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3월 2011-03-01   2102

문강의 문화강좌-소리와 분노

소리와 분노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권력을 가지기 위해 과잉의 길을 택한 맥베스에게 삶이 공허해지듯′
오늘날 수많은 죽음을 부르는 과잉된 욕망의 체제가 마지막에 도달할 그 지점 역시
공허일 것이다° 친구와 이웃과 동지들의 안타까운 죽음의 소식들은
우리 삶의  소리와 분노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5막에는 삶에 대한 맥베스의 유명한 독백이 나온다.

“삶이란 지나가는 그림자일 뿐. 제 차례가 되면 무대 위에서 뽐내고 초조해 하지만 차례가 지나면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가련한 배우일 뿐. 삶이란 바보가 말해주는 이야기 같은 것,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

삶의 근본적 허무에 대한 이 통찰은 맥베스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모든 추악한 짓들을 해왔기 때문에 더욱 비극적이다. 실제로 삶은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다. 특히나 ‘역동적’인 한국에서 들리는 삶의 소식들은 언제나 시끌벅적한 소리로 충만하고, 날마다 새로 생겨나는 이슈들에는 입장마다 다른 분노가 터져 나온다. ‘빈’ 수레가 ‘요란’한 것과 같이, 좀처럼 평안할 날이 없는 한국사회의 “소리와 분노” 속에서 삶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허무로 느껴질 때가 자주 있다.

맥베스가 이 독백을 하는 때는 권력욕의 화신인 부인 레이디 맥베스의 죽음 소식을 듣고 난 후다. 죽음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이는 오직 살아있는 자들이다.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도 죽음의 소식은 매일 들려온다. 최근 우리는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 소식을 들었다. 지병의 고통과 생계의 어려움을 겪던 이 작가는 자신의 자취방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고 한다. 우리는 쌍용자동차의 정리 해고에 맞선 파업과 폭력 진압을 아직 기억한다.

그리고 올해에만 해고 노동자 8명과 그 가족 3명 등 11명이 자살과 질병으로 생사를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구제역 전염병의 창궐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정부 당국이 지금까지 350만 마리 이상의 소와 돼지를 ‘살처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중 다수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구덩이에 파묻혀졌다고 한다. 인간이 아닌 동물들에게는 ‘죽음’이라는 단어조차 사치에 불과함을 우리는 ‘살처분’이란 단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상품이 가리는 삶과 죽음

각기 달라 보이는 이 죽음의 소식을 공히 감싸고 있는 것은 ‘상품형태’가 가지는 신비스러운 속성이다. 『자본』 1권 1장에서 상품을 분석하며 마르크스는 이렇게 쓴다.

“상품형태의 신비성은, 상품형태가 인간 자신의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 자체의 물적 성격으로 보이게 하며, 따라서 총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그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관계, 즉 물건들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 한다는 사실에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치환에 의하여 노동생산물은 상품으로 되며, 감각적임과 동시에 초감각적 물건으로 된다.”

상품은 그것을 만들어내는 데 들어가는 모든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감춰 버린다. 사람들은 퀵 소포만 보았지 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오토바이를 타는 배달원은 보지 못하고, 운동화만 보았지 운동화를 만들다 손가락을 잘릴 수도 있는 노동자는 보지 못한다. ‘문화산업’의 첨병인 영화는 그 영화를 만들기 위해 일했던 시나리오 작가와 스탭들의 박봉이 가려진 곳에서 거래되고, 자동차는 어셈블리 라인에서 밤낮으로 일했던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정리해고가 가려진 곳에서 전시되고, 랩에 싸인 포장육은 생명으로서의 어떠한 대우도 받지 못한 채 사육되거나 처분되는 소와 돼지의 아우성이 들리지 않는 곳에서 팔린다. 남는 것은 상품 그 자체와 상품들 사이의 관계이고, 가려지는 것은 그것을 ‘실제로’ 만들어내는 인간과 동물의 비참한 현실이다.

이러한 일들이 가능한 이유는 상품관계가 모든 것인 사회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은 모든 사회적 관계를 상품관계로 만들고, 모든 이들이 그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혹은 어쩔 수 없이 살아가게 될 때 비로소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 자본이 할 일은 이 상품관계 속에서 더 많은 이익을 축적할 수 있는 경제적 계산이다. 인간도, 동물도, 자연도 이익의 축적을 위한 하나의 ‘변수’로만 남게 된다. 그 속에서 자신의 육체를 팔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은 자본이 형성한 상품관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노동력으로서의 자식(‘프롤레스’)을 낳음으로써만 생활할 수 있는 가난한 존재를 뜻했던 고대사회의 ‘프롤레타리아’는 이렇게 오늘날도 여전히 존재하는 이름이 된다. 물론 이제는 자본의 강력한 힘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든 ‘처분’될 수 있는 존재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비존재’로서. 상품관계로서 사고 팔리는 생명들이 그나마 최소한의 존엄성을 갖출 수 있게 해 줄 어떠한 사회적 연대나 국가의 개입도 이 시대에는 금기가 되었으니, 생존투쟁에서 실패한 이들은 모든 짐을 스스로가 져야만 한다.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의 복지예산과 최상위권의 자살율은 이런 식으로 연결된다. ‘창조적 파괴’라는 자본의 모토가 말해주듯, 모든 ‘창조’는 ‘파괴’를 동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파괴의 대상에는 한계가 없다. 이 시대에 죽음의 소식이 만연하는 이유다.

스스로를 몰락시키는 과잉 체제

죽음을 동반할 수 밖에 없는 자본의 전진은, 그러나, 영원할 수는 없다. 이윤의 확대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과잉’의 속성은 결국 자신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에서 플라톤이 분석하듯, ‘과잉’은 모든 체제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오는 요소다. 이어지는 죽음의 소식들은 이 체제의 과잉을 드러내는 신호들이기도 하다. 지금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뒤흔들고 있는 반란과 혁명은 튀니지의 한 청년이 자신의 몸에 당긴 불씨 하나로 시작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식료품 가게에서 일하다가 비인간적 대우를 받고 쫓겨난 이 청년의 죽음 역시 사회의 모순이 집약된 것이었고,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된 반란은 튀니지를 뒤흔들고, 이집트 대통령을 퇴임시키고, 바레인과 리비아의 독재자를 지금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죽음을 양산하는, 그렇게 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사악한 체제들은 자신들이 만든 죽음에 의해 몰락하게 되고, 그 몰락 위로 무언가 새로운 삶이 다시 태어나는 하나의 소중한 기회가 생긴다.

권력을 가지기 위해 과잉의 길을 택한 맥베스에게 삶이 공허해지듯, 오늘날 수많은 죽음을 부르는 과잉된 욕망의 체제가 마지막에 도달할 그 지점 역시 공허일 것이다. 친구와 이웃과 동지들의 안타까운 죽음의 소식들은 우리 삶의 “소리와 분노”다. 그 속에서 허무에 빠지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조직하고, 싸우고, 버텨냄으로써 먼저 죽어간 이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할 때, 그 삶은 결코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썩은 권력자의 탄식으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