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02월 2001-01-22   1563

[권은정의 파워인터뷰15] 착한소년 김형완

‘형사 콜롬보’에서 콜롬보 형사는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중요한 계기마다 자신의 아내를 등장시킨다. ‘우리 집사람이 그러는데 말이지요. 이런 경우엔…’하면서. 그 재밌던 시리즈는 끝날 때까지 그 ‘집사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우리의 총수’를 전면에 등장시키기로 했다. 그 동안 몇몇 인터뷰에서 기꺼이 ‘살신성인 당한’ 그의 노고를 그냥 지나친다는 것은 우리 업계의 의리가 아니기 때문이다.(지나간 인터뷰 기사 참조바람)

  • 키 183센티미터 (그래도 군대는 강집으로 갔다 왔다)
  • 검은 머리.
  • 검은 눈동자
  • 23-23-23 (물론 가슴- 허리-히프 사이즈라는 것을 아시리라 믿는다)
  • 결혼: 10년간 동일의 한 여성과 살고 있음.
  • 자녀: 그 여성과의 사이에 생물학적 친부모임을 증거 할 수 있는 아들 1명.

그는 외모 콤플렉스가 있다.

모두들 나에 대한 첫인상이 굉장히 딱딱하다고 합니다. 특히 관공서나 은행창구 사람들은 제가 뭘 물어보면 퉁명스럽게 대답해요. 마치 내가 따지듯이 자기들한테 말했다는 투로 말이지요. 뾰족뾰족하고 친근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요. 눈에는 오죽 잘 뜁니까. 눈에 덜 띄어 보이려고 어깨를 숙이고 다녀서 제 자세가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그러나 일부에서는 배우 안성기를 닮았다는 낭설이 있다. 안성기씨는 스타로서 당해야할 고초를 여기서도 역시 겪고 있는 것이다)

그가 독일 기독교 재단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아 공부하러 간다. 3년 예정으로 가는데 엔지오를 공부하고 올 작정이다. ‘협동 사무처장’ 이라는 직함은 유효하다. 참여연대에서 유학생으로 ‘파견하기’ 때문이다. ‘노병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영생할 뿐이다’

얼마 전 참여연대 간사 송년회에서 사회를 맡은 김박태식씨(그가 부모 성을 함께 쓰고 있는 이유는 여성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한 작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가 ‘가서 공부를 하긴 할거냐?’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열심히 공부를 하실 테지요?

여러가지 생각이 듭니다. 객관적으로는 공부를 분명히 해야 하는 건데 말이지요. 우리나라 엔지오역사가 일천하니 외국 엔지오 활동소개와 정보 전달을 위해서, 그리고 한국 시민사회의 방향을 모색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기도 한 일이니까요. 현재 국내에서 엔지오 전공자가 극소수잖습니까?

일부 언론에서는 시민운동에 대해 비판적 평가를 하면서 외국 엔지오 사례를 소개할 때도 자기들 입맛에 맞게 가공하여 보도하고 있습니다. 여론형성에 바람직하지 못한 이런 것들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공부는 꼭 열심히 해야하는 것입니다. 가서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를 두루 공부할 기회가 있을듯합니다. 한 학기간 필드 워크가 있는데 그때 각국 엔지오를 볼 수 있을테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객관적이고 당위적인 차원에서는 소신껏 공부를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생체 리듬이 떨어지는 게 고민입니다(쉽게 말해서 나이가 많아서 고민이라는 뜻) 이건 뭐,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까먹는 즈음에 다다랐으니 말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말이 걱정입니다.

고등학교 때 배운 독일어를 기억의 창고에서 꺼내기 위해 최근에 아주 짧은 기간동안 독일 문화원에 다닌 적이 있다. 그러나 머리에 쥐가 나버렸다고 한다.

사람 만나서 손짓 발짓하면서 하다보면 무슨 수가 생기겠지요. 하여튼 열심히 배워 볼랍니다.

그의 투철한 정신에 감동 받은 주위여러분들이 ‘외국어 배우기 왕도’에 관한 여러 조언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정리하면, 우선 이웃 할머니를 잘 사귀어라 – 분명 신이 주신 기회라며 자신의 마지막 정열을 동양에서 온 나이든 학생 가르침에 불태울 것이다. 그 다음은 얼라들(즉, CHILDREN)하고 얘기를 많이 하라- 아마 아이들의 불분명한 문장력과 발음을 통과하면 ‘마스터’는 따논 당상이라는 이론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일 아가씨와 연애를 하라는 고마운 충고를 해주셨는데 그 분은 아마 우리의 총수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게 분명하다.(그런데 사랑은 눈으로 말하는 거 아닌가?)

그가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모범생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는 것 같다. 분명히 선생님께서 머리를 많이 쓰다듬어 주셨을 것이다.(단 선생님의 손이 그의 머리에 닿았다면)

저는 중학교 이후 지금까지 일탈-배제적인 삶, 일탈-혐오적인 삶을 살아왔습니다(즉, 너무 똑바로만 살아왔다는 말이다. 그는 확실히 말을 좀 어렵게 하는 경향이 있다) 제도권 내에서의 삶에 충실하게 살아온 것입니다.

가만!, 그는 데모하려고 데모 잘 하는 대학을 찾아 일부러 한신대를 지망해 갔던 학생이다. 그런데 제도권 안에서 바르게 살아온 사람이라고? 매우 헷갈리는 얘기 아닌가?

국민학교 때는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된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중고등 학교 때는 공부 잘 해야한다, 담배피지 말아야 한다. 각종 규범과 규율을 그대로 따라 살았거든요. 대학에서는 데모해야 된다. 저는 그런 모범생의 연장선상에서 데모를 한 겁니다. 다른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고등학교 때 모범생이었던 애들이 대학에서 데모현장을 외면한 것은 그들이 탐욕의 길로 갔다고 생각해요. 시험 칠 때 자기 성적만 챙기려고 노트 안 보여주는 애들 있잖습니까. 모범생의 일탈은 그들이 한 거지요. 자기들의 탐욕과 쾌락을 쫓아 살기 위해 삐뚤게 간 겁니다. 저는 고상한 이념이나 그런 게 아니라 제 소신 것 바르게 살아야한다 싶어서 대학가서 데모를 한 거지요.

그는 원래 파일럿이 되고 싶었다. 중간에 안경을 쓰면서 그 꿈은 좌절되었다. 그 다음 그는 건축가가 되고 싶었다. 뭐든 만들기를 하면 빠져들었다. 3b이론 -햇빛이 많이 드는 쪽으로 방을 배치한다는 건축이론-도 중학교 때 이미 생각해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오직 데모만 생각하는 학생이 되었다.

제 인생이 비뚤어졌다라고 말해야 한다면, 순전히 박정희 때문이에요..그런데 73년 작은형이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수배 당하면서 중앙정보부 사람이 우리 집에서 두 달을 살았습니다. 국가란 좋은 것인데, 그리고 우리형도 잘못한 게 없어 보는데 왜 서로 괴롭히나, 궁금해지더군요. 그래서 책을 막 읽기 시작했지요. 전환시대의 논리, 8억 인과의 대화, 들어라 양키들아, 그런 책을 읽었지요. 마구잡이로 읽은 거지요.

그랬더니 세상은 개판이라는 생각이 든 거지요. 엉클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고등학교 때 수학, 물리, 화학 이런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고3때 진로 선택하면서 공돌이로 살면 평생이 비극적이겠다 싶어서 감점을 불사하고 이과에서 문과로 갔지요. 박정희 죽고 광주항쟁 터지면서 굳어졌지요. 대학은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데모하다가 짤리는 곳이다 이런 생각으로 간 거지요. 좋은 대학은 데모 잘하는 대학이다 이런 생각이었지요. 집안 반대요? 우리 집은 그런 거 없었습니다. 작은 형은 좋은 생각이라면서 적극 권장하였죠.

대학 1학년 때 광주항쟁을 기념하는 검은 리본을 달자는 운동을 하다가 어느 새벽 경찰에 잡혀갔다가 군대와 감옥 둘 중 하나를 선택 당했다. 군대를 택한 게 양심에 걸려 그는 군대생활을 감옥 이상으로 고통스럽게 치뤄야 한다고 맹세했다. 군에서 주는 견딜 수 없는 모멸감에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뭘 모르는 그의 상관은 궂은일이면 도맡아 하는 그를 ‘우수장병’으로 추천해서 상까지 받게 하였다.

그는 권력을 위해 사는 것보다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사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외통수의 길을 걸으며 리버럴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다.

전 사실 진보니 사회정의니 이런 것들은 별로 땡기지 않아요. 정직하고 양심적이고 자기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자기 무게만큼 자기 발자국을 남기는 삶, 그것이 아름다운 삶, 진짜배기의 삶이라고 생각해요. 딜레마는 이 세상 어디에도 그런 삶은 없다는 거지요. 누구로부터 구애받지 않고 내가 누구도 구애하지 않겠다. 세상에 그런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런 것을 추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87년 대선 때 일이다. 공정선거 감시단 활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성래역 근처에서 땅콩 장사 할머니를 보았다.

무지하게 추운 밤이었지요. 할머니는 그 허허 벌판에 땅콩 광주리 하나 달랑 놓고 바람막이 하나 없이 앉아 계셨습니다. 그 땅콩 다 팔아도 돈 만원 남짓했습니다. 눈물이 막 나오더라구요. 그날 선거풍경과 할머니 모습이 겹치면서요. 반성을 많이 했지요. 운동이네 하면서 폼잡는 삶이라는 게 도대체 뭔가,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싶었습니다.

바로 스스로에게 몇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담배끊자. 다음 날로 딱 끊었습니다. 사회과학 책도 가급적 안 본다, 모두 치워 버렸죠. 그 대신 어제까지만 해도 진저리나게 싫어하고 혐오했던 ‘문학과 지성’류의 책들을 가까이 하면서 지냈습니다. 문화관련 책을 많이 읽었지요. 그전엔 사르트르는 쳐죽일 놈이었는데 실존주의 철학을 많이 읽었지요. 생활 가까이 살고 싶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이상, 이런 거하고 담쌓고 말이지요.

그는 개신교 신학대학 출신이면서 천주교에서 영세도 받았다. 세례명은 요아킴.

스스로의 약속중의 하나로 성당에 나갔지요. 성당은 형식에 구속되는 성향이 아주 강하지 않습니까. 당시 제 신앙에 비춰봤을 때 그게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개신교는 좋게 말해서 아주 참여적인 거지요. 그런데 그때는 뭐든지 나부대고, 나서고, 참여하고 이러는 것들이 싫더군요. 제자리에 저를 앉히고 싶었지요.

내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 밖의 어떤 힘에 의해서 그렇게 되고 싶었던 것이지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3년간 거의 한 주일도 빠지지 않고 다녔는데 지금은 교회도 성당도 안나가고 있습니다. 뚜렷한 마음의 동요가 있는 게 아니라 순전히 제 게으름 탓이지요. 언젠가는 다시 나갈 겁니다.

지금이라도 목회활동을 할 수 있지 않나요?

그렇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게 어려울 것이라고 보겠지만요. 하하하….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 그런 확신만 있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요. 언젠가 하고 싶습니다. 인구 30만 정도의 소도시에 가서 양을 치는 목자가 되면 삶이 참 평화로울 것 같습니다.

햄릿형 키다리 소년. 그는 정말로 생각을 많이 하면서 사는 사람인 것 같다. 언제 생각대로 세상이 움직이더냐? 그런데 왜 그는 생각에 생각을 하면서 사는가? 피곤하지도 않나? 지치지도 않나?

우리 또래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은 좀 다르긴 하지만 얼마 전 까지도 이거라도 안 하면 죽을 것 같다는 절박감이 있었어요. 사람이 생각을 안하고 살면 짐승과 다를 게 무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지요. 그런 강박 같은 게 있었어요. 지금은 그냥 털어놓고 내놓고 그러고 싶은데 그게 쉽게 되지 않지요.

남자 나이 마흔이 되면, 아니 인간의 나이 마흔이 되면 어떤 생각이 들까? 내 인생에서 난 얼마나 주인공인가? 나는 내 인생 안에서 얼마나 나를 펼치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그리 높을 필요도 없는 산꼭대기에서 야호! 외쳐보고 혼자 등지고 앉아 생각을 해보고 싶을 것이다. 도대체 난 어떻게 살아온 것이고 앞으로 생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그는 독일에 가면 자신을 풀어보고 싶단다.

한국 사회에서는 저를 옭아매는 게 너무 많아요. 나의 본성을 풀어놓고 보고 싶어요. 나를 규정하는데서 놓여나 보고 싶다는 거죠. 시민단체 간부, 나이 마흔의 남자, 남편, 아버지 뭐 그런데서 말이지요. 새로운 환경을 만나 일탈을 맛보고 싶은 것이죠. 이런 내면으로부터의 자유를 운동의 열정으로 연결 지어보고 싶은 거지요.

자기를 해방시키는 것이 곧 사회를 해방하는 것이고 우리 공동체를 해방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제가 말로만 그런 게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물론 말짱 꽝 일수도 있지만요. 하하하………

지난 학기에 한신대학에 나가 후배들에게 강의를 했다. 학보사 기자로, 언더 서클 지도자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던 그는 시민단체 활동가로 강단에 서서 ‘요즘 사회’를 어린 후배들에게 가르쳤다. 참여연대로 오기 전 그는 국회의원 보좌관이었다. 안기부 돈을 받아먹은 보좌관도 요즘은 있는 것 같은데 그 시절 그의 동료들은 분위기가 달랐다.

학생들이 국회를 점거했을 때 백골단과 맞서 몸싸움을 주도하기도 했고 농성진입로 안내도 친절히 해주었다. 그래서 신문에서 ‘좌파 국회진입’이라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그는 문동환 의원을 시작으로 이우정 의원, 신낙균 의원 보좌관으로 도합 십 년을 일하고 국회를 떠났다. 그리고 바로 참여연대로 온 것이다.

당시 평민당 보좌관들은 모두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습니다. 애초 중산층을 위한 정책을 지향한 것과는 달리 대선이 다가오면서 중산층 이상의 지지계층 확장, 민주와는 상관도 없는 인물 영입, 점점 빈쭉정이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 곳을 나오고 싶었습니다.

그럴 즈음 그가 참여연대에 끌린 결정적인 동기는 ‘땀흘리는 젊은 후배’들이었다.

국회사무실에 당시 사회복지위원회 활동가였던 박순철씨와 이정운씨가 왔었는데 건실한 그 모습에 반했었지요. 제가 협동사무처장을 맡게 된 것은 순전히 나이 탓입니다.

그리고 ‘참여연대 5년’은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으신지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참여연대가 제게 뭘 해주었는가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참여연대에 두 다리를 온전히 담그고 혼신의 힘을 다했으면 그 행복감이란 게 아마 저를 휩쓸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한쪽 다리만 담그고 있었지요. 활동을 접는 이 마당에 회한이 입니다………….(긴 침묵. ‘남자는 가슴으로 운다’)

끝장을 봤으면 5년간의 시간이 행복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지요. 제게는 과분한 시간이었고, 그 과분함에 비해 제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회한이나 미안함이 남아 있습니다. 목욕탕 가서 미처 씻어내지 못한 비눗기 같은 느낌이지요.

자, 다시 좀 냉정하게 돌아서자. 그럼 이 마당에 후배들에게 어떤 얘기를 들려주고 싶으신가요?

좀 곤란한 대목일수 있겠는데요. 전 일단 규모의 논리로, 참여연대가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해야할 일이 산적해 있고 팔 걷어 부치고 나서야 하지만 그 모두를 참여연대가 할 수는 없지요. 볼륨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의 규모, 인력 풀에 대한 재고도 있어야지요. 회원수도 그래요. 한 단체가 무조건 늘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죠. 상한선을 정하고 다른 단체로 돌릴 줄 아는 모범을 보였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네트워크 운동이 되는 거지요.

참여연대 지향하고 있는 정신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참여연대가 독식하고 있다는 말이 있는 게 사실이거든요. 그런 이야기의 정당성을 판별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런 얘기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운동의 모범을 스스로 보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민사회 전반의 성장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늘 이런 식의 ‘따가운 발언’을 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제가 회한이 든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지요. 분명 제 역할이 있다고 생각했었고 그 역할을 아예 안한 것은 아니지만 점차 상당 부분 접었거든요. 처음 왔을 때의 의지에 비해 소극적이고 회피적이 되었지요. 두 가지 이유에서이죠. 하나는 저 스스로의 의지가 많이 금갔다고 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불가피성 같은 것이죠. 저렇게 열심히 땀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격려를 해준 못할망정 딴지를 걸어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딴지를 걸 수 있는 나의 정당성은 과연 있는가 하는 생각, 자신이 없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힘있는 얘기가 나올 수 없거든요.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다시 얘기가 모아지는 게, 내가 그만큼 열심히 했더라면 내부에서의 그런 얘기도 힘있게 주장 할 수 있었을텐데…..

대안적 모델을 제시하면서 말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거지요. 문제의식이 있다고 해서 그 자체로서 정당할 수가 없는 거지요. 자기 삶의 운동성이 담보되어 있을 때에야 비로소 문제제기가 힘이 있고 실효성이 있는 거지요. 회원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문제제기에 앞서 회원으로서 과연 시민운동에 어느 정도의 열성과 책임성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내부의 문제제기 같은 것에 힘발이 실린다고 할 수 있지요. 무서운 실용주의적인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야말로 비트겐슈타인처럼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일까’이런 생각도 들고요.

그는 최근에 몰려 일어났던 시민단체에 대한 외부 위협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을까?

시민운동은 작년으로 절정을 맞고 올해부터 재조정기에 들어갈 것입니다. 지금 참여연대만 구설에 오르지 않고 있지요. 참여연대로서는 올해가 엄청난 위기의 해가 될 것입니다. 대외적으로 참여연대가 성장의 한 고비에 다다랐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이를 견제하자는 다른 외부의 힘이 흠집을 내려고 할 것입니다.

참여연대가 흠집이 난다는 것은 시민운동 전반에 대한 타격이 될 것입니다. 이런 위기는 시민운동이 내외의 도전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제 성장의 한 단락을 매듭짓고 새로운 시민 운동의 자리를 되찾아 가는 시기로서 중요하지요. 이럴 때 저는 또 밖으로 나가니 어려운 시기를 함께 못하게 되어 미안한 거지요.

그는 자신의 이 길이 후배 간사들에게 길을 터주는 역할이 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독일 가서 가장 관심을 쏟아 할 일 중에 하나가 ‘이런 자리 더 알아보기’이다. 자기로서는 별로 노력한 것도 없는데 이런 혜택을 받는 것이 미안하다는 말이다.

살아온 과정자체가 무임승차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폼잡는 삶만 살아왔다는 거죠. 학생운동도 제가 운동을 치열하게 해서가 아니라 상황이 나를 그렇게 내몬 거지요. 내 이념적 숭고성의 발로가 아닙니다. 세상이 나를 투사로 만든 것입니다. 왜 찰리 채플린 영화 보면 데모대 꽁무니 따라 가다가 그 데모대가 경찰에 쫓기는 바람에 선두가 된 장면 있잖아요. 제가 그 꼴입니다.. 제가 들인 공이나 노력에 비해 너무 큰 대가가 돌아왔습니다. 저는 어렵게 사는 게 아니지요.

그렇지만 경제적으로는 어렵게 사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50만원을 빌릴 수가 없어서 옥수수 밭에서 농약 먹고 자살하는 농민의 삶 같은 곤궁함은 없었습니다. 주변 친인척들의 도움이 큰 것이죠. 그것도 무임승차이지요. 빚도 많이 내고 물론 어려웠지요. 지금 그것 정리하느라 힘들긴 하지만. 다 처리하고도 빚이 천 오백 남는데 갔다와서 새로 시작하는 거지요.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가?

자신은 없습니다만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여성문제가 단지 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시민운동의 궁극적 패러다임이란 페미니즘적인 패러다임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초기 사회과학 공부를 할 때 계급구조로 봐서 최고 말단에 있는 이가 바로 우리 어머니 같은 여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어머니는 엄청 얻어맞으면서 살아오신 분이거든요. 얼마 전에 얘긴데, 우리 어머니 더러 이혼하시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어머니를 두드려 패면서 살아 오셨거든요. 한번은 제가 경찰에 신고를 할까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얘기를 다 드러내느냐, 다른 가족들이 알면 싫어하지 않겠느냐, 더구나 부모님 이야기인데 라고 했더니 그는 정색을 하고 답한다.

전혀, 전혀, 전혀! 우리 가족들은 창피하다고 하지요. 그러나 전 전혀 안 그렇습니다. 오히려 이런 거 많이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식구의 문제가 아니라 폭력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로서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처신을 못하면 아버지로서의 자격이 없는 거지요. 혈연이란 순전히 우연 아닙니까? 자식이란 내 소유도 아니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 것도 아니지요. 단지 가족이란 이유만으로 그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아닌 거지요. 가정 폭력 이런 거 근절되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남자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욕망의 충족 체계 속에서 존재하는 대상이지요. 남성으로 인해 인간공동체가 얼마나 황폐화되고 파멸되고 있습니까? 제가 다시 여성으로 태어난다면 너무나 절망스러울 것 같아요. 여성들과 함께 하는 남성 정도 그런 게 아니라 대안적 사회의 모델로서 굉장히 귀중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 이정현씨가 행복해 보이는가? 그는 아내로부터 구원 당했다고 말한다. 운동권에다 가난한 신학대학 출신인 자신을 거두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13일의 금요일 에 결혼했다.

14일 토요일로 했다가 사람도 많고 복잡할 것 같아서 금요일로 옮겼지요. 날짜가 그러면 누구도 안 할 게 아닌가 싶어서요.

최근 그의 아내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와 결혼한 이유로 ‘당신이라면. 뭘 해도 같이 할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애시당초 물질적 안정 같은 것은 생각에 넣지 않았다고 한다. ‘탐욕스런 삶을 살지 않은 것에 대해 제 아내가 저를 인정해 주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남편 덕분에 아내는 결혼 십 년 동안 이삿짐 싼 횟수만 해도 수십 번이다.

거기다가 국회시절 말고는 월급봉투를 제대로 가져다 준 적이 없다. 그래서 아내는 어쩌다 받아보는 월급봉투를 ‘신기하게’ 바라본다. 참여연대 와서도 처음에는 ‘시민단체 재정형편상 절감차원에서 사양’한다면서 안 받고, 그 다음은 ‘내 월급 하나면 두 사람의 간사 월급’이라면서 안 받았다. 그런데도 아내는 남편에게 ‘그런 결정을 하려면 반드시 상의해서 하자’는 말로 훈방조처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김형완은 확실히 이정현에게 구원받았다.

그가 중학교 때 빠졌다는 푸쉬킨의 시구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은 지나가고 기쁨의 나날이 오리니…..’ 시골 이발소 벽에 매달려 있던 액자 속의 이 시야말로 진실이 아닌가. 착하게 사는 소년의 얼굴과 닮은 그는 한번도 이 삶 속에서 슬퍼하지 않았다. 다만 견딜 뿐이었다. 두껍게 언 얼음장 저 아래 맑은 심연에서 헤엄치는 한 마리 빙어(긴 빙어).

언젠가 그는 심연의 그 푸른 줄기를 몰면서 수면 위로 떠올라 올 것이다. 그때 물안개 기둥 번득이며 피어날 것이다.

글쓴이 : 권은정
한겨레신문과 한겨레21 런던통신원으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영국과 유럽을 취재했다.

그 과정에서 보통 사람, 특별한 사람, 유명한 사람, 덜 유명한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들을 두루 만날 수 있었다.

저서로 <젠틀맨 만들기>, 번역서로 줄리언 반즈의 <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에>, 조아나 트롤로프의 <타인의 아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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