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09월 2010-09-01   1675

김용민이 만난 사람-“참여연대, 반항심 커졌지만 상상력은 약해졌다”

“참여연대, 반항심 커졌지만
상상력은 약해졌다”


참여연대 창립 주역 오재식 전 월드비전 회장

김용민 시사평론가 사진 김은진 작가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엔 창대할 것이다.’ 1994년 9월 10일은 참여연대의 생일이다. 구약성서 욥기에서 언급된 대로 참여연대의 ‘시작은 미약’했다. 그렇다고 작금을 ‘창대한 오늘’로 묘사할 수 있을까. 단언하기 힘들다. 정부 여당과, 조중동으로 위시되는 기득권 지향적 언론에다, ‘어버이’를 위시한 이른바 ‘보수단체’들의 음험한 협공 때문만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파상 공세에 대항한 즉자적 대응에 급급하면서 예전만큼 사회적 의제를 주도하지 못하는 현실 탓이 크다.

  참여연대의 창립 주역이면서 아울러 많은 구성원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는 오재식 전 월드비전 회장을 만났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병마와 싸움을 치르고 있지만 발언 하나하나에 새겨진 통찰과 유머는 주체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2010년 8월 21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통인동 참여연대 5층 회의실에서 가진 대담에서 오재식 전 회장에게 참여연대의 근본 즉 초심을 찾았다.


참여연대, 창립으로 이끌었던 인연

“그 때 나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일을 마치고 막 돌아와 있었습니다. 이때 박원순 변호사와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가 찾아와 시민운동 단체 설립을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제네바에 있을때 한국의 다른 단체로부터 비슷한 제안을 받았었지요. 하지만 ‘귀국 후에나 생각해 보겠다’며 물린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원순 변호사의 요청은 마다하기 어렵더라고요.”

  오재식 전 회장은 이때 조영래 변호사를 화제에 올렸다. 1990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조영래 변호사는 전태일 평전의 저자로, 문귀동으로 상징되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변호사로 큰 덕망을 남겼다. 반독재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숱한 수배와 수감 등을 당했던 민주화 유공자로서 그의 위상 또한 빛났다.

  6월 항쟁 이후에는 함께 198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김영삼 두 야당 후보의 단일화를 위해 뛰었던 오재식 전 회장은 조영래 변호사가 도망다닐 때 일본 도쿄에서 머물며 돈을 보냈던 숨은 후원자였다.  나이로서는 선배지만 고인과는 동지적 관계이기도 했다. 그 조영래 변호사의 아끼는 후배가 바로 박원순 변호사였다.

  “하지만 참여연대의 뿌리를 찾으려면 ‘1980년 광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광주 민주항쟁이 일어나고 3년 뒤인 1983년부터 고개를 든 민주화운동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정점으로 치솟았지요. 비록 그해 군부 독재 청산이라는 이상은 양 김의 분열로 불발에 그쳤지만, 그때 결집됐던 역량은 훗날 시민운동의 형태로 힘을 얻게 됐습니다.”

  창립 당시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참여연대가 자칫 ‘법실련’이 될 뻔 했던 일화이다.

  “경실련이 참여연대에 2년 앞섰지요. ‘경실련이 경제정의를 위해 일한다면 우리는 법실련이라고 하자’는 주장이 많았어요. 구성원 중에 법학 공부를 한 사람들이 많다보니 법치 정의를 구현하자는 목소리가 컸던 것입니다. 부당한 일로 고통당하는 일이 있다면 소송을 통해 바로 잡고, 이를 통해 법치주의의 근간을 세우자는 의지였지요.”

  결과론적인 이야기가 되겠으나 사실 참여연대 넉자가 더 ‘폼 난다’는 생각, 나뿐일까. 괜히 법실련하면 경실련의 하부단체같기도 하니 말이다.

“정부가 막으면 대북사업은 못하는 겁니까”

이렇게 달려온 16년. 참여연대에 대한 평가는 어떠할까. 자신에 뿌리를 둔 가지와 줄기, 과연 곧게 우직하게 자라고 있다고 보는지 물었다.

  “16년이면 고등학교 1학년생 나이로 사춘기 시기입니다. 사춘기에는 반항심은 물론 상상력 또한 커집니다. 참여연대에 대한 아쉬운 점을 들라면 ‘반항심은 커졌는데 상상력은 약해졌다’는 것입니다. 참여연대가 상상력을 발휘해 손댔어야 할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한정된 지역 사회에서의 역할로 범위를 좁혀 살펴볼까요? 한국인은 물론, 불법체류자 역시 병원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그들의 자녀 역시 학교에서 공평한 배움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제공하는 몫, 정부 보다는 참여연대에게 더 어울리지요. 하지만 참여연대는 정부에다 ‘너희들은 왜 그걸 하지 않느냐’라고만 합니다.”

  이른바 ‘비판에 견준 대안제시의 노력’을 주문한 것이다. 이런 수고 끝에 NGO 운동의 새로운 동력이 마련되고, 시너지가 창출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정부 비판 감시 기능을 자제하라’는 뜻은 아니다. ‘정부를 극복하라’는 역설이다.

 

 

  “남북관계가 파탄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대북 인도주의적 지원도 끊기고 있어요. 정부가 조장한 측면이 크지요. 그런데 시민단체는 어째서 이런 구조에 적응하려 듭니까? 지금 100여 개가 넘는 대북 지원 단체들, 손 놓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다면 국제기구를 통해 우리 대신 북에 보내달라며 요청할 수 있어요. 정부가 막으면 대북 사업을 못하는 것입니까? 정부는 어떤 형태로든 변화무쌍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인도주의 원칙은 일관돼야지요.”

  ‘북한 지원은 안 된다고? 좋아. 그러면 우리도 안 해. 대신 책임은 너희의 몫이야’라는 ‘반항심’에 그쳐있는 시민단체에게, ‘정부의 방해를 딛고 사업을 수행하는 방법을 찾아라’며 ‘상상력’을 주문한 것이다. 비정부 기구를 뜻하는 NGO, ‘정부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조직’이란 정체성을 쉽게 망각했다는 설명이다.

  사실 ‘망각했다’기 보다 ‘겨를이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전 방위적 옥죄기에 시민 사회가 크게 위축된 현실 때문이다. 올 초여름, ‘어버이’들의 참여연대 급습 사건으로 화제가 번졌다.

  “달려와서 저 사람들(보수단체)과 몽둥이 들고 한바탕 하고 싶었지요. 그런데 몸이 아팠잖아요. (웃음) 그저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참 안타깝더라고요. 그래도 참여연대가 잘 견뎌내는 것을 보고 대견하게 여겼어요. 시민단체라면 오만가지 반향에 각오하며 감수해야 합니다. 이런 것에 위축돼서 문제제기라는 본연의 기능을 축소시킨다면 안 될 것입니다.”

  덧붙여 ‘가스통’으로 상징되는 이들을 가리키며 오재식 전 회장은 ‘아직 우리 사회 수준이 이렇다’라며 장탄식을 했다. 그러면서 ‘이런 사회에서 보수 또는 진보를 가르치는 것이 무의미하다’라고 촌평했다. 현 정부의 습관성 좌우 가르기에 대해서는 이런 고언苦言을 남겼다.

  “일본의 한 평론가가 한 말입니다. 버스가 갑자기 우회전했어요.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다 좌측으로 기울었습니다. 물리적 역학관계에 의한 것입니다. 따라서 좌측으로 기운 사람에게 ‘왜 좌편향이 됐느냐’라며 비판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경화가 가속화되는 사회에서 반사적으로 좌로 기우는 국민을 탓할 수 있을까요? 안 될 노릇입니다.”

“민족화해 협력의 큰 눈으로 남북을 보라”

오재식 전 회장은 1988년 2월, 지금껏 남북 화해 협력의 전범典範인 ‘88선언’을 만들어 낸 주인공이다. 이 88선언은 그 해 7월 노태우 정부의 7·7선언을 낳았고, 훗날 남북합의서, 6·15 공동선언, 10·4 공동선언의 밑바탕이 됐다. 지금도 ‘뜨거운 감자’인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요구도 들어갔는데 전제 조건이 워낙 논리적이었던지 눈에 불을 켜고 이적성을 따지던 공안당국조차 문제 삼기 힘들었다는 후문이 있었다. 그런 오재식  전 회장이었기에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한반도 문제의 해법은 없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작년에 백낙청 교수, 박원순 변호사와 함께 워싱턴 가서 그 나라 의회 정책 입안자 또 싱크탱크 쪽 인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북측의 입장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1994년에 체결된 제네바협약을 훗날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파기했다. 이로써 합의된 경수로 건설, 중유 공급은 중단됐다.

  2000년에 체결된 6·15 선언과 2007년 10·4선언은 둘 다  훗날 이명박 대통령이 깼다. 2002년 고이즈미 준히치로 일본 총리는 김정일 위원장의 사과까지 받아내며 납치자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다섯 사람의 납북 인사를 두 주 후에 보내라는 협약을 귀국하자마자 무위로 돌렸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미일 세 나라가 묵살한 대북합의 모두 김일성 또는 김정일과 맺은 것이라는 점이다. 북에서 최고지도자가 사인한 합의는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것을 협정 당사국들이 모두 뒤 엎어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상들 간의 신뢰를 지킬만한 바탕이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지요. 이랬더니 나는 완전히 북쪽 스파이가 됐어요.”

  오재식 전 회장은 정상 사이에 합의를 존중하는 풍토의 확립과 더불어 6자회담 역시 6개국 정상이 직접 주도함으로써 결의의 격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듣다 보니, 신뢰 회복은 제쳐둔 채 ‘핵만 없애면 몇 년 내에 국민소득 3000달러를 보장 한다’는 현 정부의 맥락 없는 한반도 정책에 쓴 웃음만 났다.

“한국, 아시아를 너무 모른다”

오재식 전 회장은 아시아교육연구원을 만들고 아프기 전까지 원장을 지냈다. 경륜과 연배, 명성으로 얻은 ‘한 자리’가 아니다. 해외여행이 달나라 가는 것만큼이나 희소했던 시절(1970년대)부터 아시아를 누볐기에 가능한 역할이다.

  “도시빈민, 노동자, 농민, 소수민족을 위해 일해 온 세월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구적인 역할을 한 셈인데 저로서는 고됐기보다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한국이 아시아를 너무 모른다’는 탄식으로 이어진다. 아시아에 대한 한국인의 저급한 관점을 나무라는 것이다. 인간관계가 돈에 뒷전이라는 지적이다.

  “캄보디아에 갔는데, 35살인 한국인 선교사 부인이 현지 가정부 세 사람을 쓰고 있었습니다. 세 사람의 몫은 각각 밥 짓기, 아이보기, 청소하기였어요. 선교사는 ‘20달러 씩 준다. 현지인으로서는 꽤 짭짤한 수입이다. 우리는 이렇게 세 사람의 일자리를 만들어줬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대요. 나는 ‘당신 입장에서 보면 일리가 없지 않다’라고 하면서도 ‘그러나 현지인이 당신에게 고마워할 지는 의문이다’라고 했어요. 젊은 부인이 할머니 셋 불러다 일 시키는 모습을 곱게 봐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기본적으로 예의가 없습니다.”

  일부 선교사의 무분별한 현지인 고용은, 당사자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관광지에서 매춘 행위를 선택하는 그릇된 몇몇 여행객의 ‘개념 탈착’과 맥락상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돈이면 된다’ 이것 아닌가. 아시아 다른 나라에서 이주해 온 결혼 여성에 대한 부박한 예우도 어쩌면 한 맥락이다. 인격이 엉망인 남자에게 있어 딸 같은 이주 여성은 솔직히 ‘돈’으로 교환 가능한 재화에 불과했던 것 아닌가.

  한 때는 태평양 전쟁 때 동원된 ‘일본의 앞잡이’로, 베트남 전쟁에는 ‘미국의 앞잡이’였던 우리 아니겠나. 아시아인에게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시급한 것은 겸손하게 다가가는 것이란 설명이다. 그동안 우리는 아시아의 언어, 사회 풍속, 역사에 관심이 없었다. 그 찬란하고 기풍 있는 역사를 ‘경제 성장률’이란 저급한 잣대를 대입해 몰가치한 것으로 낙인찍었다. 기실 대학 교수의 90% 이상이 미국 학교 출신이라고 하니 아시아 경시 현상은 그리 생경한 것만도 아니하다. 이 때문에 아시아에서 대한민국은 위기에 봉착해 있다. 포위, 고립되는 양상이다. 이런 와중에 제시된 오재식 전 회장의 대안은 그래서 솔깃하다.

  “정부가 100억에서 200억을 출자하면 학생 수 천 명을 아시아 곳곳으로 현장연수를 보낼 수 있습니다. 100달러면 한 달을 살 수 있거든요. 거기 보내서 말을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언어가 통하면 기막힌 상상력이 발동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시아와의 인격적인 관계 형성이 가능합니다. 그곳에서 현지인과 결혼할 수도 있는 것이고요. 좁은 한국에서 넓은 아시아로 지평이 넓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사람과 마을, 시민운동의 ‘열쇳말’

‘사람’과 ‘마을’. 오재식 전 회장이 마지막으로 제시한 열쇳말이다. ‘사람이 보인다, 마을이 보인다’는 고 황주석 전 부천YMCA 사무총장의 유고집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서 사람은 국민이나 민족, 서민 또는 평민이 아닙니다. 그냥 사람입니다. 인류학적으로 먹고, 자고, 싸고 하는 사람입니다. 국민을 떠나서 사람, 서민과 귀족을 떠나서 사람, 학자와 종교를 떠나서 사람. 일단 사람으로 가장 기본적인 탤런트로 태어난 사람. 이 사람들을 동등하게 인정해줄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1998년에 대북사업 2년 동안 북한 식량난이 한창일 때였다. 오재식 전 회장은 이때 들은 북측 관계자의 말을 한 자 남김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오 선생, 우리 조상들이 말이지요. 어느 집이 식량 떨어졌다고 소문나면 봉지에 고구마, 강냉이, 쌀을 넣어 문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면 그 집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그것을 거둬다 밥을 지어 먹었습니다. 북측 동포가 식량 모자라 주는데 그걸 어떻게 퍼주기라고 매도합니까? 조상들이 살아온 아름다운 인간애는 어디로 갔습니까.’ 서로 도와주고, 그러면서 잘난 체 안하는 것, 이것이 마을이다. 그러나 마을은 도시화되면서 다 깨져 사라졌다. 도시사회에서 그런 인간관계의 틀을 다시 만들 수 있을까. 다시 이야기해 마을을 재건할 수 있을까. 단초는 인류애 정신과 공동체성의 회복이다. 시민운동은 이런 일의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지금의 NGO는 비정부 기구가 아닌 반정부 기구라는 비판이 없지 않다. 반정부 기구라 함은 정부 없으면 덩달아 존재감이 없는 의타성 다분한 객체라는 설명이다.

  “정부에 따라 시민운동이 좌지우지 돼서는 안 되지요. 그런 의미에서 지난 10년, 우리는 (시민운동에 대한 기본인식을 갖춘 권력에 기대) 스스로에게 오만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명박 정부를 겪으며 앞으로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설 자리를 가꾼다는 다짐을 해야 합니다. 권력이 우리의 본령에 변수가 돼선 안 됩니다. 이게 시민운동입니다.”

  우리를 잃지 않는 시민운동, 사람이 있고 마을이 있는 시민운동, 그래서 영원한 시민운동, 그 길에 다시 서서 신발 끈을 다시 손본다. 그리고 되 낸다. 권력은 유한하나, 시민은 영원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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