높은 지대는커녕 부자들의 세금을 전격적으로 감세했다. 4대강 파괴나 세종시 땅놀이도 마찬가지다. 헨리 조지의 사상으로 말한다면, 우리 사회는 붕괴를 목전에 둔 사회다. 이를 어이해야 옳단 말인가.

대천덕 신부를 같이 만났던 30년 전의 친구는 예수원에서 돌아온 얼마 뒤,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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