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07월 2010-07-01   1056

칼럼- 집으로 가는 길

집으로 가는 길

이태호  월간 『참여사회』 편집위원장,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참여연대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천안함 사건에 대한 의견서를 보낸 후, 유가족 중 어머니 한 분이 사무실을 찾아 오셨습니다. 고인이 된 아들 생각으로 지금도 억장이 무너지고 살아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고, 가슴을 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발 그 끔찍한 범죄를 일으킨 집단을 두둔하는 이적활동만은 제발 그만두라고 나무라시고 급기야 읍소까지 하셨습니다. 제게도 참 고통스럽고 가슴 아픈 순간이었습니다.

 

그 날 내내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반공포로 출신의 보수기독교 목사였던 아버지, 그리고 한국전쟁 참전군인인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제게 뭐라고 하셨을까 상상해보기도 했습니다.

 

대학생 시절 일입니다. 일전에도 간단히 소개했듯이, 당시 반공목사인 제 아버지와 늦둥이 운동권 아들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당신을 이어 목사가 될 것으로 기대하시고 평생 기도 제목으로 삼으셨던 아버지에게, 아들이 선택한 길은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이었고, 따라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 역시 ‘꼴보수’ 아버지의 꾸지람에 한 마디도 지지 않고 토를 달곤 했지요. 급기야 “당장 나가라. 나는 너 같은 빨갱이 아들을 둔 적 없다!”는 호통을 들은 것이 족히 서너 번은 더 되었던 것 같습니다.   

 

가장 불편한 시간은 명절 때였습니다. 2~3일간의 데면데면한 시간을 보내고 상경하기 두어 시간 남짓 남았을 때, 아버지는 저를 안방으로 부르시곤 하셨습니다. 불편한 마음을 잘 감추지 못하시는 아버지는, 마른기침을 몇 차례 하신 후에 “교회는 잘 나가냐?”, “앞으로 뭘 할 작정이냐?” 따위의 질문을 어색하게 던지곤 하셨습니다. 그 때마다 저는 모호하고 뚱하게 대답해서 아버지를 불편하게 했지요. 그러면 아버지는 굳어진 얼굴로 다시 몇 번 마른기침을 하신 후 결국 명절 내내 당신 마음을 괴롭혔을 아들에 대한 걱정과 불만을 토로하시곤 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아버지가 훈계를 하실 때 응대하는 요령 같은 게 생겼습니다. 아버지가 학생운동 그만두고 교회봉사 하라고 채근하실 때, 가만히 무릎 꿇고 앉아서 석고대죄席藁待罪도 아니고 묵비권 행사도 아닌 모호한 태도로 시간이 지나가기만 기다리는, 그런 요령 말입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아버지를 더 노엽게 하기 일쑤였습니다.

 

부자간의 냉전이 시작되면, 심장이 약하신 어머니는 문밖에서 노심초사, 어쩔 줄 몰라 하셨습니다. 결국엔 방안으로 들어와 “태호야, 어서 ‘예’라고 말씀드려!”라고 거의 울먹이며 설득하시곤 했지요. 하지만 고집불통인 저는 빨개진 얼굴로 그저 방바닥만 쳐다보고 있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면 이윽고 어머니가 ‘버스 시간 늦겠다’며 제 등을 떠밀어 내보내는 것으로 위기를 수습하셨습니다. 그리곤 버스터미널까지 아들을 배웅하러 나오셨지요. 아무 말씀 없이……. 아무리 혼자 가겠다고 뿌리쳐도 어머니는 언제나 터미널까지 오셨고 버스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은 때까지 하염없이 손을 흔드셨습니다.

오는 8월이면 아버지가 가신 지 1주년이 됩니다. 최근 아버지가 남기신 글을 다시 읽어보고 있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겪으신 한국전쟁 이야기는 몇 번이고 읽어도 새롭습니다. 

 
해방 이래 이북체제에 비판적이셨던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시작될 무렵에는 거의 ‘반동분자’로 낙인 찍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아버지에게도 징집영장이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인민군이 되어 동족상잔의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싫었지만, 신체검사만 통과하면 그 자리에서 전쟁터로 파견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체검사 후에 인민군 정치위원이 아버지에게 난데없이 묻더랍니다. “너는 이 전쟁에서 누가 이기길 바라냐?”고요. 아버지는 잠시 망설이다가 “하나님을 섬기는 쪽이 이기길 바란다.”고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순간 그 정치위원은 격노해서 아버지에게 살기어린 온갖 비난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아주 냉랭하게 “당신은 그냥 집에 가도 좋다”고 했다는군요. 한국전쟁 초기 인민군 징집의 핵심기준 중 하나가 ‘사상’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도리어 인민군이 될 자격을 박탈당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전쟁터 나가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이른바 ‘반동분자 응징’도 비일비재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고지식함이 드러나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저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아버지의 그 대책 없는 용기에 새삼 경탄하곤 합니다. 청년시절의 아버지가 겪었을 고뇌와 고통, 열정과 공포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내 젊은 시절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절박했을, 생사가 걸린 선택의 갈림길에 내몰린 이 땅의 한 젊은 목숨으로 아버지를 다시 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엔 혼자서 실실 웃게 됩니다. “아버지는 나보다 더한 꼴통 반체제 분자셨구만… 왜 나 같은 개량주의자를 그리 못살게 구셨을꼬?”

 

천안함 사건에 대해 유엔 안보리에 서한을 보낸 후 일부 어르신들과 누리꾼으로부터 “친북 반국가 세력은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없다, 차라리 북으로 가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저는 생각해봅니다. 내 나이 20대에서 40 중반에 이르도록 최루탄 자욱한 거리에서, 그리고 온통 야근으로 날밤을 새워가며 만들려고 한 세상, 이루려고 했던 사회는 과연 어떤 곳인가?

 

‘너는 누구 편이냐’고 다그쳐서 인간성과 이성을 파괴하지 않는 세상, 이념과 피부색과 국경을 넘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 전쟁 없는 세상, 가난과 차별이 더 이상 운명이 되지 않는 세상, 공포를 느끼지 않고도 이견과 주장을 말할 수 있는 세상, 나라일꾼들이 그 주인을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세상,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비판이 변화의 기초가 되는 참여민주의 세상이 아니던가? 우리가 사는 여기가 부족하나마 민주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면, 아마도 이런 열망을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내는 시민들이 존재하기 때문은 아닐까?

 

아, 이제는 경계 없는 곳에 살고 계신 아버지 어머니,
꿈에라도 한번 뵙고 싶어요. 심한 꾸지람이라도 한 번 더 들었으면 좋겠네요.

 

 

 

* 전황이 북한에 불리하게 돌아갈 때쯤 아버지는 2차 소집통보를 받으셨습니다. 북으로선 당성黨性이니 사상이니 따질 형편이 아니었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남하하던 인민군 부대에서 아버지는 탈영을 감행했고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어 포로수용소로, 그리고 다시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어 반공포로로 석방되어 남한에 정착하시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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