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07월 2010-07-01   951

문강의 문화강좌-천안함과 우파의 자격



천안함과 우파의 자격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우파와 좌파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프랑스의 삼부회에서다. 1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삼부회는 의결권 없는 왕의 자문기관이자 국가의 ‘정치체’body politic를 구성하는 신분의 구분을 나타내는 회의였으며, 가톨릭 성직자가 제1부, 귀족이 제2부, 부르주아와 다른 모든 평민이 제3부를 이루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던 해인 1789년에 지배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제1부와 2부를 합친 이들의 수는 약 41만 명이었지만, 세금과 부역 등 국가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는 제3부의 수는 2천5백만 명을 넘었다. 루이 16세 당시의 악화된 재정상태로 인해 열린 1789년의 삼부회에서 의장의 좌측에 자리한 이들이 제3부였고, 우측에 자리한 이들이 제2부였다. 부패하고 무능한 왕권을 수호하려는 제2부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제3부 사이의 논쟁으로 삼부회는 파행을 맞았고, 이것이 봉기로 이어지면서 제3부의 ‘인민’들이 지배계급을 굴복시키고 왕의 목을 자르는 혁명이 발생한다. 이후, 사회의 기존제도와 구조를 옹호하는 이들을 우파로, 그에 반대하는 이들을 좌파로 나누는 정치학적 구분이 생겨난다.   

이러한 특징은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과도 연결된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자코뱅 테러’에 경악한 영국의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에 기원을 두는 보수주의는 사회를 급격히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궁극적으로는 공포와 폭력만을 양산한다고 보고, 기존의 전통과 제도를 지키면서 점진적이고 합리적인 변화를 꾀하려는 입장이다. 반대로 진보주의는 변화의 불가피성과 자유, 평등 등의 추상적 가치를 신봉하며 이를 실현하려는 인민의 열정과 행동을 옹호한다. 따라서 우파와 보수, 좌파와 진보는 서로 친화적인 개념이다. 대개 보수-우파가 국가, 시장, 신분, 계급, 성역할 등을 쉽게 바꾸기보다 전통의 ‘지혜’를 존중하려는 입장이라면, 진보-좌파는 이러한 기존의 제도와 가치에서 문제점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조속하게, 또 총체적으로 바꾸려는 태도를 보인다. 우파가 국가, 민족, 자본주의, 부자, 특권층, 남성과 친화력을 갖고 있는데 반해, 좌파가 국제주의, 인류애, 사회주의, 빈자, 소수자, 민중, 여성성과 어울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언제나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역사적 상황과 정치적 국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민족주의가 민중의 동의와 결합했을 때 파시즘이라는 변종이 등장하기도 하고, 사회주의가 소수의 지배도구가 되었을 때 스탈린주의로 변질되기도 했다.    
  

국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좌파, 국가를 사유화 하는 우파

한국에서의 우파와 좌파가 가진 특이성 역시 한국의 역사적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해방 이후 소련과 미국의 영향권 아래 놓이면서 분단되고, 6·25 전쟁과 이후 60년 가까운 냉전시기를 거치면서 한국에서 ‘좌파’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공산주의 북한’과 친밀한 세력이라는 의심의 도식 속에 놓이게 된다. 소위 ‘친북좌파’라는 말은 여기서 등장한다. 자본주의와 국가권력, 보수적 문화에 대한 모든 비판이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북한’이라는 하나의 블랙홀을 통과함으로써 ‘대한민국을 거부하는 친북좌파’라는 표식을 달게 된다. 한국에서 좌파적 입장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래서 언제나 ‘국가에 대한 충성이 확실한가’ 하는 ‘사상검증’부터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독재 권력에 반대했던 ‘민주개혁세력’도,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을 가진 ‘진보좌파세력’도 모두 월드컵이나 올림픽에서는 ‘대~한민국’을 외치고, 자신들의 ‘애국심’을 끊임없이 강조해야만 한다. 한국사회에서 이는 마치 우파가 국가에 대한 모든 권리를 쥔 채, 이를 비판적이고 진보적인 세력들을 검증하고 솎아내는 도구로 사용하는 형국이다. 요컨대, 냉전과 분단이라는 상황 속에서 한국의 우파는 ‘국가’를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사유화하고, ‘친북’이라는 딱지를 남발함으로써 자신들의 정당성과 권력을 담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좌파는 국가에서 벗어날 수 없고, 우파는 국가를 사유화하는, 이것은 매우 특이하고 비극적인 한국적 상황이다.


우파의 핵심정신 배반해야 우파가 되는 현실

국가가 신성불가침이 되면 그것이 독재자의 것이든 부패한 것이든 상관없이 편들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하며, 그 속에서 모든 합리적인 비판은 설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된다. 천안함 사건의 ‘미스터리’를 합리적 설명과 완전한 정보공유 없이 애국심으로 덮어버리려는 이명박 정부와 군의 태도는 그 대표적 사례다. 교묘하게도 지방선거 직전에 벌어진 천안함 사건과 조사결과 발표를 두고 ‘북풍’의 의심을 거둘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진정한 우파라면, 과거 독재정권의 북풍조작사건들을 통해 얻은 교훈으로부터 ‘지혜’를 찾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보수가 존중받을 수 있는 이유다. 보수주의의 원조인 버크가 광신적 열정을 가장 두려워한 합리주의자였다는 사실은 그래서 중요하다. 만약 버크가 한국에 있었다면 그는 가장 앞장서서 천안함에 얽힌 의문들을 합리적 근거를 가지고 제기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우파는 비슷한 의문제기를 한 도올 김용옥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소하거나, 천안함 조사의 의문점을 UN 안보리에 서한으로 보낸 참여연대 앞에서 폭력집회를 벌인다. 상식적 의문을 제기하는 누구라도 ‘친북좌파’가 되는,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한국의 우파가 최소한의 합리성마저도 상실한 광신적 열정의 상태에 빠져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기이하게도 우파가 우파의 핵심 정신(합리성, 사리분별, 예의)을 배반함으로써만 우파가 되는 역설적 상황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공동체의 중요한 부분을 책임지는 ‘국가’가 이런 식으로 광신적 우파의 노리개로 전락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거기에 ‘정부’가 앞장서고 있는 것은 슬픔을 넘어 분노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천안함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던지는 물음은 그래서 어뢰냐 북한이냐가 아니라, 우리의 정부와 우파가 ‘국가’를 옹호할 자격이 있느냐 하는 근본적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면해 자기비판을 하지 않고, 역사 속에서 교훈과 지혜를 찾아내지 못하는 우파는 그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셈이다. 우매하고 타락한, 그래서 점진적으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뒷걸음질 치는 우파를 부르는 이름은 따로 있다. 바로 ‘반동’이다. 천안함에 대한 태도는 좌파냐 우파냐를 가르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천안함은 오히려 우파와 반동을 구분하는 시금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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