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05월 2001-04-02   1039

[권은정의 파워인터뷰17] 호밀밭의 파수꾼 로광욱 2001/4/2

과녁을 너무 멀게 두지 말게나.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람까지 부는 저녁이었다. 그래서인지 연주장 안은 더욱 아늑하고 따뜻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비가 갈라준 공간, 그 안에 함께 있다는 마음 때문인지 로 광욱 선생의 노래를 듣기 위해 아트 선재센터에 온 이들은 모두가 낯익은 듯했다. 로광욱의 곡에 성악가들의 열정이 녹은 음악은 객석을 다사롭게 감아가고 있었다. 그의 가곡발표회가 열리는 토요일 저녁은 그래서 ‘봄비가 속살거리는’ 낭만의 시간이었다.

‘아, 연주회, 참 좋았지요. 노래를 불러주신 분들이 고맙고 또 그 궂은 날씨에 와주신 분들도 너무 고마웠고요. 아, 그런데 난 내 노래인가 싶었어요. 근 20년 만에 들어보는 노래고 또 처음 불리워지는 노래도 있었으니 하하하………’

그의 표정엔 오랜 학예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학동의 자랑스런 미소가 마구마구 번져나가고 있었다. 자신이 평생동안 지은 곡들을 고국의 무대에 올린 감흥은 아무리 조용하게 표현해도 그 흔들림은 감출 수 없는 것이었다. 옆에 있는 이들조차 아주 유쾌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원래 테너가수였다. 나이를 핑계삼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 그리고 그는 원래 치과의사이다. 워싱턴에서 수십년 간 치과를 개업해오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삼월에 내리는 눈발을 받아가며 우리를 그의 음악회에 모이게 한 이유는 또 있다. 그는 재미 통일 운동가이기 때문이다. 그가 미국에 살면서 고국의 통일이나 민주화를 위해 도움 준 것에 대해 여러 단체 많은 이들이 고마워하고 있다.

내가 일생동안 한 게 세 가지인데 하나는 생업으로서 치과의사, 본업으로서 음악이고 또 하나는 자나깨나 한 그거이, 뭐라고 이름을 부칠까. 뭐 그냥 고국을 생각하면서 산 거지. 내가 무슨 애국자연 하는 그런 건 추호도 없고 그냥 체질화된 것 같아요. 민주운동가니 하는 그런 말은 내가 들으면 난 불편하지요.

나 자신은 통일운동 한다고 하진 않았지요. 그런 일을 하다 보니까 통일운동가로 둔갑한 거지요. 내가 애국이니 하는 말은 감당하기 힘든 말이지만, 내가 45년부터 53년 모국을 떠날 때까지 청년시대를 고스란히, 그런 분위기 속에 살면서 바친 거거든요. 모든 것을 다 바쳐놓았으니 어딜 가든지 그게 그대로 연장되었다고 할 수 있는 거지요. 그냥 자연스레 그렇게 된 거지요.

그의 고향은 진남포이다. 소학교와 중학교를 평양에서 다녔고 1938년에 평양을 떠났다. 그가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는 이유가 있다. 그의 부친 로정일 박사는 바로 ‘옛날에 금잔디’ 그 노래 말을 만드신 분이다. 당대의 소프라노 윤심덕과 함께 활동할 정도로 부친은 음악성이 뛰어났다. 그러나 그의 부친도 생업은 연희 전문학교에서 윤리학교수였다.

그 옛날에 벌써 일본, 미국, 영국을 두루 다니며 콜럼비아, 옥스퍼드 등 세계의 명문대학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분이다. 우리는 현진건이나 다른 소설가들의 작품을 통해 익히 당시의 신문물을 공부하는 아버지를 둔 가족들의 애환을 익히 알고 있다. 그와 그의 형제자매는 늘 어머니만 계시는 집안에서 어머니의 기도소리에 잠이 들고 잠이 깨곤 하면서 자라났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음악성 때문이었는지 그의 음악생활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사실 처음부터 음악을 전공하려는 마음이 있었어요. 당시 아버지의 서생으로 있던 분이 예명이 왕 평 선생이셨는데, 그 당시 노래 뿐만 아니라 연극, 영화도 하신 아주 유명하신 분이었어요. ‘황성 옛터’ 그 곡을 작사하신 분이지요. 중학교 4학년 때 그분을 찾아가서 도와주겠다는 언약을 받았는데 강계인가 어디 가서 순회공연 하다가 무대에서 뇌졸중으로 돌아가셨지요. 그러니 난 음악에의 희망을 접었어야했지. 집안에 돈이 있어서 한가롭게 할 처지도 못되고….. 그래서 치대를 간 거지요.

그의 음악공부는 경성제대에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치대 졸업하던 해인 1943년 스물 한 살 때 부민관에서 처음으로 독창회를 가졌다. 그 이듬해 다시 독창회를 가지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음악가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1947년에 배제강당에서 세 번째 독창회를 가지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음악가로서의 기반을 완전히 다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바야흐로 그의 생업과 본업이 완전히 50대 50의 비율로 나눠지게 된 것이다. 그는 당시 창립된 조선 음악가 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이기도 했다. 그의 음악적 명성은 1946년에 열린 문학 대표자 회의에서 축가를 부를 정도였다.

아주 역사적인 결성대회였지요. 지나고 보니 그게 아주 중요한 행사였더라구요.

그는 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었다.

그러다가 1953년에 미국 가서 그곳에서 다시 치과대학을 다녔어요. 필라델피아 시립병원 인턴, 뉴욕 덴탈 클리닉수료, 뉴욕대학 치과대학원…..1959년에 졸업을 하고 워싱턴에 개업을 할 때까지는 그야말로 정신없이 공부만 하면서 살았지요.

치과의사로 길을 택한 것을 후회하신 적은 없으신지요?

아무래도 좋아 했길래 그렇게 한 게 아니겠어요. 난 치과를 그냥 그렇게 적당히 한 게 아니에요. 사람을 고친다는 의식이 사회운동 하는데서 그렇고 모든 것을 이치를 따지는 데, 사고하는데 아주 기본적인 것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요. 치료한다는 것이란 게 언제나 원인추궁이야. 질환이 나오면 원인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있는 거라구. 그래서 운동을 해오면서도 좀 물위에 기름이 뜨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있었지요.

그런 게 남아 있었다구요….. 신탁통치 때도 그래요. 도리가 없는데 왜 보이콧을 하나 생각했지만 그래도 소위 진보적인 사람들은 그런 표현을 못하지. 원인을 정확히 규명해야지, 실상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앞으로 나갈 길을 정잘 결정할 수 있는 거지. 치과공부 한 것이 사물 보는데 좋은 영향을 준 것 같아요.

그는 워싱턴에서 근 30년 가까이 치과을 해왔다. 주말이면 포트맥 강에서 연어낚시를 하여 이웃이나 한국에서 온 이들을 정성껏 대접해 주었다고 그의 집을 다녀온 이들이 증언한다.

환자들하고는 재미있게 지내셨나요?

내가 치과 할 때 정신을 집중해요. 한시간 두 시간 동안 한 사람만 잡고 치료하는 것을 보고 집사람이 감탄을 해요. 그런 자세가 치과에 아주 좋은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아내 효숙이가 알지만 내가 치과를 개원해서 돈을 많이 벌겠다는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환자가 오면 오고, 가면 가고 그랬지. 근데 성심껏 하며 사니까 지난 이 삼십 년 동안 다니던 환자가 하나둘 죽는 것까지 보고 그래요. 내가 치과를 왜 했나 후회해 본 적은 없어요. 내 힘대로 내 능력대로 살 수 있는 거지요. 경제적으로 남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다지 싫은 것도 없었고. 치료하면서 난 늘 치료방법을 고정시키지 않았다고. 새롭게 옳게 해왔지요. 사회운동, 민족운동도 그 정세와 그 형편에 맞게 움직여 왔는데 그런 습성도 아마 치과진료 하면서 거기에서 생긴 것 같아요.

60년까지는 공부하고 자리잡느라 다른 것은 전혀 생각을 못하고 살았다는 그는 워싱턴에서 병원을 개원하면서 통일운동도 시작할 수 있었다.

다들 그랬겠지만 고국을 떠날 때는 다시는 뒤도 돌아보지 않겠다고 떠났지요. 그 당시가 그랬으니까. 미국에서는 매카시 청문회가 굉장하던 때였지요. 미국 와서 금방 김용성 선생께 편지를 한 적은 있었지만 63년에 워싱턴에 정착할 때까지는 학교 다니느라고 정신없었기 때문에 통 연락을 못했었지요.

그 이후 그분을 돕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 김용성 선생은 남북이 협상하라는 편지를 내고 그랬거든요. 북에선 긍정적이었는데 남한 박정희 정권은 적대시해서 그분을 고립시키고 그랬지요. 다른 사람들은 그분께 접근하기를 겁냈었지요.

미국에서 통일운동 하기는 여러 면에서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중 교포사회에서 주는 압력이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군사독재 반대 운동하니까 워싱톤에서 나를 그냥 말살시키려는 의도가 여러모로 있었다고. 미인계를 쓰지 않나. 은행을 사라하지 않나. 치과 고소를 해서 골통을 먹게 했지. 수만 불 손해를 입게 만들고. 그래서 한동안 아주 고통스러웠지요. 나도 이젠 내년이면 만으로 80인데, 그래서 정리한 것이 바로 악보 발표이기도 하지만. 그 일 하면서 내가 가진 서류를 죽 정리하다 보니, 내가 어떻게 지난 70년대 80년대 그걸 뚫고 살아 나왔나 숨막히는 그 시대를 견뎌 나왔나 싶어요.

그런데 그의 아내가 오히려 더욱 꿋꿋하게 견디어 냈단다.

그의 아내는 이효재 선생님의 동생 분으로 이효숙씨이다. 음악회 내내 그리고 리셉션 동안도 남편 로광욱은 아내 이효숙을 바로 자기 옆에 앉히려는 노력을 별로 하려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저 몇 자리 건너 부부가 각각 앉아 있어 동부인을 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다른 이가 로선생 부인을 소개시키니 그냥 빙그레 미소만 짓는다. 미국에 오래 살았으면 매너가 달라야하는 거 아닌가.

하하하…..그런 매너는 1950년대 바로 그때 그대로지 뭐…난 사실 임머츄어(immature)하니까 그냥 내 생각대로 했는데 아내가 힘들었어요. 나를 험구하는 내용이 글세 책으로 단행본으로 묶어져 나왔단 말이에요. 그런데도 아내한테 물어보면 뭐 그냥 그렇게 살아온 거라고 덤덤하게 말해 주니…….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도와주는 경우도 많았어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날 도와주고 그런단 말이에요. 가까이 지내던 이들은 등뒤에서 칼을 꽂는데……

평소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 등뒤에서 그를 험구하였다. 북한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그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여두고 투서에 밀고에….미국 한인 교포사회도 당시 고국의 분위기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는 평양에서는 남조선 드나드는 첩자라는 소릴 듣고 남한에서는 북한 드나드는 첩자라는 소리도 들으며 살았다.

민주투사라면서 온 동네 떠들어대고 다니던 한 인사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날 그렇게 말하고 다닌 거예요. 그래서 난 가는데 마다 그 사람이 나타나면 해댔지. 그래서 난 싸움꾼이란 별명까지 얻고… 사방에서 그랬어요. 지난 문서를 들쳐보니, 참 그런 세월을 내가 어떻게 살아왔나 싶어요, 난 운동가라는 생각해본 적도 없고 그저 내 마음에 있는 일들을 하며 살았는데………..

그런데 지난 일을 자구 들춰내 보니 부정적인 면만 나온단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삼가야지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는 편이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내가 아무리 사실대로 말한들 결국 나는 옳고 그쪽은 나쁘다는 식으로 들린다고 말들 할테고, 그렇게 된다면 결국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결과적으로 될 수 있는 대로 거론하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결론을 내린 거지요.

좋은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지혜로워진다.

‘북한을 내가 두 번째 갔을 때 말이지………..’

‘아니 북한에 몇 번을 다녀오셨나요?’
난 기어코 이렇게 질문하고 말았다. 정보부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투로 묻지 않을까? 이제까지 살아온 내 머리에 징이 되어 박힌 바로는 ‘북한은 보통 사람은 갈 수 없는 나라. 더구나 자주 갈 수 없는 나라인데?.

허허허….. 다들 저렇게 물어. 북한을 갔다왔다 하면 몇 번 다녀왔냐고 부터 묻는다니까. 하하하…. 그 질문 이면에는 당신 평양을 네 집 드나들듯이 다닌 거 아니냐는거지. 작년인가 역사 공부하시는 분인데, 평양에는 몇 번이나 갔어요 하고 물었거든요. 난 몇 번 간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했지요.

우리는 반공교육을 밤낮으로 받아먹으며 살아온 반공세대가 아닌가. 우리 앞에서 누가 평양의 풍광이 좋다는 말만 해도 들어도 되는지 싶어서 안절부절하고 월북 시인들의 시집을 몰래 숨겨 읽어야했던 아픈 경험을 가진 가련한 세대이다. 그런데 아무리 미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그렇지. 누가 내 앞에서 평양을 몇 번이나 다녀왔다고 하면 다음 질문을 어떻게 할까 막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집단 무의식적인 불균형. 내 안의 이 바위 같은 덩어리가 이처럼 답답하게 느껴진 적도 없었던 것 같다.이런 것은 치유가 가능할 것인가?

흘러간 세월을 다시 오라고
추억을 더듬어 같이 손잡고
찾아갈 내 고향엔
혼자 가지 마세요
……잊지 못할 내 고향엔
혼자 가지 마세요
……..


이번 두 번째 그의 가곡집인 ‘파도처럼’은 다음 헌사를 달고 있다. ‘이루지 못한 꿈을 위하여, 신막 형에게’ 신막은 해방공간 동안 그와 함께 민족음악 건설의 기치를 세우고 그와 함께 조선음악가동맹활동을 함께 했던 이다.

나의 좋은 친구였지. 저녁 후에 얘길 시작해서 아침 닭이 울 때까지 얘기를 하고 그랬으니 얼마나 그랬겠어요. 야참 먹으면서. 그 형은 나와 나이가 13살이나 차이가 났는데도 날 아주 동등하게 대해줬어요. 그래서 신막형 하고는 해방직후부터 한국 전쟁 날 때까지 그림자처럼 늘 같이 다니고 그랬지요. 그래서 한번은 치과대학에 찾아왔는데 우리가 속한 근로인민당 당사가 광화문 네거리 파출소 주위에 있었어요. 거기 가던 길에 붙잡혀 마포 경찰서로 갔는데 그때 신막이 먼저 전기고문 당해 새파랗게 질려서 나오고….

신막 형은 6.25가 나자마자 붙들려 갔는데 소위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온 것이 그 후일거야. 북에서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남쪽에서 남로당이나 그 계열에서 붙들어 가지 않았나 난 그렇게 확신을 하고 있다구. 그렇게 어이없이 붙들려가서 행방이 묘연한데, 북에 갔다 뭐 어쨌다 그러지. 그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어요. 그 분이 내보다 13년 위인데 그런데도 나를 언제나 앞세워주고 그랬어요. 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구. 가족에서도 버림받고. 물론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야 아니겠지만,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이번에 모든 음악을 그분을 추억하면서 헌정한 거지요.

신탁통치, 보도연맹, 대한민국 단독정부, 근로 인민당……………. 그의 말에서 현대사가 시간대로 훑어지는 것을 들으면서 난 질문이 불가능하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냥 듣는 것이다. 역사를 알기 전에는 내가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냥 그가 하는 말이 모두 현대사였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를 하는 그는 내게는 살아있는 현대사 역사책 바로 그것이었다.

난 어느 쪽이 더 옳고 더 그르고 그런 말을 하고자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 모두 피해자인 걸요.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요. 그 노래 ‘고려산천 내 사랑’에서 말이지. 서로 다독거리면 살아가자구요’

그의 얼굴에 슬픔이 번져나갔는지 알 수 없다. 우는지 웃는지를 난 알 수가 없었다.

반공하는 이든 반공하지 않는 이든 모두 받아들이는 그거 아니면 …. 큰 상처는 욕하고 그럴 게 아니라 붕대로 잘 감싸주고 시간을 들여야해요. 싸움도 상대가 있으니 되는 거라구요. 한쪽이 가만히 있으면 싸움이 안되거든요. 너무 비전문적인 당위론적인 얘기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뜨거운 마음과 차가운 이성 그런 말 있지 않아요.

그는 작금의 우리의 통일 운동분위기에 실질적인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젊은 세대들이 통일운동에 대해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팍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내가 보기엔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남북문제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보는데, 하나는 우리가 똑같은 민족이고 언어가 같고, 음식 같고, 더구나 외국인이 봤을 때는 남북사람을 구별 못 하거든요. 한나라라도 언어가 수십 가지가 있는 나라도 있잖아요 그런 면에선 민족적인 문제는 똑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독립된 나라면서 극단적으로 대치된 나라란 말이에요.

한반도의 주민, 저는 국민이니 인민이라고 안하거든요.. 그냥 한반도에서 운명적으로 생을 타고 난 주민들인 남북이 평화적으로 문제를 푸는 것밖에는 우리 문제 해결책은 없어요. 국제정세로 보나 방향은 이미 그쪽으로 가고 있는 게 확실한 듯 한데 지금 NMD가 복잡하게 되어가고 있어서….. 문제를 얽히고 설킨 실타래 풀어나가는 그런 기분으로 당국자들이나 일반 시민들이 대해야 한다고 봐요.

서로 상반되는 그런 조건이 있는데도, 통일 통일하면서 당장 통일이 될 것처럼 말하면 젊은 사람들은 아 또 거짓말하는구나,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하니 그 사람들 마음에 들어오지 않지요.

여든 세월동안 한국의 현대사를 살펴보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결론을 내리자면 어떻게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산행을 가는데 옆에서 멀리 꼭대기를 보지 말고 바로 내딛는 발을 보세요. 어느 사이에 정상에 와있게 되거든요. 우리 운동도 민족대단결! 자주 어마어마한 얘기보다는 발 밑에 있는 문제해결부터 소홀히해선 안되지요. 등산하면서 그런 문제를 배웠지요. 그냥 그저 생각이라는 것을 너무 저 멀리 앞세워 놓으면 현실과 목적지 사이에 갭이 생기는 거지. 우리는 너무 감정적인 데가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서로 달래며 발맞춰 갑시다. 서로 달래야지 서로 윽박질하면 싸움밖에 할게 없잖아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내가 자꾸 강조하지 않아요? 운동하는 그 초점, 그 목적을 너무 감감한데 갖다놓으면 과녁을 맞추지 못해요. 현재 직면한 애로사항, 그것을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세요. 아니 세상에 왕래도 다른 나라처럼 하지도 못하면서 민족 대단결, 연방제, 연합체 다같이 합시다! 할게 아니지요.

그전에 뭔가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중무장한 대치상태는 그대로 있고… 원인을 규명하고 제거하고 진통제도 주고 안정제도 주고 일단 진정시킨 다음 뭘 해야지. 환자로 치면 베드에 누워있는 중병환자를 운동장에서 뛰라고 하자는 식이 아닌가 그런 생각인 거예요. 난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이지요. 다른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면 할 수 없는 것이고, 하하하하………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통일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래서 내가 노래에서 그러지 않아요.

남이나 북이나 그 어데 살아도
다같이 정다운 형제들 아닌가
동이나 서나 그 어데 있어도
다같이 그리운 자매들 아닌가
산도 높고 물도 맑은
아름다운 고려산천 내나라 내 사랑아
산도 높고 물도 맑은
아름다운 고려산천 내나라 내 사랑아

하나의 소원
해도하나 달도 하나 강산도 하나
갈라져 살아온 지 그 몇 해인가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 만나자
아, 간절한 소원 이루자

글쓴이 : 권은정
한겨레신문과 한겨레21 런던통신원으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영국과 유럽을 취재했다.

그 과정에서 보통 사람, 특별한 사람, 유명한 사람, 덜 유명한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들을 두루 만날 수 있었다.

저서로 <젠틀맨 만들기>, 번역서로 줄리언 반즈의 <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에>, 조아나 트롤로프의 <타인의 아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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